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2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28화(28/143)
28화.
공녀와 탐정 (28)
막시민은 기숙사 입구에 선 채로 심사숙고했다. 지나가는 학생들 몇이 그를 흘끔대며 말을 걸었지만 막시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숙고한 끝에 이 편지를 기숙사로 돌아가 룸메이트들과 함께 다정하게 뜯어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기숙사 뒤로 돌아가 아무도 어슬렁대지 않는 풀숲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계속 올라가면 뒷산 중턱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네냐플의 보호 마법장이 막고 있어서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다. 신입 생일 때 몇 번 몸을 부딪혀 자빠지며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그후로 가지 않게 되는 곳이었다.
그간 할 일 없는 여관 투숙객답게 학교를 구석구석 이용해온 막시민은 마법장의 위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딱 그 앞에 멈춰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뜯었다. 방범 용도의 희미한 빛이 뿌려져 있어서 편지를 읽기에 무리는 없었다. 봉투에서는 두 번 접은 편지 한 장이 나왔다. 그게 다였다. 봉투가 두툼했던 이유는 왜인지 모르겠네?
이어 편지를 펼친 막시민은 문득 인상을 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빈 종이였다.
“뭐야, 이건?”
막시민은 편지와 봉투를 양손에 나눠 쥐고 펄럭펄럭 흔들었다. 뭔가 끼어 있으면 떨어지라는 것처럼. 그러자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이놈아! 그만하지 못해!’
막시민은 흠칫 놀라 종이를 내던져버렸다. 편지는 뒤집어진 채로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목소리가 멈추지는 않았다.
‘너 그거 주워! 당장! 즉시! 지금! 빨리!’
막시민은 줍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 밑에 지네라도 숨은 것처럼 뜨악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매우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조짐이었다.
‘뭘 해!’
막시민은 편지를 노려보다가 옆걸음으로 슬금슬금 접근해갔다. 편지에서 뭔가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멋대로 편지의 배후라고 생각되는 위치로 간 다음 집게손가락으로 슬그머니 낚아채어 바로 옆의 바위에 얹어 놓았다.
‘휴……. 머리가 어지럽네. 다시는 던지지 마라. 알았어?’
막시민은 기분 나쁜 편지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다음 말했다.
“아, 뭐 까짓거 그럽시다. 근데 무슨 볼일이쇼? 바쁘신 양반께서?”
‘이놈 말투 봐라. 돈 들여 비싼 학교에 보내놨는데 어째서 동네 건달이 돼버렸냐?’
“그건 아까까지 동네 술집에 있다가 나와서 그렇고요, 그나저나 왜 이런 소름끼치는 걸 보낸 건데요?”
‘소름은 왜 끼쳐? 너 설마 이게 무섭냐?’
편지는 여전히 하얗고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고 있자 희미하게 글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막시민은 딱밤이라도 먹이는 기분으로 편지를 툭 건드린 뒤 말했다.
“말이란 사람 입에서 나와야지, 이런 불쾌한 걸 만들어놓고 좋아하는 건 마법사들밖에 없거든요?”
‘그래? 네가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줄은 또 몰랐군. 그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 기숙사 오픈 때 네 녀석의 보호자 자격으로 방문하는 건데. 그럼 내년에는 반드시 시간을 쪼개서…….’
그런 상상하기조차 싫은 악몽을 떠올린 막시민의 대답은 엄청나게 빨랐다.
“절대로 아니거든요!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편지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닥쳐라, 이 사기꾼의 제자 놈아. 우리가 안 만나긴 왜 안 만나? 아주 만날 일이 많고도 많아요. 너 오늘 시험 봤지? 잘 봤어?’
막시민은 이마를 짚으며 잠시 대답을 유보했다. 현명하게 되도록 구석진 곳으로 오긴 했지만 이런 짜증 나는 대화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들을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편지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앉기도 그렇고…….
“아, 왜 그런 건 물어요? 지금까지는 관심 없더니.”
‘내가 적절한 관심을 안 줘서 그간 그렇게 개판을 쳐놨냐?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좀 줘볼까? 이 4등급 낙제왕 놈아? 너 오늘 제일 먼저 채점된 답안지가 누구 것인지 알기나 하냐?’
나쁜 예감이 빠르게 몰려왔다. 그러니까 쥬스피앙은 그와 돈독한 친분을 쌓고 있는 네냐플 학장을 적절하게 협박해서 뭔가 마법적인 방법으로 막시민의 시험지를 봤을지도 모르지만…… 이럴 때는 예감을 무시한다.
“아, 그거야 채점하기가 제일 간단하니까 그렇지. 4등급 낙제왕이니까 4등급 받고 낙제했겠죠, 뭐.”
‘그것까진 내가 봐주려고 했는데! 이번엔 5등급이야!’
막시민은 ‘앗싸, 임무 완료’ 같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비록 종이쪼가리에서 소리만 나오는 것 같아도 의외로 얼굴도 보이고 있을지 모르니까.
“아하, 그래요? 저런, 안타깝습니다. 저의 재주와 노력이 그만 부족했네요. 그간 이 학교에서 아름다운 추억도 쌓고 교수님들의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았지만 이제 그만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시각…….”
‘일 줄 알았냐!’
