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27)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27화(27/143)
27화.
공녀와 탐정 (27)
말을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막시민은 재빨리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이십만 엘소 정도면 넘긴다. 어때?”
란지에가 두 손을 펴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 정도라면 오늘밤에 내가 그걸 갖고 도망쳐야겠는데.”
이 녀석이 이런 소리도 할 줄 알았던가? 막시민은 손을 휘휘 내젓고 연구실을 나가며 말했다.
“좋아, 좋아. 내가 힌트 줬으니까 도망가서 십만 엘소는 이쁘게 포장해서 나한테 부쳐라? 알았지? 초코시럽 뿌린 권총은 그냥 네가 가지고. 오늘 밤에 꼭 결행이다?”
이스핀은 헤이마치 마을의 십자로를 다시 걷고 있었다. 마을에 두 군데뿐인 여관 중 하나에서 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그냥 여관에 머물러 있어도 될 시각이었지만 어쩐지 마을을 구경해둬야 할 것 같았다. 일이 잘 풀리면 입학할 필요도 없이 내일 당장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헤이마치의 삼십여 호나 될까 싶은 집들은 절반 가까이가 학생들 대상의 상점이었다. 즉, 네냐플 학생들의 취향을 무척 반영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이스핀이 궁금해하는 것도 네냐플 학생들이었다.
국적도 신분도 다른 수백 명이 이런 산속에 있는 마법 학교로 굳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까다로운 시험을 치르고 입학한다고 들었다. 그 후로 몇 년이나 기숙사에서 머물며 친해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다가 졸업하고 나면 뿔뿔이 흩어진다. 다시 만날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네냐플에 머무는 동안만은 큰 차별 없이 섞여서 공부한다.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시험을 걱정하고, 같은 간식을 사먹으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곳도 전 대륙에서 오직 네냐플뿐일 것이다. 마법이라는 특별한 학문의 권위, 그리고 네냐플의 수백 년 넘은 전통만이 신분 차이를 잠시 접어놓고 동급생으로 지낸다는 선택을 받아들이게 해 주었다. 현재 네냐플에는 아노마라드의 2대 공작 중 하나라는 아르님 가문의 젊은 소공작도 있는 반면, 가문이라 부를 것조차 없는 가난한 평민들도 꽤 많다고 했다. 그들이 함께 앉은 강의실의 분위기는 대체 어떨까?
이스핀은 어려서는 에투알로, 그후에는 대공국의 공녀로, 늘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왔고 그런 삶에 의심을 품지도 않았다. 그렇게 타고났으니 그래야만 한다고, 그걸 피하려 드는 건 비겁한 도피라고만 생각했다. 또한 사람마다 상황은 다를지언정 그 정도의 짐은 누구나 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꽤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이 타고난 책임에서 벗어나 학문에만 몰두하며 몇 년을 보내는 곳이 있다지 않은가. 마치 희한한 별세계처럼.
진짜로 입학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럴 만큼 여유로운 자신이 아니었지만, 오를란느의 일을 잠시 잊어버리고 그들과 섞여 지내는 것을 상상해보니 조금 초조하면서 흥미진진한 기분이 솟아났다. 이곳의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까? 시험공부를 미처 못 끝내서 어쩌나, 내일 점심 메뉴는 뭘까, 이런 것만 생각하며 정말로 하루를 보내도 되는 거야?
생각만 했는데도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아 이스핀은 얼른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냈다. 어쩌면 다 오해일지도 모른다. 그들이라고 설마 날마다 이러겠어? 차라리 만나서 물어보는 편이 낫지. 물론 아까 그 녀석은 말고, 좀 더 멀쩡한 애로.
하지만 아무나 붙잡고 다짜고짜 ‘네냐플 생활은 어때요?’하고 물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질문은 미루고 한번 네냐플 학생이 된 기분으로 마을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스핀은 목표 없는 일탈에 끌리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보기보다 상상력은 풍부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쯤은 일탈이라고 부를 정도도 못 되잖아?
