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2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24화(24/143)
24화.
공녀와 탐정 (24)
하지만 그런 깨달음과 관계없이 막시민의 유능한 혓바닥이 작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 마주쳐서 이름도 모르는 놈이 내 업무 적합성과 기대 수익 및 폐업 가능성까지 걱정해주니 감동의 눈물이 솟구쳐 오르네? 네가 인류 최후의 의뢰인일지라도 내가 지금 자빠져 자고 싶으면 그만이라는 게 그렇게 이해가 어렵냐?”
이스핀도 약간 움찔했다. 새로운 판단도 완벽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둘은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비슷했다. 입을 놀리는 걸로 밀려본 적은 없다는 것.
“왜 그렇게 날 피하려 애쓰는데? 마시던 술을 마저 못 마셔서 원한이 맺혔니?”
“그래, 알코올이 부족하면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체질이다. 그런 놈한테 무슨 중대한 의뢰 같은 걸 하냐? 포기하고 딴 데 가서 알아봐. 알았냐?”
막시민은 몸을 돌려 휘적휘적 비탈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에 남은 이스핀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렸다가, 허공을 노려봤다가, 소리쳤다.
“야! 넌 어쩌면 그렇게 네 직업에 최소한의 성의도 없니? 그따위로 할 바에는 아예 문을 닫지 그래?”
멀찍이서 대답이 들려왔다.
“응, 인기가 극도로 없다 보니 미결 사건도 미정산 수고료도 없어서 오늘 저녁 7시에 폐업해도 아무런 타격이 없고말고.”
막시민은 정말로 가버렸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네냐플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로 돌아갔거나, 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한산해진 십자로에 혼자 우뚝 선 이스핀은 멀어져가는 막시민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다가 뇌까렸다.
“하, 이 흥미진진하게 빌어먹을 알코올 중독자 같은 놈이? 너 탐정이 맞긴 하니? 내가 너한테 무슨 천재적인 추리라도 기대하고 찾아온 줄 알아?”
가고 있는 막시민도 물론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한가로운 부업 탐정으로서 목적은 술값 약간을 버는 것밖에 없었다. 위대한 사명감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거나 복잡한 문제를 근사하게 해결해 자기만족을 느껴보겠다는 종류의 직업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내킬 때만 손님을 만나겠다는데 뭐가 잘못이야? 특히 술 마시는데 귀찮게 구는 놈은 상대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그 원칙은 오늘 오후에 막 생겼지만, 사무실에 고객 면담 헌장을 걸어놓은 입장도 아니고 하니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스핀이 하려던 의뢰란 아까 램프에서 나온 ‘불타는 원숭이’와 관계가 있을 게 뻔했다. 그런 문제는 마법사들한테 물어봐야지, 왜 막시민 같은 녀석을 찾아온단 말인가? 틀림없이 마법 학교 전액 장학생이 어쩌고 하는 이름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빨리 포기시켜 주는 것 말고 해줄 일이 뭐겠느냐고.
이스핀의 의뢰를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한 데는 이렇듯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기는 귀찮았다. 하여튼 막시민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결론은 같으니 상관없었다.
막시민이 멀어져가는 동안 이스핀은 혼자 선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 예측에 완전히 실패했음은 그녀도 인정했다. 하지만 예측 범위에도 정도란 게 있는 거 아니야? 명문 마법 학교 네냐플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재학중이고 부업으로 탐정 노릇을 해서 꽤 명성이 있다는 학생이라는 정보값에서 저따위 모습을 유추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거 아니야?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한담.
좋게 구슬러야 할 것인가, 실력 행사를 할 것인가, 우회적 압력을 넣을 것인가, 다시 우호를 다져볼 것인가. 이렇듯 여러 선택지를 놓고 냉철하게 저울질하려 했지만 솔직히 가장 많이 한 생각은 학교 정문 앞을 네모지게 파서 저 녀석을 묻어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묘비에는 ‘내년 이맘때 일어남’이라고 써주고.
하지만 그러면 찾던 물건의 행방도 오리무중이 되는 거고.
결국 이스핀은 입술을 짓씹으며 막시민이 간 쪽으로 뛰어가 그를 따라잡았다. 학교로 올라가는 길은 외줄기라 찾아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야, 야, 막시민 선배! 그래, 다 알았어. 내가 귀찮다 이거지? 이제 사라져줄게. 그런데 그전에 딱 하나만 대답해줘. 너, 멀베리 파이크라는 이름을 알아, 몰라? 잊어버렸어? 분명히 알 텐데?”
막시민은 대꾸 없이 계속 걸어갔다. 본래 그는 장부를 쓰지도 않았고, 용건이 끝난 이름은 곧잘 잊었다. 심지어 의뢰인이었다 할지라도. 기억해야 할 정보와 아닌 정보를 구별해야만 중요한 것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순식간에 뛰어온 이스핀이 길을 가로막고 서자 막시민은 인상을 찌푸린 채 멈춰 섰다가, 그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 웃긴 이름은 합승 마차 옆 자리에 오 분간 앉았던 사이일지라도 기억나는 거 아니야?”
드디어 대답을 끌어냈다. 이스핀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럼 멀베리가 찾던 물건도 기억하겠네?”
“그 뭐더라……. 인형이나 쓸 것처럼 생긴 조그맣고 예쁜 권총 말이냐?”
