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4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44화(44/143)
44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5)
“그래요. 혹시 당신, 이스핀 샤를…….”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처음과는 달리 의혹이 묻어났다. 왜냐하면 대답하는 이스핀의 목소리가 누가 들어도 여자, 그것도 꽤 앳된 열다섯 살짜리 같았기 때문이다. 이스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뇨? 전 마르셀리에트 콜롱비에-르-비유라고 하는데요?”
이름을 말하며 오를란느 특유의 목구멍에서 내는 소리를 슬쩍 섞었다.
다행히 입은 옷이 어제와 달랐다. 이쪽도 여자 옷은 아니긴 했지만, 오렌지 벅이나 막시민이 인상착의를 전했다고 상상한다면 어쨌든 똑같지는 않았다. 아까 학교 앞에서 너무 비상식적으로 울화가 치밀어서 열이 오르는 바람에 반망토도 벗어서 가방에 넣어버린 참이었다.
“그래요…….”
세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사이에 이스핀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거 뭐예요? 저 보라색 동그란 거, 저거 마법이에요? 완전 신기하고 예쁘다. 아주 조금만 떼어가도 돼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바로 다가가 손을 대려 했다. 갈색 머리를 묶은 여자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손대면 안 됩니다!”
이스핀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는 시늉을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아, 안 되는 거구나. 그럼 여기 서 있어도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혹시 저거 터지나요? 아니면…… 그렇다, 무서운 괴물 같은 거 나오는 거 아니에요?”
이스핀의 겁먹은 표정을 본 여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건드리면…….”
“위험한 거구나……. 무섭다. 저, 죄송한데 그만 가도 되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뒷걸음질 치다가 얼른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마을에서 내려가는 길의 위치, 그리로 가는 도중에 있을 지형지물, 그중에서 쓸 만한 것을 재빠르게 훑었다. 예상대로 곧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요!”
이스핀도 저들이 이대로 자신을 보내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들이 소년 이스핀 샤를을 찾다가 여자인 자신을 보고 헷갈렸을지라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그냥 가게 둘 리는 없었다. 다만 저쪽에서 그런 판단을 해내는 사이에 자신은 주문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마르……엣!”
상대는 이스핀이 한껏 오를란느식 발음을 섞어 말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물론 그럴 줄 알고 택한 이름이었다. 성도 기억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어려서 오빠와 놀러가곤 하던 버려진 성터에 솟은 탑의 이름일 뿐이지만. 아노마라드 사람들은 이런 이름을 대면 유난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스핀은 알고 있었다. 아노마라드 사람은 저들의 공용어가 표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발음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금세 마을을 벗어나 숲 어귀에 다다랐다. 잡목이 우거진 너머로 프시키의 존재를 느낀 이스핀은 반색했다.
오를란느에서는 어딜 가나 프시키가 쉽사리 느껴지곤 했지만 아노마라드에서는 줄곧 그렇지 않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발견한 프시키가 고작 둘뿐일 정도였다. 오를란느가 프시키가 살기에 더 좋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저 숲에 제법 많은, 적어도 열은 넘는 프시키가 있었다.
숲으로 뛰어든 이스핀은 프시키들의 존재를 또렷하게 포착하는 것과 동시에 돌아섰다. 이어 나직이 말했다.
“우리, 예쁜 거 하나 만들어볼까?”
프시키들은 먼저 말하는 일도, 대답하는 일도 없었지만 이스핀은 그들에게 곧잘 말을 건네곤 했다. 형태조차 없는 그들이기에 처음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는데 네이가 한 말 때문에 새들로 연상해 볼까 했다가 어느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작고 찬란한 새들, 내 손에 죽고 싶어 하는…….
이스핀은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희미한 파동 같은 것이 공기중으로 퍼져나갔다. 프시키들이 긴장하며 파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 마, 죽이려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이번엔.
준비가 되자 손끝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투명한 뭔가가 자라나다가, 뻗어가다가 갈색, 녹색, 검은색으로 변하며 폭죽처럼 무성하게 늘어졌다. 수십 그루의 나무가 갑자기 자라난 듯 보여도 실제로는 특정 지점의 가지와 잎만 빼곡해졌다. 그런데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수가 없는 이유는 열 걸음, 스무 걸음 너머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 그런 것처럼 자연스러운 원근감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이스핀은 소리 없이 몇 걸음 물러서서 달려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이스핀이 선 곳에서 고작 네댓 걸음 너머에 멈춰 섰지만 이스핀을 발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단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
“너도 들었지?”
한 명이 가리키자 다른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스핀이 빤히 바라보는 가운데 고작 몇 걸음 곁을 스쳐가며 그들이 말하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그런데 이름이 뭐랬더라?”
“마리엣? 멜리사?”
“어쨌든 여자였잖아. 우리가 찾는 건 남자 아니었어?”
“일단 확인은 해두자는 거지, 뭐.”
이스핀은 그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반대쪽으로 사뿐사뿐 움직였다. 에투알 시절에 받았던 ‘깃털 걸음’이라고 부르는 훈련이 도움이 되었다.