그러나 학생들이 돌아갈 시각이 지나자 상점들은 거의 닫혀버렸고 거리는 한산하다 못 해 텅 비었으므로 상상력만으로는 채우기 힘든 간극이 발생했다. 이스핀은 혼자 턱을 쳐든 채 사거리를 두 번씩 오간 다음 결국 약간 토라진 듯한 얼굴로 포기했다. 이런 산골 마을에 널찍한 십자로씩이나 있는 것도 네냐플로 오가는 물류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꽤 짭짤한 돈벌이가 발생하는 곳일 것이다, 하는 시시한 분석이나 하면서.
한 바퀴 돌다 보니 어느새 오렌지 나무 술집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술집 문은 닫혀 있었다. 오렌지 벅이 정신적 충격을 다스리기 위해 일찍 퇴근한 모양이었다. 술집을 한 바퀴 돌아 뒤뜰에 이르렀을 때 이스핀은 문득 멈춰 섰다. 뜰 안쪽에 솟은, 너무 커서 미처 뽑아내지 못한 바위를 바라보면서.
“거기 있었네.”
마치 잘 아는 친구라도 마주친 투였다. 바위는 까딱도 하지 않았지만 이스핀은 한참 동안 바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자 바위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땅 밑으로 사라져버렸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것처럼. 그러는 동안 발밑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내일 오렌지 벅이 뒤뜰에 와본다면 무척 놀랄 테지만 이스핀도 굳이 그 아저씨를 놀라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프시키가 때로는 다가오고 때로는 도망치는 이유를 아직도 완전히 알지 못했다. 여전히 한마디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핀에게 확실한 건 프시키를 찾아내고 없애버리는 힘, 그것뿐이었다.
이스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윽고 발밑의 진동도 사라지자 진정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 풀었다 하더니 비스듬하게 메고 있던 가방에 손을 넣어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린디즈 병절임이었다.
낮에 사거리를 서성거리며 막시민 리프크네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학교에서 내려온 네냐플 학생들 중 열에 여덟은 이 절임을 사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점점 궁금해졌다. 네냐플에서 제일 인기 있는 간식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분명 특별한 맛이겠지?
그래서 린디즈에 슬쩍 들어가봤지만 처음인 데다 종류도 워낙 많아 뭘 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제일 잘 팔리는 걸로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거야말로 외지인에게 최악의 선택이었지만 가게 주인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주문을 저렇게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신입생이고, 신입생에게 처음 린디즈 절임을 줄 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도 먹었겠다, 네냐플 학생 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할 겸 한번 도전해볼 마음이 내켰다. 대체 무슨 맛인데 그렇게 인기가 있을까?
병을 열고 절임 하나를 꺼내 입에 넣은 이스핀은 갑자기 미간에 힘을 주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걸 도로 뱉을지 말지 고민하면서. 하지만 먹던 음식을 뱉는다는 생각이 공녀님의 예절 관념과 심각하게 충돌했다. 물론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한참 뒤, 어떻게든 겨우 씹어 삼킨 이스핀은 병뚜껑을 탁, 닫고 눈물을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이따위 학교에는 입학하지 않는 걸로.”
4. 11월 밤의 좀비떼
오스틀리 교수의 연구실에서 나오자마자 문 닫기 직전의 식당으로 달려간 막시민은 퇴근하려는 직원들을 배려하여 칠 분만에 저녁을 해치우면서 내일 이스핀 녀석에게 해줄 말을 정리했다. ‘나도 돈 되게 좋아하는데 말이다, 네냐플 교수가 세계가 멸망할까 봐 못 주겠다고 하거든? 정 원한다면 면담까지는 내가 주선해 준다.’
그 정도면 막시민이 손 떼기에 딱 적절한 수준의 중재가 될 것이다. 물론 돈은 아쉽지만, 그런 위험천만한 걸 훔쳐다가 아무한테다 줬다가 어디서 폭발이라도 일어났다고 하면 뒷일을 어떻게 감당해?