딱 하나만 대답하기로 해놓고 두 번째 질문에 대꾸한 것은 막시민의 실수였다. 이스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평온해지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맞아. 그거 네가 찾았지? 지금은 네가 갖고 있지?”
예약되지 않은 세 번째 질문이었다. 막시민은 이스핀을 무표정하게 봤다. 그러자 이스핀이 생긋 웃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귀여운 후배로 돌아가서. 막시민의 감상은 ‘되게 변화무쌍한 얼굴이네’ 정도였다.
“그건 왜 묻는데?”
“그거, 내 거거든.”
아하, 그래?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혀를 몇 번 찼다.
“안됐네. 박살났거든.”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막시민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퍽!
이스핀의 오른발이 뻗어가 막시민의 무릎 안쪽을 걷어찼다. 순간 다리가 저릿해지면서 중심을 잃은 막시민은 그대로 흙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비탈에 서 있었던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대처가 형편없었지만 이스핀의 발길질도 흔한 수준이 아니었다. 제압할 의사를 갖고 정확히 걷어찬 것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싸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칼끝이 막시민의 목 아래를 겨누고 있었다.
“…….”
막시민은 아직 상체를 세우지도 못했다. 겨우 팔꿈치만 바닥을 짚고 있었다. 이스핀은 짤막한 한손검을 쭉 뻗어 겨누고 있었다. 무기를 뽑아 들자 조금 전과는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웬만한 사람은 눈만 마주쳐도 흠칫할 정도로 살기가 감돌았다.
막시민은 눈을 내리깔며 칼끝을 보았다. 턱 바로 밑, 손가락 두 마디 거리에 있는 칼날은 거의 흔들리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검을 뽑던 속도도 상상 초월하게 빨랐다.
“선배한테 이래도 돼?”
막시민의 목소리는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덜덜 떨지는 않았다. 그는 보기보다 온갖 일을 겪어본 녀석이었다.
“아직 아니라면서?”
이스핀의 목소리도 격하지 않았다.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럼 뭘 원해?”
“농담 말고 진실.”
“박살난 걸 아니라고 하면 도로 붙나?”
“박살났을 리 없다는 걸 아니까. 어디 있지?”
막시민은 잠시 사이를 두고 대꾸했다.
“그건 못 말해줘. 왜냐면.”
“그쪽에서 비밀을 요구해서?”
막시민은 고개를 젓더니 한쪽 입꼬리만 치켜 올렸다.
“그런 건 아니고, 알고 싶나? 나를 고용해.”
이스핀의 미간이 순간 흔들렸다. 예상한 범위 밖의 반응이었던 모양이다. 이어 막시민은 눈썹을 올려 보이며 아래를 눈짓했다.
“이것도 좀 치우고. 말하다가 턱 뚫리겠네.”
처음 겨눌 때처럼 검은 순식간에 거두어졌다. 본능처럼 완벽한 자세로 검을 착 꽂아 넣은 이스핀이 말했다.
“좋아.”
의외로 손쉽게 거둬준다 싶긴 했지만, 저 정도 실력이라면 아무 때나 도로 제압하고 남을 것이다. 하지만 막시민은 허둥지둥하지 않았다. 지금껏 막시민은 무시무시하게 강한 자들을 꽤 여러 번 만나보았고, 그들과 맞설 실력이 없다 싶으면 금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 대책을 궁리했다. 졌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뭐 세계 최고라고 그런 걸로 상처를 입겠는가?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는 거고, 막시민에게 중요한 점은 상대와 말이 통하느냐 아니냐였다.
막시민은 천천히 상체를 세우더니 일어서는 대신 그냥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채로 이스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고용하시겠다? 좋지 뭐. 물론 선금 없이는 정보도 없어. 미리 말해두지만 아주 비싸게 받아먹을게. 자빠진 값까지 합쳐서.”
“네냐플 일 년 치 수업료면 될까?”
막시민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수업료 일 년 치? 그게 얼만지는 알아?”
“나도 내년에 입학한다고 얘기 안 했던가? 어때? 그만하면 충분해?”
막시민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아, 물론이지. 엄청나네. 장학금이 두 배인데 내년에 강제로 다시 학교 다녀야 되나? 하긴 어디에 쓰든 그건 내 맘이겠지? 그럼 돈은 어딨나?”
“당장은 없어.”
막시민은 그만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스핀은 웃지 않고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내일 줄게. 그럼 일도 내일 시작해야 되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말보다 검이 빨리 통하는 부류인 줄 몰라봐가지고.”
지금껏 쌓인 짜증이 순간적으로 악담이 되어 튀어나왔지만 막시민은 개의치 않고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아닌데? 이번에도 잘못 봤는데? 그냥 돈을 많이 주면 되는데?”
“아아, 그래?”
이스핀은 한층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더더욱 믿음직하네. 내가 돈이 좀 많아서 말이야. 그럼 내일 오후 3시에, 아까 그 술집 앞에서 만나자.”
이어 손끝으로 퉁긴 것이 날아왔다. 막시민이 낚아채고 보니 고블룬 금화였다. 그것도 무척 반들반들한 새것이었다. 막시민이 집게손가락에 금화를 끼운 채로 눈썹을 올려 보이자 이스핀이 말했다.
“돈 좋아하시는데 선금을 받아야 할 거 아냐.”
“아이쿠, 이런 상냥하신 배려가 있나. 과연 최고의 고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