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6)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6화(16/143)
16화.
공녀와 탐정 (16)
사흘 뒤.
크루파드 대장이 이끄는 에투알 분견대가 탄 배는 사과의 섬을 떠난 지 한 시간 만에 회오리 곶 밑의 항구에 닿았다. 항구에는 몽타뉴를 다스리는 몽트루아 백작이 보낸 영접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접단을 이끄는 사람은 몽트루아 백작의 맏딸 잔이었다. 잔 드 몽트루아는 백여 명에 달하는 군대까지 이끌고 와서 자신이 샤를로트 공녀를 직접 모시고 수도로 갈 예정임을 알렸다.
“이제 공녀 연하께서는 에투알이 아니시므로 몽트루아 가문이 모시는 것이 더 격에 맞는 예우일 것이다.”
그러나 크루파드도 한때 반역의 땅이기도 했던, 그리고 강대한 세력을 가진 지방 영주인 몽타뉴의 군대에 대공위 계승자를 넘겨주고 물러날 정도로 안이하지는 않았다.
“공녀 연하께서는 에투알에 오래 몸담으셨기 때문에 계속해서 에투알의 호위를 받으시는 것이 가장 편안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녀님의 뜻이 다르시다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가장 편안하다’는 말은 듣기 좋게 돌려 한 말이고, 실제로는 그러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는 뜻이었다. 호위 능력으로든, 반역의 가능성으로든. 잔도 크루파드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삐딱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럼, 연하의 뜻을 들어 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샤를로트와 마주선 잔은 당황했다. 공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샤를로트는 새하얀 예장용 에투알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건 정식 에투알에게만 주어지는 옷이고, 갑자기 짓기에는 꽤 장식이 많아서 미리 준비해 오지 않았더라면 당장 입고 있기란 불가능했다.
“연하, 지금 입고 계신 의상은 혹시…….”
“이것 말인가?”
샤를로트가 어떠냐는 것처럼 한 팔을 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최종심을 통과하지 못했으니 난 명예 에투알로 남게 된 셈이지. 그렇다면 이 옷이 어울리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
에투알 최종심을 통과하지 못한 공자, 공녀들이 명예 에투알이 되던 시대는 수십 년도 더 전이었다. 지금은 에투알이라는 사실이 별다른 명예를 더해주지도 않는 만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져보면 샤를로트가 에투알에 들어갈 필요도 전혀 없었다. 같은 이유로, 샤를로트가 명예에투알이 되겠다는 결정도 누가 굳이 말리겠는가?
“그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이제 로를리 궁으로 돌아가실 것이니 저희가 어울리는 예복을 준비하도 록 하겠습니다.”
“아니, 이거면 충분해. 이 또한 예복이니까.”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필하며 정무 감각을 익혀온 잔은 공녀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느끼고 불안해졌다. 샤를로트 공녀는 아마도 에투알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은 모양이다. 예전에 그랬듯 대공을 밀착 호위하는 엘리트 근위대로서 복권시키려는 걸까? 그것까지는 모르지만 에투알에 소속되어 사 년이나 보냈으니만큼 공녀가 에투알에 심정적으로 동화된 것이 전혀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건 몽트루아 백작 같은 지방 귀족들에게 매우 불리한 전개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에투알이 콧대가 높아진 나머지 대공의 위엄마저 침범한다고 주장하며 대공이 그들을 멀리하도록 애써왔다.
이 사태는 샤를로트가 에투알이 되려 할 때부터 예견된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고, 그걸 예상했다면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린 공녀가 에투알에서 단 일 년이라도 버려 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베르나르 대공자가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또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지금 하필,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에투알 예장 제복을 준비해 온 사람은 대체 누구지?
잔은 열다섯 살에 불과한 샤를로트가 그런 계획을 세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크루파드와 로랑, 그리고 그 뒤에 선 수상쩍은 여자를 노려본 다음 말했다.
“연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삼가 따를 뿐입니다.”
결국 호위 문제는 크루파드가 이끄는 에투알 분견대가 샤를로트를 호위하고, 잔이 이끄는 군대가 그 뒤를 따르는 형태로 결론이 났다. 잔은 몽타뉴에서 하룻밤 머무르시라고 권했으나 샤를로트는 ‘대공께서 빨리 귀환하라고 명하셨다’고 말하며 그 청마저 물리쳤다.
그날 오후, 기묘할 정도로 기다랗게 늘어선 기마행렬이 회오리 곶을 떠났다. 선두에서 나아가던 크루파드는 정찰 목적으로 행렬을 끝까지 돌아보고 온 로랑이 말을 가까이 몰아 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어때?”
“뭐, 반역의 조짐은 없습니다.”
농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크루파드는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삼 대 일이라서 기분이 영 별로야. 빠른 녀석을 하나 골라 단장님께 지원 요청을 보내둬. 에르노 우물 근처에서 합류할 수 있도록.”
“그러죠.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 예장 제복은 대체 어디서 난 거죠?”
