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25)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25화(25/143)
25화.
공녀와 탐정 (25)
이스핀은 더 대꾸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막시민을 지나쳐 내려갔다. 진짜로 깔끔하게 물러난다 싶어 막시민도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이스핀의 머릿속에는 네냐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이 갑자기 종적을 감출 리 없다는 계산이 들어 있었다. 한바탕 다그쳤으니 의연한 태도도 보여줄 때가 됐고 말이다. 그런데 세 걸음쯤 멀어졌을 때 막시민이 중요한 점을 깨닫고 물었다.
“야, 근데 너 이름이 뭐랬더라?”
이스핀은 뒤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멍청이를 믿어도 되는 건가?
“이스핀 샤를.”
막시민의 머리에는 돈 나올 가능성이 없는 이름을 튕겨내는 편리한 기능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이스핀이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
멀베리 파이크의 권총은 물론 박살나지 않았다.
그 권총은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그렇게 총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의 장난감처럼 생겨가지고 보석이라도 박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작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전문가의 말로는 본래 총알이 발사되도록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내부 구동부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물인데도 그걸 손에 넣으려고 덤비는 자가 벌써 세 명째였다.
그들이 왜 이 권총을 갖고 싶어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경험상 많은 사람이 노리는 물건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 걸 그렇게 쉽사리 넘겨 줄 수야 없지. 안 그래, 예비 신입생?
네냐플까지 걸어가는 동안 막시민의 머리는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먹던 술을 빼앗겨 짜증을 부릴 땐 오 분 뒤의 일도 생각하기 싫어하는 그였지만 일단 추리를 하기로 마음 먹으면 달라졌다. 머릿속으로 가설을 세우자 반년 전의 일들이 자석 조각처럼 착착 달라붙어 왔다.
‘멀베리의 권총’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짜 신분 같지만, 어쨌든 자신을 골동품 상인이라고 소개한 멀베리 파이크가 막시민을 찾아왔다. 골동품 권총을 수리하려고 세공 기술자에게 맡겼는데 그자가 권총을 갖고 잠적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멀베리가 굳이 막시민을 찾아온 이유는 사라졌다는 세공 기술자 보일드가 네냐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막시민은 보일드를 가르쳤다던 오스틀리 교수의 도움을 받아 쉽사리 그자를 찾아냈다. 찾아냈을 때 보일드는 약간 정신이 나간 듯했는데 권총을 빼앗자 금세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가 왜 권총을 갖고 잠적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보일드가 왜 그러든, 막시민은 권총을 멀베리에게 전달해주기만 하면 일은 끝이었다.
그러나 보일드가 이상해진 이유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오스틀리 교수가 끼어들더니 권총을 인수해 갔다. 그러면서 조사 과정에 대한 양해를 받겠다며 소유주인 멀베리에게 심부름꾼을 보냈다.
그러자 멀베리는 도망쳐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시민은 그 권총이 이런 인기를 누리는 물건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멀베리라는 놈도 교수한테 붙들려 정신 고문을 당하느니 내버리고 달아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며칠 뒤, 막시민이 오스틀리 교수를 찾아가보니 교수는 권총을 막시민에게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수임료를 안 주고 달아 나버린 멀베리의 물건은 막시민의 것이 되어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그 물건은 좀더 조사가 필요해.”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게 대략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교수는 여전히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했고, 막시민도 그까짓 것에 큰 미련이 없어 그후로 잊고 있었다. 학교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르며 막시민은 조금 더 추리를 해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 말이다.
지금까지 그 권총이 지닌 가치의 근사치는 멀베리가 뺑소니를 칠 때 내버리고 간 백 엘소 상당의 짐 보따리 정도였다. 그 보따리의 가치를 백 엘소까지 추정했던 것도 그 속에 든, 받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한 어음 뭉치를 절반으로 깎아쳐준 결과다. 실제로는 십 엘소나 될까 싶은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그랬던 권총의 가치가 방금 네냐플 일 년 치 수업료로 수직 상승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알려주는 진실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 놀라운 저력을 가진 물건이라면 실제로는 그 몇 배의 가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지. 안 그래?
이렇듯 생각만으로도 신바람 나는 추리를 뒷받침할 근거를 얻으려면 문제의 권총이 뭘 하는 물건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도착한 막시민은 기숙사로 곧장 가는 대신 교정 구석에 있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 뒷편에 고대 유물 전공, 에반젤린 오스틀리 교수가 연구실을 차리고 있었다.
창고를 개조한 것처럼 생긴 연구실 앞에 다다르자 이런 문패가 달려 있었다.
‘대답이 없으면 걷어차시오.’
막시민은 코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문짝이 이 모양이지.”
문짝은 다 부서져가는 것을 쇳조각으로 붕대를 감듯 해서 간신히 살려놓은 모양새였다. 막시민은 즉각 걷어찰까 하다가 문짝이 불쌍해서 일단 손등으로 툭툭 쳤다.
“네.”
의외로 빠른 대답이 들려왔다. 문을 밀고 들어가보니 교수는 없었고, 연구 보조 학생이 혼자 실험대 앞에 앉아 있었다. 학생은 고글형 루페(loupe)를 낀 채로 뭔가 박살난 물건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는 왼손에만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팔뚝 중간까지 감싸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뒤로 약간 길러서 묶은 머리는 옅푸른 색이었다.
