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21)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21화(21/143)
21화.
공녀와 탐정 (21)
“신입생은 우린데?”
입학한 지 한 해가 되어가긴 해도 어쨌든 새 신입생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맞았다. 소년이 아참, 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그렇네요. 내년 신입생이라고 해야겠네요.”
“내년 입학시험은 치러지지도 않았는데?”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아요. 저도 그 시험을 봐야겠죠. 그나저나 아까 그 선배 이름이 막시민 리프크네가 맞나요?”
“맞긴 한데 왜? 아직 입학도 안 한 주제에 벌써 돈 빌려줬냐?”
소년이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 선배님들, 내년에 학교에서 뵈어요.”
소년은 한 손을 가볍게 들어보이고는 돌아서서 십자로를 총총 건너갔다. 숀은 어처구니가 없어 벨라를 봤다.
“너 들었냐? 쟤는 우리 학교가 입학시험으로 스무고개라도 하는 줄 아나본데?”
벨라는 멀어져 가는 소년을 건너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떠니. 어린 맘에 자기가 좀 똑똑하다 싶은가 보지.”
“똑똑한 꼬맹이면 ‘오우, 잠재력이 있으시네요’ 하고 입학시켜 주는 데가 네냐플이냐? 어휴, 하필이면 11월 시험 본 날에 별게 다 와서 웃겨.”
“뭐 모르지. 의외로 엄청난 집안 아들내미일지 알아?”
“무슨 소리야? 우리 학교는 돈 바르고 들어오는 특례 같은 거 없잖아! 시험 세 번씩 보고도 입학에 실패한 고귀하신 가문의 아들 딸들은 다 뭔데?”
“하지만 아노마라드 최고 공작가의 후계자께서도 공부하고 계시잖니?”
“그분도 시험 봤거든? 그리고 그분은 진짜로 똑똑하시거든?”
벨라가 킥킥 웃었다.
“그래, 학교에 왜 다니는지 모를 정도긴 해. 우리 학교에 그런 수상한 사람들이 몇 명 있어. 그런데 다 잘생겼다는 게 특징이야. 그런 기준이라면 쟤도 합격해야겠다. 엄청 귀엽잖아?”
그때 둘이 이야기하는 틈에 린디즈 절임 가게에 갔던 패트리샤가 돌아왔다. 그러더니 손에게 절임 네 병을 내밀었다.
“야, 이거 받아. 막시민 선배 이름을 대니까 진짜로 주더라?”
숀은 어리둥절하게 병을 받아들었다. 벨라가 휘파람을 불며 소년이 사라진 쪽을 곁눈질했다.
“휘유, 난 쟤가 내년에 진짜로 입학한다는 데 걸어야지.”
숀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난 다신 볼 일 없다는 데 올리브 절임 한 병 건다. 넌 뭘 걸 건데?”
“음, 자아를 찾아 떠난 내 우산?”
십자로 끝까지 걸어간 막시민은 ‘오렌지나무’라는 이름의 주점 앞에 멈춰 섰다. 문짝에는 사슴뿔처럼 생긴 나무에 시커먼 석탄이 주렁주렁 열린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서 옵쇼!”
막시민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주인 ‘오렌지 벅’이 혼자 카드점을 치고 있다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이어 고개를 들고 네냐플 최고의 단골인 막시민 리프크네를 발견한 것까지는 놀라지 않았지만, 그가 덮어쓴 모자를 보자마자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댔다.
“어이, 저 모자 꼴 봐라. 올봄에 비 맞고 손질도 안 하고 처박아놨다가 오늘 갑자기 필요해져서 꺼내 썼겠다? 누구 눈에 띄면 안 될 짓이라도 했냐?”
막시민은 모자를 벗어 뒤쪽의 곰팡이 자국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이어 모자를 바위에 던져놓으며 대꾸했다.
“아저씨는 추리에 소질 없다고 말했잖아.”
