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1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18화(18/143)
18화.
공녀와 탐정 (18)
샤를로트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가끔 소곤거렸다. 공녀께서 어려서는 그렇게 활짝 웃고 다니셨는데. 다정하고 귀여운 말을 하루에 백 번씩 했는데. 꽃잎 같은 발레 튀튀를 입고 복도를 작은 단풍새처럼 뛰어다니셨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그제야 사라진 베르나르를 떠올리며 다투어 아는 체했다. ‘대공자께서 살아계실 때는 저런 분이 아니셨는데’, ‘그 사건이 공녀님을 바꿔 놨잖아’,
쉬운 결론이 존재하는 것만큼 진실을 숨기기 쉬운 방법도 없다. 그래서 샤를로트는 온갖 소문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들 알아서 상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렇듯 계승자다움도, 숙녀다움도, 혼인 상대도 없는, 도무지 고귀한 신분답지 않은 공녀는 이상하게도 몇몇 무리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중 오를란느 왕립 마법 학교 학생들의 열광은 특히 유명했다.
그들은 매해 10월, 공녀의 탄신일에 맞춰 여름꽃인 작약을 마법으로 키워 온 교정을 뒤덮곤 했다. 작약은 오를란느를 다스렸다던 옛 여왕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샤를로트 공녀를 좋아하는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공녀는 에투알을 그만둔 뒤 그 학교에 잠깐 입학했다가, 사흘 만에 자퇴한 인연밖에 없었다.
“왜긴 왜겠어. 공녀 연하께서 빼어나게 매력적이시니까 그렇지.”
슈니발트 여백작, 그러나 이곳에서는 간단히 콜레트라고 불리는 여자가 작약꽃 이야기를 들으며 킥킥 웃어댔다. 올해는 한층 규모가 커져서 교정과 강의실은 물론이고 건물 지붕과 담벼락까지 꽃으로 뒤덮은 데다, 분수대에 흙을 채워 꽃을 피우는 등 미친 행태가 극에 달했다는 소식이었다.
“끝내주는 장관을 못 봐서 아쉽네. 지금쯤은 치웠겠지? 걔네들이 또 사흘 지나면 싹 치우잖아.”
흑녹색 로브 차림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직접 못 보셨으면 말을 마시죠? 꽃 쓰레기가 손수레로 서른 대분이 나왔어요. 청소부도 수십 명은 불렀을걸요. ‘작약 농부’인가 뭔가 하는 그 또라이 학생 말이에요. 걔가 지금 2학년인데 확 조기 졸업 시켜버리자는 교수가 한둘이 아니 에요.”
“그런 걸 일자리 창출이라고 하는 거야, 마리 루이. 그리고 작약 농부 걔가 입학하기도 전부터 있던 놀음인데 걔 손에서 커진 것뿐이잖아. 이제 와서 걔가 나간다고 끝나겠어?”
“그래서 이게 잘된 일로 보이세요? 제가 보기엔 괜히 이상한 주목만 끄는 것 같은데.”
“어쩌겠어? 연하께서 검술복만 걸쳐도 이 난리니 드레스라도 차려입으셨다간 전 오를리가 꽃 쓰레기로 뒤덮일 판이라는 걸 멍청이들한테 납득시키라고. 알았어?”
콜레트와 마리 루이가 대화하고 있는 곳은 공녀께서 며칠씩 틀어박히는 곳으로 알려진 별궁 지하였다. 그곳은 검술 연습실로 알려진 그대로 무도회장처럼 넓을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홀 한쪽의 맨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여백작 니콜레트 폰 슈니발트는 보랏빛 드레스를 무릎까지 걷고 흰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 마법사 마리 루이 틸랑드는 로브를 치마처럼 펼쳐서 땅콩 한 주먹을 얹어놓고 손끝으로 하나씩 튕겨 올려 받아먹는 중이었다. 그들 곁에는 거의 빈 포도주병도 하나 있었다.
콜레트가 포도주잔을 홀짝이다 말고 하품을 했다.
“아, 포도주도 바닥나고 인내심도 바닥난다. 연하께선 언제 오신담.”
그들이 앉은 홀의 바닥에는 기묘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언뜻 보면 여섯 개의 마름모로 만든 꽃, 또는 별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모두가 하나하나 달랐다.
다양한 빛깔의 돌과 반짝이는 마흔여덟 가지 안료만이 아니었다. 마름모 안에는 또 다른 삼각형, 타원, 별과 점들이 패턴을 이루고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다르게, 그러나 아름답게 짜맞춰져 있었다. 그 모두는 커다란 원 안에 들어 있었고, 그 원조차도 또 다른 모자이크 조각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콜레트는 모자이크의 중심 쪽을 줄곧 흘끔대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듯이.
“공녀님께서 당장 오실 것 같다면 술판부터 걷어치워야죠.”
“야, 연하께선 이런 건 이해하셔. 걸린다 치면 네이가 더 무섭지.”
“그건 아예 파멸 시나리오고요. 하여튼 다 드셨으면 그만 치웁니다.”
“야, 야, 안 돼. 남았어. 서른 방울 정도.”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마세요. 네이가 서른 방울을 사혈 바늘로 팔뚝에 넣어주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말려 줄 카스티유 경도 없다고요.”
그러면서 막 술병을 낚아채려던 마리 루이가 갑자기 허둥지둥 하며 손을 치웠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해? 지하실로 소풍 나왔어?”
콜레트는 얼른 발끝으로 포도주 병을 당겨 치맛자락으로 덮었다. 하지만 마리 루이의 로브 자락에서 땅콩이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콜레트는 마리 루이를 향해 윙크를 하며 동시에 혀를 찼다.
“쯧쯧, 넌 아직 멀었어.”
