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3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32화(32/143)
32화.
공녀와 탐정 (32)
젠장, 됐다. 남들이 믿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막시민이 첫 번째 대책을 급속 폐기하고 있을 때 다른 여학생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마리사, 너도 이왕 갈 거면 나랑 같이 다음달에 가자. 두 달만 빡세게 버티면 된다잖아. 요새는 좀 잠잠하대.”
“야, 안심하지 마. 솔직히 다 예측 불가잖아. 오늘 조용하다가도 내일 우글우글 몰려올지도 모르는 거잖아. 교수들이 그곳이 어떻다고 하는 얘기는 날씨 예측만큼도 쓸모가 없다고.”
“그렇다고 교수들보다 우리가 더 잘 알겠니? 그냥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속 편해.”
“속이 편해? 엘제,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거든? 적긴 하지만 죽을 확률이 있다고 레오멘티스 교수도 분명히 말했어. 거기 갔다가 못 돌아온 사람이 지금까지 세 명은 분명히 있었다고 말이야.”
“그럼 넌 안 가고 두 학기쯤 더 다닐래?”
“웃기지 마. 그건 확실하게 죽는 방법이잖아.”
마리사와 엘제는 어쩐지 막시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막시민도 네냐플을 더 다니다간 계피 껍질처럼 돌돌 말려버릴 것 같아서 도망치려 한 건데, 어떤 인간이 그보다 더 확실하게 죽는 방법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더니 둘 중 택일하란다. 어쩌라고?
어쨌든 막시민이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이 두 사람은 네냐플 학생이긴 했지만 연구 과정 학생들이었다. 연구 과정에 들어갔다는 것은 지옥의 졸업 시험을 통과하고도 학교에 남겠다는 어마어마한 결정을 내리신 대천재님들이란 뜻이었다.
그런 분들과 빌라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매우 궁금하지만 알기가 싫기도 하고 그렇네?
그리고 연구생들의 기숙사는 학생 기숙사와는 건물부터가 다른데 이 학교를 졸업한 대마법사 주제에 잘도 이런 데로 보냈겠다…….
그때 창밖에서 11월 어느 날 밤에만 출몰한다는 네냐플의 좀비떼가 괴성인지 환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엘제가 자조적으로 웅얼거렸다.
“졸업 시험 통과한 날 이래로 쟤들 신세가 부러워질 날이 올 줄이야.”
“아냐, 난 안 부러워. 어쨌든 난 쟤들에 비하면 주문 한 개라도 더 알잖아. 다시 말해 거기서 죽을 확률이 약간이라도 낮은 거지.”
“무슨 소리니? 쟤들은 킵에 갈 일이 없잖아?”
“너, 확신하지 마라. 지금 우리가 가게 된 것부터가 원래라면 없어야 할 일이야. 인원 부족이 계속되면 쟤들이라고 안전할 것 같아?”
“웃기지 마. 무슨 제노사이드 일으킬 일 있니? 평소에도 미친 유령들이 들끓는 거기에 저런 천진난만한 애들을 다짜고짜 보낸다고? 교수들도 그런 미친 짓은 안 해요.”
듣고 있자니 막시민은 점차 기분이 이상해졌다. 킵? 설마…… 저 두 사람이 말하는 데가 쥬스피앙한테 방금 끌려갔다가 돌아온 거긴가? 아까 쥬스피앙이, 비록 망한 비유이긴 하지만 그곳에 네냐플 신규 기숙사를 짓는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소리겠어?
“하여간 가기로 했으니까 약초학 논문은 이제 내다버려도 되겠지? 어휴, 초본 잃어버린 후로 꼴도 보기 싫었는데. 모조리 난로에 넣어버릴 거야.”
마리사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막시민이 있는 쪽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안 돼! 저리 가!
막시민은 기겁해서 더 숨을 곳이 없나 찾아봤지만 등뒤는 벽일 뿐 쥐구멍 같은 건 물론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지만 막시민이 숨은 곳은 피아노가 아니라 책상다리 밑이었다. 마리사는 쓰던 논문이 너무 꼴 보기 싫어서 책상에다가 담요를 덮어씌웠던 것뿐이었다. 마리사가 담요를 걷어치운 다음 책상 밑의 막시민은 못 보고 논문만 갖고 갈 가능성은 없겠지?
젠장, 그건 막시민이 갈색 쥐 한 마리일지라도 무리라고.
이 년 동안 시험도 낙제도 유급도 겁내지 않고 당당히 마법 공부를 무시해온 막시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공부에 소홀했던 걸 후회했다. 투명 화라든가, 순간 이동이라든가, 시야 조작이라든가, 정신 조종이라든가, 그런 주문을 쓰면 된다는 건 안다. 단지 그런 게 있다는 걸 알 뿐이지만.
티치엘이 듣는다면 눈이 동그래질 일이겠지만 막시민은 이 순간 생각했다. 여기서 탈출하면 이 중 하나라도 반드시 배워두리라. 이걸 배우기 위해 기초 공부 백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말이야, 꼭 하나는 배운다.
물론 안 들키고 탈출했을 경우의 얘긴데…….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사, 엘제! 이런 날 방에서 뭘 해? 호이오크 교수님이 오늘밤 네냐플의 좀비떼한테 데스 관 지하로 모이라고 선포하셨어! 저번에 130년 전에 수확된 채로 보존됐다던 포도 찾았던 거 생각나? 그걸로 담갔던 포도주통을 개봉하신다는 거야!”
“뭐? 그거 마셔도 안 죽는 거야?”