“그럼 이 멀쩡한 날씨에 굳이 썩은 모자를 덮어쓰고 온 데 다른 고귀한 이유라도 있겠냐? 이 퇴학 지망생아.”
“고귀한 이유가 있고말고. 아저씨가 치고 있는 적중률 삼 퍼센트짜리 연애점보다는 훨씬 중대하지.”
“이거 연애점 아니다? 연애는 상대가 있어야 연애인 거다?”
“아, 그래. 그럼 연애 성사 기원 대부흥회라고 부르든가.”
오렌지 벅은 키들키들 웃었다.
“그거 좋네. 그나저나 시험은 보고 왔냐?”
“아아, 그럼.”
“건실한 학생의 자세네. 그나저나 너한테 편지 왔다? 이상하게 요샌 배달원들이 네 편지는 여기다가 두고 가더라?”
언제부터인가 학교보다 술집에서 찾으면 빠른 인간이 돼버린 결과였다. 오렌지 벅은 바 안쪽의 잡동사니 틈새를 뒤져서 봉투를 찾아냈다. 거기에 걷어치우던 카드에서 뽑아낸 카드 한 장을 끼워서 막시민에게 건네줬다. 그걸 받아든 막시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데?”
“네놈의 승급을 기원하는 행운의 카드다.”
“무슨 놈의 행운이야. 행운이 시험 보나?”
“왜. 찍신이라는 것도 있잖아.”
“주관식이거든요?”
“너란 놈은 주관식으로도 헛소리를 잘하잖냐?”
“아저씨가 헛소리라고 부를 정도니 교수가 듣기엔 어떻겠슈?”
막시민은 봉투와 카드를 절반으로 접어 바지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오렌지 벅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애도하는 시늉을 했다.
“저런, 그럼 내년에는 단골 하나가 없어지겠군. 안타깝네, 안타까워.”
오렌지 벅의 뇌까림은 진심이었다. 물론 매출의 대부분이 외상인 쓸모없는 단골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그는 막시민에게 몇 번 사소하지만 까다로운 문제로 신세를 졌다. 그건 린디즈의 주인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직간접적으로 따져보자면 마을 사람의 절반 쯤은 될 듯했다. 슬슬 주변 장원들로 소문이 퍼져 초청하는 사람도 생기는 중이었다.
그렇듯 막시민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게 술집의 매상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자, 오렌지 벅은 이 일에 약간의 사업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위대한 네냐플을 특례 입학한 전액 장학생의 상담소’
막시민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들고 있던 술잔을 부술 뻔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없었다. 입학시험 날짜를 놓치는 바람에 학장과 독대해서 특례 입학했고, 후원자가 수업료를 내주고 있으니 장학금이라고 부르면 안 될 건 뭔가?
옆에서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룸메이트 덕택에 그 이름은 채택을 면했지만, 이름은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붙이기 마련이었다. 그후로 막시민은 ‘술집 구석 탐정’이라는 적절한 별명을 갖게 되었다.
마을 사람일 때는 공짜 술이나 절임 몇 병보다 더한 사례를 요구하지 않는 점까지 포함해서, 막시민은 그들에게 꽤 고마운 일을 해 주었다. 다만, 막시민 자신에게만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단순한 놀이였을 뿐이다. 가끔씩은 운동 삼아 머리를 돌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소파를 면밀히 살펴봐도 꺼진 곳이 없을 때 말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입장은 달랐다. 당장 가게 매상이 관련된 오렌지 벅은 특히나 그랬다.
“혹시 4등급 받아서 한 해쯤 더 다닐 계획은 없냐? 어차피 네 학비는 어딘가의 호구가 말편자 붙이고 남는 금화로 대신 내준다며?”
“거참, 이미 시험을 봤는데 어떻게 4등급을 받나요.”