크루파드가 뒤를 슬쩍 턱짓하더니 말했다.
“저 여자.”
섬에서 사흘 머무는 동안 네이가 섬사람들에게 짓도록 해서 바친 옷이라 했다. 디테일이 완벽히 똑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에투알이 아닌 사람의 눈에는 구별되지 않을 터였다. 네이가 돌아가실 때 입으실 옷을 지어 왔다며 상자를 바 쳤을 때 샤를로트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꺼내보고 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기꺼이 그 옷을 입었다. 또한 그 결과 네이는 샤를로트를 따라오게 되었다.
“범상치 않네요.”
“계속 지켜봐. 수상한 짓을 하지는 않는지.”
로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섬에서도 그랬지만 떠나오고 나서는 더더욱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공녀 주위를 경계해왔다. 공녀를 모시고 대공 앞에 나아가 설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선 안 되었다. 어쩌면 그 뒤까지도.
잔이 알아차린 것 이상으로 그들은 샤를로트가 앞으로 에투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려 하는지 느끼고 있었다. 그건 에투알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였다. 이 기회를 잘 잡는다면 향후 에투알은 옛 지위를 되찾는 것은 물론, 예전보다 더 큰 전성기를 누리게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샤를로트에게도 이것은 중대한 선택이었다. 샤를로트 공녀가 장차 대공이 되자면 혈통적 정당성은 충분했지만 어머니 가문의 뒷받침이 없는 까닭에 귀족 사회에서는 지지 기반이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느 계파인가를 택해 숙이고 들어가 도움을 청하면 누구든 환영하긴 하겠지만 필연적으로 다른 계파와 적이 된다. 그러는 대신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사 년이나 호감을 쌓아온 에투알을 등에 업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한다. 그만큼 영리한 선택이 또 있을까? 동시에, 이보다 더 파란을 부르는 선택이 또 있을까?
이건 거대한 도박이다. 실패한다면 양쪽 다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너, 동굴에서 들었던 목소리 기억하지.”
로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루파드가 말을 이었다.
“네이라는 여자가 해준 얘기, 솔직히 잘 믿어지는 얘기는 아니지. 연하께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거 말이야. 구석진 섬사람들에게 무슨 전설이 있고, 프시키인가 뭔가 하는 걸 섬긴다는 둥, 그런 얘기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넘기겠지만 이건 그거랑 다르잖아.”
“그리고 연하께선 그 힘을 다시는 불러내지 못하셨고 말이죠.”
로랑의 말대로였다. 사흘 더 머무는 동안 샤를로트는 그 힘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써보았지만 네이의 도움이 있을 때만 아주 작은 흔적을 보았을 뿐, 동굴에서처럼 거대한 힘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 정도라면 샤를로트가 아니라 네이가 마술사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간단할 정도였다.
“네이는 프시키가 말을 하는 일은 없다고 했어. 프시키를 섬긴다는 섬사람들도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다고 했거든. 그런데 우린 들었단 말이야. 나 혼자 들었으면 내가 꿈이라도 꾸었나 하겠지만, 너도 들었으니까 말이지. 대체 왜였을까?”
“저희가 아니라 공녀님께 하려던 말이 아닐까요? 다만 공녀님께선 기절하셔서 못 들은 거고.”
“그럴까? 하지만 말이야, 나도 그 날 싸워봐서 알지만 동굴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공격적인 존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틀림없이 장난은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 어마어마한 걸 해내는 존재가 굳이 우리한테 들리게 말한 게 단지 우연 같지는 않거든. 어쩌면 말이야, 그놈들은 우리한테도 할말이 있었던 건 아닐까?”
“…….”
로랑이 얼른 대답하지 않자 크루파드는 잠시 말없이 말을 몰아갔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단장님께 연하를 보필할 항구적 분견대를 만들자고 건의할 건데.”
크루파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로랑이 뜻밖이라는 듯 쳐다보자 크루파드가 빙그레 웃더니 다음 말을 던졌다.
“너, 들어갈래?”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 잠깐 스쳐갔다. 그러나 곧 피식 웃어버린 로랑이 대꾸했다.
“아니, 당연히 제가 1번 아닌가요? 전 경력자라고요. 벌써 공녀님을 한 번 구해드렸단 말입니다?”
“그것 참 믿음직한 경력이네. 내가 알기론 공녀님께서 널 구했던 것 같지만.”
“뭐 그것도 사실이긴 한데요. 어쨌든 이런 경력은 향후로도 저밖에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러길 기원해보자.”
크루파드는 고개를 돌려 앞을 쏘아보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누르스름한 구릉이 끝없이 뻗은 지평선과 그 위에 비스듬히 걸린 해를 보았다. 곧 져버릴 줄 알았던 해를 한 사람이 붙들었으니, 한바탕 달려볼 일만 남았다. 그러자면 최우선 임무는 샤를로트 연하를 안전하게 보위하는 것이다.
“연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으니, 에투알의 운을 한번 걸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