아니, 실은 훈련을 받기도 전부터 이스핀은 이 걸음을 잘했는데 어려서부터 발레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투알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발동작이 약간 다르기도 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뛰어났으므로 상관없었다.
제법 멀어지고 나자 그때부터는 몸을 돌려 속도를 높였다. 이스핀의 주변을 감싸며 시야를 교란해 준 프시키들은 계속해서 따라왔지만 이런 눈속임만으로 저들이 언제까지 속아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강력한 방법은 곤란했다. 프시키가 이 정도 숫자로 모이면 상대를 교란시키거나 추적을 떨쳐낼 방법은 꽤 많았지만 이스핀은 일부러 조용하고 시시한 방법을 택했다.
왜냐하면 상대는 네냐플이었기 때문이다. 이스핀이 직접 네냐플로 가겠다고 했을 때 마리 루이는 몇 번이나 다짐해가며 주의를 주었다.
“공녀님, 네냐플에서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 마법사란,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공연히 정체가 드러난 인물들 중에는 전 대륙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일 거예요. 실은 그 드러난 정체도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있죠.”
그러니 절대로 그들에게 쫓겨서는 안 된다.
물론 지금 쫓아오는 자들은 교수도 아니었고, 적이 가까이 있을 때는 프시키를 다루기보다 검을 쓰는 편이 오히려 빠르고 손쉬웠다. 하지만 저들을 죽이고 갈 것이 아닌 이상 위협적인 능력을 보이면 관심을 끌게 된다. 마리 루이의 충고대로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은, 조금 미심쩍긴 해도 교수가 표적으로 삼아 쫓을 가치까지는 없는 존재에 그쳐야 했다.
숲 가장자리에 이르자 이스핀은 오므렸던 손을 풀며 프시키들을 날려보냈다.
작은 새처럼 흩어지는 그들을 향해 입술만 움직여 ‘다음에 또 봐’라고 말했다. 물론 이스핀은 프시키들을 하나하나 구별하지 못했으므로 이번에 봤던 프시키를 다른 곳에서 본다 해도 알아볼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이러는 편이 재미있으니까.
그런 다음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처음 머릿속에 떠올렸던 벼랑 앞에 이르렀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두 번 정도는 죽을 수 있을 높이의 벼랑 아래로 강이 흘러갔다. 야플리아 강이다. 강을 내려다보는 이스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무엇보다 네냐플에서 멀어져야 했다. 마법사들이 추적 마법으로 사람을 찾아내는 범위는 넓어봤자 말을 타고 십여 분 거리 정도고, 그 사람의 신체 일부나 오래 쓰던 물건 같은 것도 필요하다고 들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으니 저쪽에서 그런 주문으로 자신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최대한 멀리 가는 편이 안전했다.
막시민은 어찌된 것일까도 생각해 보았다. 처음 만나본 막시민이 무책임하고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짜고짜 권총을 주기 싫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보라색 봉인을 보고 난 이스핀은 냉정한 판단력을 되찾았다. 신뢰감 가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뭔지도 잘 모르는 권총이 탐나서 하룻밤 만에 학생 신분마저 버리고 도망쳤을까? 그보다는 뭔가가 잘못되어 네냐플 교수에게 불려갔다는 쪽이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혹시 네냐플도 권총을 노리고 있었단 말인가? 왜? 이스핀이 알고 있는 것을 그들도 알아서?
아니다…….
이스핀은 다시 생각을 고쳤다. 자신은 너무 권총에 집착하고 있다. 그야 자신에게는 중요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어제 본 막시민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옛날 사건인 것처럼 반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스핀이 막시민을 만나 권총을 요청한 날 줄곧 가만히 있던 네냐플에서도 그걸 손에 넣으려 시도하다니, 우연의 일치가 지나치다.
그보다는 술집이 봉인된 것으로 보아 네냐플의 관심사는 프시키가 나왔던 일이 아닐까? 그런데 네냐플의 마법사들이 고작 프시키 하나 때문에 왜 이런 소란을 피우지?
여기부터는 추론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부분이었다. 마법적 지식이 있어야 했다. 그러니 잠시 접어두고 지금 할 일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디로 갈까? 네냐플이 본격적으로 뒷조사를 시작하면 이스핀이 네냐플 근처에서 접촉했던 사람들이며 장소는 금세 밝혀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경로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일단 자취를 감췄다가 사흘쯤 사이를 두고 1차 거점인 모니즈까지 바로 가도록 하자. 거기까지 간 다음에 네냐플과 막시민 리프크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 전에는 혼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길로, 누구도 만나지 않고 움직여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겁이 더럭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온 몸이 팽팽하게 긴장되면서 예전, 열다섯 살 에투알 수련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에투알 최종심이라도 본다고 생각하면 괜찮을 것이다. 이까짓 게 설마 최종심보다 어렵겠어?
네냐플로 가려는 사람들이 내리는 선착장보다는 이쪽이 상류였다. 저녁이 되면 배도 운행하지 않으니 잠시 강 근처에 숨어 있다가 밤을 틈 타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강줄기를 거슬러 한나절 올라가면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 파노자레 산맥 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작은 도시가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올 때는 거치지 않았던 경로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