“하이고 넌 참, 너란 놈의 가치를 몰라요. 내가 여기서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왔지만 네냐플 다니는 애들 중에 너처럼 쓸모 있는 놈은 처음이거든? 마법 실험 한답시고 남의 창고 지붕이나 날려먹고, 뭔지 모를 애완동물을 잃어버렸다고 울고 짜고 다니고, 그런 놈들이 널렸는데 넌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고. 한 마디로 네냐플에 역대 한 번도 없었던 타입의 학생이야. 틀림없어. 교수들도 알 거야.”
“네, 그렇게 차원이 달라서 이만 조기 졸업합니다. 사탕발림 그만하고 뭐 할말 있는 거 같으니 빨리 말씀하슈.”
벅은 입꼬리를 쭉 내리며 막시민의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말했다.
“그래, 넌 참 눈치도 빨라요. 로렐딘 교수님이 내가 지난번에 구해드린 최상급 모베니크 찻잎의 양이 너무 적다고 화가 잔뜩 나셨거든? 내가 차를 빼돌렸다고 생각하시는데 난 배달받은 그대로 봉랍도 안 뜯고 갖다드렸다고! 오해를 풀 방법을 좀 찾아줘.”
막시민은 심드렁하게 카드를 손 끝으로 돌리고 있더니 불쑥 물었다.
“그거 주황색 꽃 봉인이 찍힌 통인가?”
“응. 맞아 맞아. 너 그거 봤냐?”
“애런이 건드렸네.”
단정적인 말투에 오렌지 벅이 턱을 쑥 내밀었다.
“애런? 걔가 거기서 왜 나와?”
“애런이 새 망아지 샀더라. 모르긴 해도 일 년은 긁어모았겠네.”
“뭐, 일 년?”
오렌지 벅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됐다. 애런은 아랫마을 목재소집 아들이었다. 그 집은 목재소다 보니 앞마당이 넓어서 외지에서 오는 짐마차들이 곧잘 그곳에 짐을 부려놓았다. 거기부터 네냐플로 올라가는 길이 좁아지기 때문에 짐마차에 싣고 온 짐을 나귀에 옮겨 싣거나 등짐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짐마차들이 그 집을 들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비웃어 넘길지 몰라도 상대는 막시민이었다. 막 넘겨짚는 것 같아도 이런 종류의 추리가 빗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렌지 벅은 머리를 긁어대며 생각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물었다.
“야, 설명 좀더 해봐. 난 머리가 나빠서 도저히 모르겠다. 근거가 있어야 나도 교수님한테 뭔 말을 할 거 아냐.”
“애런한테 왜 소매에 봉랍을 자꾸 묻히고 다니는지나 물어봐. 엊그제도 묻어 있더구먼.”
“그게…… 그랬나?”
“목재 보관소 어딘가에 걔의 보물 창고가 있겠지. 돈 되는 것만 건드리는 교활한 놈이야. 지난달에 내 친구가 주문한 주니퍼 베리 봉지에서도 나무 가루가 떨어지더구먼. 그때 경고 보낸 걸로 손 털었을 줄 알았더니.”
“그, 그래? 네 친구분은 어떻게 했는데?”
“한 번만 더 걸리면 반년짜리 소화불량으로 보답해준다고 했어. 걔 보기보다 무섭다. 특히 마법 시약 재료에 장난칠 때는.”
“어, 쥬스피앙 양 말이지? 맞아. 저번에 주정뱅이 파올라가 닭들을 가둬놓고 굶기던 거 기억나냐? 근데 어느 날 누군가가 울타리를 뜯어버리고 쇠로 된 문짝을 수첩 모양으로 이쁘게 착착 접어놨잖아. 그거 네 친구분 작품 맞지?”
“공식적으로는 아니거든?”
오렌지 벅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도둑놈을 어떻게 혼내줄지 열심히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막시민은 기지개를 켜더니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럼 슬슬 밀린 빚 좀 갚아보시면 어때?”
“옙, 뭘로 갚아드릴깝쇼? 위스키? 아니면 오랜만에 시원한 파스티스로 한 잔 드려?”
“그런 거 말고. 엊그제 반들반들 이쁜 거 들여왔다고 들었는데 솔직 담백한 브리핑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