“걱정 마. 호이오크 교수님이 제일 먼저 맛을 보실 거니까. 그런 기회를 놓치는 분이니? 만약 토사물 맛이면 근사한 걸로 새로 한 통 뜯어 주시고도 남을걸? 벨크루즈산이면 좋겠다.”
몇 마디 더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막시민은 조금 더 기다렸다. 하지만 말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둘 다 가버렸나? 정말로?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 완벽한 순간에 찾아온 구원이다 보니 조금 의심쩍기까지 했다. 혹시 아까 그 학생, 쥬스피앙이 보낸 거 아니야? 막시민이 방금 한 결심을 눈치채고? 혹시 여기 떨어진 것부터가 모조리 쥬스피앙의 거대한 음모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기초 백 시간 공부부터 시작해야 된다 그건가.
막시민의 속마음을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둘째치고, 모든 게 너무 그럴싸해서 떨떠름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방은 조용했다. 막시민은 둘 다 갔다고 판단을 내린 뒤 담요를 조금 들춰 밖을 내다봤다. 과연 아무도 없었다.
담요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이어 재빠르게 문 대신 창문 앞으로 갔다. 조금 열고 내려다보니, 아니 내려다보려 했지만 코앞이 땅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반 지층이었다.
탈출에는 최고네.
막시민은 쉽사리 창문턱을 넘어 화단으로 빠져나갔다. 창문도 얌전히 닫아놓았다. 교정에 내려오고 보니 네냐플의 좀비떼는 모두 데스 데 이븐 관으로 몰려갔는지 사방이 다 조용했다.
인적 없는 교정을 가로질러 가면서 막시민은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극적인 타협을 성사시켰다. 기초 공부 백 시간은 지나 치게 무리한 구상 아니냐? 아까 생각한 것 중에 제일 간단한 걸 골라 구현부만 배우는 걸로 타협하자. 주문 지속 시간은 대략 사십 초 정도면 되겠지? 책상 밑에서 창문밖으로 나오는 데 대충 그 정도 걸렸어.
기초 없이 구현부만 배운 마법은 구현될 때는 언뜻 비슷하지만 지속 시간이 짧았다. 그리고 잘못 구현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미 탈출한 막시민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성의 있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북탑 기숙사로 올라갔다.
도토리 빌라 앞에 도착한 막시민은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쥬스피앙이 사막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신규 기숙사 말이야, 그 소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담.
하지만 본의 아니게 연구생 빌라에 떨어져 역대급 빌라 전쟁을 일으킬 뻔하다가 탈출하는 중대 사건을 겪는 바람에 대략 중요하지 않은 각주로 느껴졌다. 학장이 뭔가 제안할 거라고 했던가? 아, 뭔지 모르지만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었지만 다시 사막에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안락하게 어수선한 빌라의 풍경이 나타나자 크게 마음이 놓였다. 그사이 방에 돌아왔다던 룸메이트 친구들은 자러 간 건지, 호이오크 교수의 미친 포도주 파티에라도 간 건지 거실도 비어 있었다. 빌라도 조용하겠다, 막시민은 자기 방으로 직행해서 평화롭게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시작될 격변은 예상하지 못한 채로.
6. 도토리 빌라 문짝의 수난
다음날이 밝았다.
막시민은 날이 밝았다고 일어나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은 막시민뿐 아니라 전교생이 다 그랬다. 아침에 식당에 나타난 학생은 고작 세 명에 불과했다.
그중 첫 번째는 네냐플의 천사 티치엘 쥬스피앙이었다. 한 손에 파란 표지의 작은 주문 공책을 끼고, 어제 학교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듯 단정한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이 결합된 가운데 시험 기간에 남의 숙제를 세 시간씩 봐주는 천상의 상냥함까지 갖춘 티치엘에게 ‘천사’라는 별명은 매우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를 오래 겪은 사람들은 알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티치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992년에 입학한 네냐플 이 년 차(이 년 차라고 모두 2학년은 아니 다) 가운데에는 티치엘을 포함해 ‘4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네 명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첫인상과 180도 다른 인간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중 최고의 반전은 교복을 갖춰 입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냉철하고 명석해 보이는 막시민이었고.
고운 백금발에 다정한 미소를 가진 티치엘은 착하고 순해빠졌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으며, 하얀 원피스를 즐겨 입는 걸 보면 깔끔하고 조심스러울 것 같지만 또한 그렇지 않았다. 하긴 천재적 괴물들이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이는 네냐플에서 1등일 것 같은 인상도 아니긴 했다.
티치엘의 앞치마에는 아플리케가 일곱 장 기워져 있었다. 아플리케의 숫자는 최근의 실험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일곱 군데나 앞치마를 태워먹은 것을 보면 뭔지 몰라도 벽에 부딪힌 게 분명했다. 하지만 티치엘에게 짜증난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어려운 것일수록 좋아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점점 더 미친 것 같은 파괴력을 뽑아내는 부류였다. 다섯 살에 처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늘 그랬다.
어쨌든, 그날 식당에 들어선 티치엘은 텅 빈 식당을 보더니 움찔 놀라며 중얼거렸다.
“어머, 다들 괜찮은 걸까?”
이어 직원과 마주쳐서 어젯밤에 가공할 쓰레기를 치워야 했다는 하소연을 한바탕 들어주고 나서 아침 식사를 받았다. 블루베리 잼을 곁들인 팬케이크 세 장, 사과, 오렌지, 포도, 토마토, 우유 한 잔.
티치엘은 날씬한 체구였지만 놀랄 만큼 많이 먹었다. 과일이 주 종류이긴 해도 어쨌든 먹는 양만으로는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는 전사들 못지않았다. ‘쟤는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네?’ 하는 생각은 티치엘을 사흘만 관찰해보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