마리 루이는 콜레트에게 반격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모자이크 쪽을 돌아보며 쩔쩔맸다.
“그게 말이죠, 공녀님. 저희가 여기서 다섯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다 보니까…….”
샤를로트는 모자이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문을 통해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냥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작약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시폰을 수십 겹 겹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왕국의 누구든 한 해 한 번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만약 작약 농부와 친구들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심장마비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매끈하지만 힘을 품은 흑발, 빛을 빨아들이고 때로 한꺼번에 내뿜는 눈, 탄탄한 어깨와 대조적으로 가녀린 목. 공작 깃털로 그려낸 맹수처럼 우아한 공녀는 대꾸 없이 단 두 번의 손짓만으로 드레스를 벗어 연습실 구석에 내던졌다. 갑옷 안에 받쳐 입는 푸르푸앵 (pourpoint)과 짧은 바지 차림이 된 그녀는 두 사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술이 필요하면 네 살롱에 남아 있었어야지. 콜레트.”
이어 샤를로트의 손이 베일 두른 모자를 벗고 에메랄드 귀걸이를 떼어냈다. 그것들도 곧 구석에 내던져졌다. 허벅지에 매달린 두 뱀 길이의 세검도 끌러 손에 쥐었다. 콜레트와 마리 루이가 절을 올리자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콜레트와 마리 루이는 공녀 앞에서 몸가짐을 삼갔지만 바짝 굳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공녀가 돌아오자 다행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샤를로트가 빈 병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그래서 한 병뿐이야?”
“아, 네. 물론 딱 한 병……일 리가 있나요.”
공녀의 목소리에서 기분을 감지한 콜레트가 생긋 웃으며 얼른 연습실 벽장 앞으로 갔다. 뒤에 남은 마리 루이가 우물거렸다.
“저,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네?”
마리 루이는 어깨를 움츠린 채 샤를로트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떠보았다.
“네이한테…….”
“들키지 마.”
샤를로트는 벽장 앞으로 다가가 어느새 새 포도주를 꺼내 따른 콜레트에게서 잔을 받아들었다. 장갑 낀 왼손으로 두 사람이 남겨둔 잔을 가리키자 그제야 둘도 자기 잔을 가지고 왔다. 샤를로트는 한쪽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잔을 내밀고, 검은 눈썹을 올려 보였다.
“빌어먹을 네냐플을 위해.”
콜레트와 마리 루이는 마주 잔을 내밀다 말고 흠칫했다. 콜레트가 물었다.
“정말 거기까지 가셨던 거예요?”
네냐플은 대륙 남부에 있는 마법 학교였다. 정확히는 아노마라드 왕국의 남부였다. 아노마라드는 오를란느와 비할 수 없이 컸고, 여기서 남부까지 가자면 말을 타고도 한 달 넘게 걸렸다. 샤를로트는 목 근육을 풀려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비틀다가 이윽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근처까지만. 근사한 야외 연회였지. 남부는 참 따뜻하더라. 젖과 꿀이 넘치는 땅이던데.”
샤를로트가 걸친 푸르푸앵은 민소매였다. 드러난 공녀의 팔은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열한 살 이래로 한 번도 검을 놓아보지 않은 사람다웠다.
“그래서요? 만났어요? 그 탐정이라는 사람?”
콜레트가 캐묻자 샤를로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탐정이라. 그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네. 만나진 못했어. 만날 수가 없더라.”
“왜요?”
“오후 3시인데 아직 잠에서 안 깨어났다지 뭐겠어. 남의 집에 초대를 받은 주제에. 네냐플 학생들은 다들 그렇게 한가롭나?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겠고, 거기까지 찾아가느라 시간도 다 썼고 해서 그냥 돌아왔어.”
“네?”
마리 루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탐정이란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자다가 꿈에서 예지를 받고 일합니까?”
콜레트가 말을 받았다.
“그럴 리가 있겠어? 어디서 밤샘 조사라도 하고 왔나 보지. 탐정이란 직업은 주도면밀하면서 부지런 해야 해. 사건을 하나라도 망쳐버리면 명성이 땅에 떨어져서 먹고 살기가 힘들단 말이야.”
이어 공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탐정이란 종종 사기꾼과 같은 뜻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대공자님이 가장 주의 깊게 숨겼던 오토마톤을 찾아냈어요.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아니겠죠.”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네냐플에 직접 가봐야겠어.”
연습실 바닥의 모자이크에는 몇 군데의 장소로 단숨에 보내주는 힘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길어야 몇 시간 정도였다. 그 이상 머무르자면 직접 여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리 루이가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어떻게요? 네냐플은 ‘안고니나의 커튼’으로 보호되고 있어서 신분을 숨기고는 못 들어갑니다.”
“괜찮아. 내가 아니고 ‘이스핀’이 갈 거니까.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들어갈 거야.”
‘이스핀’은 샤를로트가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가짜 신분이었다. 가짜라고는 하지만 공들여 유지해온 결과 아노마라드 북부 린베르크에 사는 양봉업자 ‘티베리 샤를’의 아들 ‘이스핀 샤를’을 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콜레트는 생각에 빠진 기색으로 눈을 깜빡깜빡했다.
“말씀하신 허가 말인데, 제가 듣기론 그게 보통 일은 아니라더라고요.”
콜레트는 오를란느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휴양지에서 만난 아노마라드의 슈니발트 백작과 결혼했다. 그후 남편이 죽자 유언장을 근거로 여백작이 되어 다 쓰러져 가던 저택을 근사하게 고쳐놓고 살롱을 열었다. 남편의 육촌인가 칠촌이라는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 왔지만 그녀의 살롱이 성공하자 오히려 태도를 바꾸어 덕을 보고 싶어 했다. 경쟁이 심한 켈티카에서 성공한 살롱을 갖는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권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