식사를 마치는 것과 동시에 그렇듯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 막시민은 약간 남은 아쉬움을 코를 한 번 찡그리는 것으로 눌러버리고 기숙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지 주머니에 든 뭔가가 그제야 거슬렸던 것이다. 이게 뭐더라?
손을 넣어보니 봉투가 잡혔다. 그러고 보니 오렌지 벅이 준 편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걸 떠올리기에는 너무 스펙터클한 오후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제라도 꺼내 보니 편지는 아까는 어떻게 접었던가 싶을 정도로 두툼했다.
누가 막시민에게 이렇게 구구절절한 편지를 써 보냈을지 이런저런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모조리 합쳐도 미처 반 명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으므로 막시민은 몇 걸음 더 가서 기숙사 근처의 가로등에 봉투를 비추어 보았다. 겉봉에 적힌 ‘막시민 리프크네 친전’이라는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있자니 느낌이 약간 이상했다. 이 묘하게 예스러운 느낌과 글씨가…… 어쩐지 익숙하다.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뒤집어서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E. 쥬스피앙.
갑자기 막시민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쥬스피앙?
쥬스피앙이 편지를 보냈다고?
막시민의 친구인 티치엘 쥬스피앙은 줄이자면 T. 쥬스피앙일 테니까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아니었다.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맞은편 기숙사에 살면서 굳이 편지를 써 보낼 이유도 없고 말이다. 막시민은 봉투에 적힌 이름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나직이 뇌까렸다.
“티치엘한테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의 이름은 앨베리크 쥬스피앙. 다름 아닌 막시민의 자비로운 후원자였다. 어마어마한 학비를 내주지만 감사 편지를 보낼 필요도 없고, 평균 학점 B를 받을 필요도 없고,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일조차 없는 바람직한 후원자 말이다.
인생의 밝은 면을 보는 습관이 없는 막시민도 이것만은 꽤 고맙다고 생각해왔다. 이 년간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는 측면에서만. 어두운 면을 포착해보자면 쥬스피앙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막시민을 마법사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멋대로 학장에게 추천서를 써서 면접만으로 입학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해왔다.
물론 막시민은 어떻게 아무 대가도 없이 그런 호의를 받겠느냐며 점잖게 거절했다. 그러나 쥬스피앙은 점잖은 거절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뭐?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이 시건방진 놈이? 좋다. 공짜다! 학비를 전액 대주겠다! 용돈도 주겠다! 옷도 책도 사주겠다! 설마 이래도 거절하진 못하겠지?”
물론 진짜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쥬스피앙에게는 막시민을 마법사로 만들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쪽의 기준에 따른 절박함이지만.
그러나 막시민에게는 없었다. 마법이라니! 내가 왜 그런 골치 아프고 관심 없는 일에 머리를 써야 하는데?
하지만 학교에서는 기숙사를 제공하고, 식사도 준다. 그래서 무일푼 인생인 막시민은 이 제안의 좋은 면을 보기로 했다. 그렇다. 공짜로 먹고 자는 거다. 공부도 하고 시험도 보고 그래야 된다고? 그야 학생들 입장에서 그런 거지 내가 알 게 뭐람.
그러므로 본인의 관점에 따르자면 ‘네냐플 학생’조차도 아닌 막시민은 쓸데없이 광활한 네냐플 여관에서 한가롭게 먹고 살고 산책도 하다가 일 년 뒤, 쫓겨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수로 그는 1학년 말 시험에 4등급짜리 답안지를 내고 말았다. 화끈하게 5등급이 나올 개소리를 써 갈겼어야 했는데 그만 전날 친구란 놈이 술병을 다 감춰서…….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했다. 이번엔 틀림없이 5등급이 나온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미심쩍어졌다. 혹시 쥬스피앙이 이걸 알았나? 하지만 지금까지는 성적표를 보내라거나 한 적도 없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