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39)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39화(39/143)
39화.
공녀와 탐정 (39)
“…….”
티치엘이 생각에 잠기더니 눈빛에서 점차 초점이 사라졌다.
이렇게 조각상 같은 눈을 할 때면 티치엘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대신 머릿속에서는 고도로 복잡한 연산이 돌아갔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걸 알고 있어서 이럴 때 티치엘이 뭘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앞치마를 태워먹고, 수천 번이나 만들던 시약에 엉뚱한 재료를 집어넣어 폭발시키고, 눈앞의 문짝을 놔두고 기둥을 들이받고, 반들반들한 마루에서 걷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자빠지는 일은 다 이럴 때 일어났다.
하지만 확실한 장점은 있어서 보통 이십 분은 걸릴 연산이 이 과정을 거치면 오 분 만에 끝장났다. 이 마술 같은 현상을 보고 동급생 들은 ‘쟤 또 접신했다’고 수군대곤 했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 곁에는 진짜로 접신하는 인간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간, 티치엘의 생각도 바로 그 사람에게 닿았다.
“루시안, 조슈아는 가버렸지?”
“응, 아까 방에 가봤는데 벌써 문 잠겼더라.”
“이번 연습 장소는 어딘지 알아?”
“그야 모르지, 조슈아가 그런 거 공고하고 가는 애가 아니잖아.”
그때 티치엘의 등뒤로 다가온 보리스가 머리 너머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여기.”
티치엘이 받아들고 보니 어딘가에 붙어 있었던 듯한 모집 공고였다. 정말로 사람을 모집할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간단하긴 했지만.
가을에 무대에 올릴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관심 있는 사람은 내 방으로. 10일까지.
-조.
추신. 타스타니아 및 근교 지역 출신자 우대함.
이걸 가져온 걸 보면 보리스도 티치엘과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티치엘이 물었다.
“우린 지금 막시민이 정말로 고향에 간 것 같지 않다는 얘길 하고 있었어.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타스타니아? 그게 어디지?”
“사라진 지명이야. 아마 일부러 이렇게 썼을 거야. 지금은 아라종에 포함되어 있을 텐데.”
루시안이 좋아하며 소리쳤다.
“우와, 그럼 나 여기에 해당 사항 있네? 근데 우대를 200퍼센트 정도 해줘도 걔가 날 자기 공연에 넣어주진 않겠지? 히히힛. 그런데 왜 굳이 옛날 지명으로 쓴 거야? 난 그런 이름 완전 처음 들어봤거든? 이래서야 아무도 못 알아보잖아? 아니지, 나만 못 알아보는 건가? 근데 보리스 넌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 지역 역사를 다룬 책에서 읽었어.”
보리스는 검만 휘둘렀을 것 같은 겉모습에 비해 책을 많이 읽은 편이었다.
티치엘은 ‘타스타니아’라는 글자를 들여다보다가 그 글자가 유난히 근사하게 씌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조슈아는 본래 글씨를 잘 썼지만 이 글자는 일부러 보란 듯 화려한 필치였다.
이윽고 티치엘이 말했다.
“내 생각에 조슈아는 이 이름을 진짜로 알아듣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나 봐.”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혹시 이번 공연 주제랑 관계가 있어서?”
“아마도.”
“그럼 조슈아는 이 타스타니아라는 곳에 연습 캠프를 차렸을 가능성이 크겠네?”
“내 생각으로도.”
주거니 받거니 착착 맞아 들어갔다. 둘이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 좀이 쑤신 루시안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래서 거기 멀어? 지금 출발해도 돼? 아니면 가다가 어디서 묵으면 되겠지? 하여튼 나 빨리 출발하고 싶다! 아무데나!”
그게 막시민의 고향이든, 조슈아의 공연 연습 캠프든 루시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났고, 막 방학이 시작됐고, 뭔가 근사한 일이 벌어져야 하니까 어딘가 낯선 곳으로 다 같이 떠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멀쩡한 이성을 갖고 있었다. 보리스가 물었다.
“티치엘, 네가 떠올린 생각은 뭐지? 막시민이 조슈아와 함께 있을 것 같다는 건가?”
티치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막시민은 조슈아가 공연 만드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픈 추종자가 자꾸 늘어나는데 다 어쩔 참이냐고 한바탕 퍼부은 적도 있었어. 그런 뒤로는 아예 신경을 끄겠다고도 했었고. 그러니 막시민이 이번 캠프 장소를 알았더라도 굳이 찾아갔을 것 같진 않아. 거기서 무슨 사고라도 생겼다면 모를까.”
티치엘은 그 정도에서 애매하게 설명을 그쳤지만 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형제 이상으로 가까운 친구였던 막시민과 조슈아는 최근 들어 남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거리를 두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 조슈아의 공연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한 조슈아가 한동안 잊은 듯했던 무대 공연에 다시 몰두하게 된 데도 겉으로는 모를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
“하지만, 조슈아는 다르지.”
티치엘이 눈썹을 올려 보였다.
“막시민이 실종됐고, 위험한 일이라고 이야기하면 조슈아가 가만히 있겠어? 아노마라드를 들어 엎어서라도 찾아낼걸?”
보리스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정말로 위험한 일인가?”
티치엘은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턱을 괴었다.
“응. 아주 까다로운 상황에 휘말린 것 같아. 스스로는 왜 이렇게 됐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만. 내 추측이지만, 어쩌면 막시민은 다시는 네냐플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그날 오후 3시.