교수들의 연구실 보조는 연구 과정 학생들이 주로 맡곤 했다. 즉, 이 학생은 특별한 경우였다. 아직 2학년인데 이미 작년부터 하루 다섯 시간씩 오스틀리 교수의 연구실에서 상근하며 그걸로 학점까지 대체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같은 학년 학생들과 교류도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막시민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것이다.
“야, 로젠크란츠.”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고개를 들더니 루페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아, 막시민. 여긴 웬일이야?”
“너 그런 거 쓰고 내가 보이긴 하냐?”
란지에는 루페를 벗어 내려놓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 잘 보이지.”
그런 다음 눈을 감은 채 잠시 두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막시민은 루페를 집어 들고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중얼댔다.
“이런 걸 끼고 있으니 눈이 빙빙 돌고 피곤하지. 하긴 넌 항상 그래 보인다만.”
란지에의 눈은 흔치 않은 진홍빛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을 두고 아름답다며 루비가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막시민이 보기에는 그냥 토끼 같달까? 란지에가 눈가에서 손을 떼며 희미하게 웃었다.
“응. 힘든 척하면서 쉬러 갈 때 편리하지.”
“힘든 척은 무슨. 힘드니까 힘든 거지. 시험 끝났다고 학교가 미쳐 돌아가는 이런 날까지 연구실로 기어들어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냐? 너네 교수가 그러래?”
오스틀리 교수는 이런 날이면 자기가 더 앞장서서 놀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틀림없이 저 녀석이 호응을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란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하지만 이런 날일수록 난 여기가 편하니까.”
“왜 또, 인간 혐오가 도졌냐? 하여간 잠 좀 푹 자고 그놈의 시짜매 올리브를 끊으면 너도 새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러자 란지에가 막시민을 빤히 바라보며 턱을 괴더니 대꾸했다.
“네가 술을 끊으면 나도 그래보려고.”
“아오, 핑계는. 그리고 시짜매가 술보다 더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그거 내가 보기엔 위장 파쇄기거든?”
“맞는 말인데, 뇌가 파쇄되는 것보다는 나을 때가 있으니까.”
막시민이 란지에의 실험대를 손가락질 하며 눈썹을 괴상하게 찡그렸다.
“그야 저런 걸 매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렇지. 곁눈으로만 봐도 뇌가 파쇄될 것 같이 생겼네.”
실험대 위에는 수차 같은 데서 뜯어낸 것처럼 생긴 기계 부속이 대략 스무 조각으로 박살난 채 놓여 있었다. 고대 유물이란 것도 요샌 저런 분위기인가? 란지에는 ‘저게 뭐 어때서?’라고 하듯 눈썹을 올려 보였고, 막시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용건으로 들어갔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저번에 맡긴 멀베리라는 놈의 권총 말이야. 기억나냐? 그거 어떻게 됐어? 조사 끝났어?”
“아, 그 권총.”
란지에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의 등뒤에는 다섯 단짜리 책장 수십 개가 통로를 이뤄서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미로가 펼쳐져 있었다. 각 선반에는 갖다 버리고 싶게 생긴 잡동사니가 든 바구니나 상자, 책 따위가 줄지어 얹혀 있었다.
란지에는 그런 미로로 걸어 들어가 두리번대지도 않고 한 지점에 멈춰 서더니 청록색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상자를 여는 대신 뒷면을 보고 그 뒤에 붙은 포켓에서 메모를 꺼내 읽었다. 그러더니 도로 넣어 두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뭐야? 왜 그냥 오는데?”
“아직 안 끝났다고 적혀 있어서.”
막시민은 물론 그 선반의 위치를 잘 눈여겨봐두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따질 것은 따져봐야 했다.
“야, 그걸 맡긴 지가 언젠데 아직도 조사중이라는 거야? 뭐 어마어마한 문제라도 있어?”
“어마어마한지는 나도 모르지만.”
란지에는 도로 제자리에 앉아 루페를 만지작거리며 잠깐 생각했다. 교수가 그에게 일러둔 점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안에 뭔가가 들어 있는데 꺼낼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어.”
“그냥 나사 풀고 뜯으면 될 거 아냐?”
“안 돼. 위험한 물질이라서. 그 권총 되찾았을 때 세공 기술자가 조금 이상했잖아? 그게 그 물질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어서.”
막시민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뭐,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도 없었다. 막시민이 해결 못 할 문제라는 점은 같았으니까.
“그래서 요컨대 내가 그걸 당장 돌려받을 수는 없다는 거냐?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냐? 너도 생각해 봐라. 남의 물건을 빌려서 이렇게까지 오래 차지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
“그렇긴 하지만 위험 물질일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 너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막시민은 그 장난감 권총을 네냐플 일 년 치 수업료와 맞바꿀 기회를 얻었다. 일단 돈만 받고 나면 그다음에 그 시건방진 예비 신입생 녀석이 어떻게 되든 알 게 뭐람? 세공 기술자 보일드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한 일이라고는 기껏 그 권총을 훔친 것뿐인데, 이스핀은 그게 원래 자기 거라잖아? 자기가 자기 걸 훔쳐서 문제가 될 리도 없겠지. 안 그래?
……라고 멋대로 생각하려 했지만 결국 막시민도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켕겼다. 네냐플 교수가 위험하다고 반출을 꺼리는 물건을 꺼내서 아무한테나 팔아먹어버린 뒤에 돈 벌었다고 두 발 뻗고 잘 정도로 무딘 인간은 아닌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게 이스핀의 것이라는 주장을 믿을 근거도 없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