듣고 있자니 쥬스피앙이 소리를 지를 때가 많긴 하지만 오늘은 계속해서 톤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가 진짜로 화가 났다면?
그렇다면 농담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살아남고 봐야 한다. 평범한 인간에게 쥬스피앙과 같은 사람의 분노는 자연재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빨리 멈추지 않으면……. 그런데 말을 할 틈이 없었다.
‘막시민 리프크네! 넌 도대체가! 이 대마법사 쥬스피앙이 일생 처음으로 추천해서! 장학금을 줘 가며 보낸 학생인 주제에! 답안지 꼬라지가!’
이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쥬스피앙은 막시민이 몇 시간 전에 제출한 답안지를 진짜로 봤다는 것이다. 네냐플에서 내일 출발하면 두 달 뒤쯤 도착할 머나먼 나라에 있는 기묘한 결계 속에 사는 주제에.
이러한 명백한 추리에 근거해 볼 때, 지난 이 년 동안에도 쥬스피앙은 막시민의 성적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을 뿐 다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번 답안지만은 예외적으로 그의 심기를 크게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궁금하네? 뭐가 그렇게 거슬렸을까?
‘어떻게! ‘결계’를 ‘걸개’라고 쓸 수가 있냐!’
바로 알았네.
“그거야 뭐 실수였죠. 제가 설마 그런 것도 모를 리가…….”
‘웃기지 마라, 이놈아. 일부러 헛소리를 써 갈기고 나온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아무리 공부를 안 하고 버텼어도 예전에 소공작 일로 보고 겪은 게 얼만데! 그런 걸 틀린다는 게 말이 돼? 왜 아주 ‘걸레’라고 쓰지 그랬냐?’
사실 쥬스피앙의 추리는 정확했다. 이쯤 되면 빨리 인정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막시민은 어슬렁 허리를 펴고 제법 각 잡힌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걸레’라고 쓰는 건데 괜히 머리를 쓰다가 그런 결과가…….”
‘닥쳐! 칼마린 학장 놈이 어찌나 웃어대는지 내가 창피하다 못해 그놈하고 절교를 해야 될 판이야! 하여간 이런 짓을 하는 네놈은 제대로 혼이 나야 한다! 그래서 내가 방금 그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니, 그건 안 된다.
막시민은 쥬스피앙이 뭔가를 ‘방금 생각해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무조건 다음 말을 뱉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줘도 생각이 변할 때가 많은데, 좋은 쪽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어쨌든 첫 번째 생각이 제일 위험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잠깐만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저의 명쾌한 추리력으로 생각해보자면.”
‘네놈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날마다 술이나 처먹고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쥬스피앙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막시민의 말을 들어보려는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쥬스피앙도 예전에 막시민을 상당히 겪어보았으므로, 막시민이 다루기 힘든 놈이긴 해도 단순한 멍청이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제가 시험을 본 건 오늘이거든요? 물론 그 답안지를 대마법사께서 이미 보신 것까지는 가능한 일인데요. 이 편지는 그보다 먼저 보냈어야 하잖습니까? 인편으로 오는 데 수십 일은 걸렸을 텐데 그때부터 저의 성적을 예상하셨을 리는 없고.”
‘왜 예상을 못하냐! 5등급일 줄은 몰랐지만 4등급일 것은 알았다! 그래서 경고를 좀 하려는 생각으로 그걸 보냈지. 그런데 오늘 냈다는 답안지를 보니 그 정도로 끝낼 수가 없게 됐다. 4등급은 한 해 더 다니지만 5등급은 아니야! 너 그거 알긴 했냐? 그러므로!’
막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막시민은 편지를 접어버렸다. 처음 모양 그대로.
편지를 접자 목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막시민은 접은 편지를 봉투에 넣은 다음 풀숲에 내던졌다. 그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참견했다.
“그거 뭔지 몰라도, 그렇게 내버려도 됩니까?”
돌아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넌 왜 또 뭐? 오늘은 처음 보는 인간이 시비 거는 날이야?
“누구신지 모르지만, 아니 모르므로 참견 마시죠.”
막시민이 일어나자 낯선 상대방은 떨어진 편지를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내려다봤다. 학생이라기에는 나이를 꽤 먹은, 그러나 교수라기에는 좀 어설퍼 보이는 나이의 남자였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사이다. 그러니 네냐플 사람은 아니었다.
“저거 안 가져갑니까?”
“왜요? 탐나면 가지시든가요.”
그러자 남자가 곤란해하며 웃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저런 비싼 재료가 듬뿍 든 물건을 학생이 멋도 모르고 흘렸다고 주워가다니,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요. 보아하니 저거 한 통 만드는 데 삼백 엘소는 들었습니다. 분해해도 백 엘소는 나와요.”
뭐? 백 엘소?
막시민은 편지를 내려다봤다. 당장 줍고 싶은 마음과, 건드렸다가는 호통이 폭발할 것 같은 불안감이 교차했지만 결국 백 엘소가 승리했다. 막시민은 편지를 줍자마자 냉큼 품에 넣어버렸다. 그런 다음 남자를 다시 봤다.
“그런데 누구시죠?”
남자는 안도한 얼굴로 그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전 맨드레아 아펠이라고 합니다. 재료값에 민감한 가난뱅이 마법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