이스핀은 오렌지나무 술집 정문 맞은편에 솟은 바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런 채로 삼십 분이나 기다렸다. 그 바위는 이상할 정도로 의자처럼 생긴 데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곳에 없었지만, 아직 술집에 사람들이 몰려올 시각이 아닌지라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4시가 가까워져 왔지만 여전히 누가 오는 기색은 없었다. 심지어 오렌지 벅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 엔 산뜻했던 이스핀의 표정도 점차 시무룩해져갔다. 무슨 용건이었든 바람맞는 기분은 영 별로였다.
마침내 이스핀은 일어나서 술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여전히 발견되는 것이 없자 뒤뜰로 가서 어제 바위가 있었던 곳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소리 없이 바위가 도로 솟아났다. 다시 앞길로 돌아와 주위를 휘둘러 본 이스핀은 양뺨이 도드라지도록 입을 꽉 다물더니 중얼거렸다.
“시간을 지킬 줄 모르네, 탐정.”
이스핀은 술집 앞을 떠났다. 곧장 십자로를 통과해 린디즈 절임 가게 앞에 이르자 아랫입술을 한 번 내밀어 보이고는 네냐플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어제는 중간까지만 갔지만 오늘은 끝까지 올라갔다.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방학을 맞아 학생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머리에 학교 외곽이 학교 안보다 오히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이스핀도 뭘 물어볼 만한 학생을 쉽게 찾아냈다.
“안녕하세요? 전 네냐플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찾아왔는데 면회를 신청하려면 어떤 분한테 얘기해야 되나요?”
이럴 때의 이스핀은 싹싹하고 호감을 주는 모습이었으므로 두 명이나 되는 학생이 선뜻 문지기를 찾으러 갔다. 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이스핀 같은 방문객에게 시달린 문지기는 지쳤는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보아하니 금세 돌아올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곁에서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는 이스핀이 신경쓰인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찾아온 사람이 누구예요? 들어가는 김에 전해줄게요.”
“아, 정말 고마워요. 막시민 리프크네라는 학생입니다.”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주변을 어정대던 학생 십여 명이 갑자기 방금 투하된 빵조각을 본 물고기들처럼 이스핀을 돌아봤다. 사방에서 말이 쏟아졌다.
“막시민 찾아왔어요? 걔 사라졌는데?”
“그 선배 학교에 없어요. 못 만나요.”
“벌써 가버렸다고요.”
“아마 영영 안 올걸요.”
마지막 말에 당황해서 눈을 커다랗게 뜬 이스핀이 되물었다.
“영영 안 온다고요?”
막시민의 실종은 오늘의 화젯거리였으므로 어느새 몰려든 학생들이 저마다 자기가 알거나 상상한 내용을 떠들어댔다. 막시민은 사라졌고, 순간 이동이었고, 교수가 화가 났고, 어디로 갔는지 친구들도 모르고, 어차피 방학이고, 돌아올 이유도 없고, 원래 퇴학당할 것 같았고…….
이스핀은 점점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로 도망간 거야?
어제 오늘 막시민에게 연달아 닥친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알 리 없는 이스핀은 당연한 추론으로 막시민이 자신을 피해 도망쳤다고 판단했다. 즉, 어제 자기를 고용하라는 둥 했던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었다는 뜻이다. 조금쯤 미심쩍긴 했어도 학교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이고 학비도 비싸고 하니 갑자기 사라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란 듯 유유히 달아나다니. 권총도 아마 가져갔겠지?
시간이 지나자 놀라움은 사라지고 대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막시민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오빠가 남긴 중요한 물건을 찾으러 왔으면 실수 따위 없도록 확실한 해결책을 썼어야 했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말로 지껄이는 약속 따위를 믿었지? 마법 학교 같은 데서 한가롭게 지내는 학생들이 흥미로워 보여서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틀림없이 녀석도 이런 심리를 눈치채고 더 우습게 본 거겠지?
한 방 먹은 충격으로 이스핀은 모든 정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중이었지만 막시민이라는 녀석과 얽힌 일은 상상 초월하는 방향으로 튈 때가 많다는 친구들은 다 아는 진리를 이스핀이 벌써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사 년 전에 이스핀은 에투알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자신을 에투알로 여겼고 그 사실에 긍지도 있었다. 오를란느의 정예 군인인 에투알이, 아노마라드의 탐정인지 부랑자인지 모를 놈의 시시한 수작에 속아넘어갔다. 도움은 필요 없다며 당당히 혼자 온 주제에. 공녀님이 어디 가서 이러고 있는 줄 알면 로랑은 뭐라고 할까? 네이는?
그런 생각을 하느라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입술은 웃을 듯 말 듯 힘이 들어갔지만 이스핀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침착하게 감사를 표한 뒤 말했다.
“모두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덕택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어요. 헛걸음을 했으니 전 이만 돌아가야겠네요. 그런데 혹시 누구라도 막시민을 다시 만나면 제 말 한마디만 전해주시겠어요?”
“그야 어렵지 않죠. 뭔데요?”
이스핀의 검은 눈에서 평소 별빛처럼 감돌던 휘광이 순간 살기를 띠었다.
“‘다음에 걸리면 죽여버릴 테니까 기다려.’”
“…….”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농담 섞인 막말이 아니었다. 군인을 별로 접해보지 못한 학생들은 흠칫하며 얼어붙은 채 이스핀을 봤다. 이스핀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절을 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