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4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48화(48/143)
48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9)
“그래. 후작의 누이동생, 사촌, 육촌 등등이 모조리 나서서 한 목소리로 후작을 비난한 다음 가문에서 제명해버렸어. 이제 작위와 영지가 덩그러니 남지 않았겠느냐? 그 다음은 쟁탈전이지. 제법 똑똑했던 누이가 재빨리 저택을 차지하고 버티니까 사촌과 육촌들은 합심하여 영지를 점령했는데, 그자들은 아미센 대공이 장차 왕이 될 줄 알고 거기 붙어서 후작령이 저들 것이라고 약속을 받았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됐더냐?”
“‘전격의 나흘’이던가, 그 일이 벌어졌던 거죠? 그게 아미센 대공과는 관계가 없었나 보죠?”
오를란느인이 그 사건을 자세히 몰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후작부인이 포도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전격의 나흘’. 그건 폰티나 공작의 공이지. 아미센 대공?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주제에 뒤늦게 켈티카로 쫓아가서 제 몫도 줘야 된다고 떠들다가 내분이 일어나서 등에 칼이나 맞았잖아. 이렇게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도 모르던 인간들이 딱 하나 눈치가 빨랐던 점이 있었어. 그들은 ‘전격의 나흘’ 소식을 듣자마자 후작령 전체를 케르느메 남작한테 헐값에 팔아버리고 잠적했단다.”
그게 후작령이 사라지게 된 경위였다. 저택을 차지하고 버티던 누이가 그 사실을 안 것은 한 해나 흐른 뒤였다고 했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시절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지만 한번 정식으로 거래된 영지를 되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판을 해서 근본적으로 상속권이 누구의 것인가 따져보려면 모니즈 후작의 작위 박탈이 정당한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다가 자칫하면 영지도 저택도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작위는 누구의 것인가? 저택을 가진 자인가, 영지를 사들인 자인가?
“그것 때문에 결국 재판이 벌어지 게 됐다만, 영지를 사들인 자가 작위까지 샀다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결이 나서 모니즈 후작 작위는 누이동생이 갖게 되었지. 그렇지 않아도 공화 반란 기간 동안 귀족 가문들마다 내분이 심했는데 새 왕가가 일어나 옛 질서를 옹호하고 있으니 혈통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에게 작위까지 주라고 판결하기가 껄끄럽기도 했겠고.”
“그럼 지금의 모니즈 후작께선…….”
“그 누이동생께서 아들에게 허공에 뜬 저택을 물려주셨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허공에 떠서 잘 살고 있는 게 아니냐.”
이스핀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참, 그런데 공화 정부한테 잡혔다는 후작은 어찌 됐어요?”
후작부인은 남은 포도주를 쭉 마셔버리더니 말했다.
“잘 살아보려고 그렇게 재주를 넘었는데도 공화국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참수대로 갔다고 하더라. 그런 자의 머리를 자르면 피 대신 멍청이 즙이 흘러나온다던데.”
후작부인은 고압적인 어조에 말투도 거침없어서 이스핀조차 가끔은 흠칫했다. 어쩌면 이런 성격이라 콜레트하고 잘 맞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네냐플이 백 년 만인가 천 년 만에 문을 닫았다니 그 앞에 가서 구경이나 할걸 그랬다. 틀림없이 그럴싸한 춤판이 벌어졌을 텐데.”
이스핀은 조금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춤판이라고요?”
“방학이 진짜 방학이 됐잖느냐? 특히 연구생 애들, 걔들한테는 본래 방학이란 게 없다. 그런데 이게 웬 하늘에서 떨어진 휴양지 초대장이냐.”
이스핀은 학생이 아니었으므로 후작부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미 입학해서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야 방학이 반가울지 모르지만, 전 시험이 날아갔으니 내년에 입학하려던 계획만 끝장난걸요. 기껏 큰 마음 먹고 오를란느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심사숙고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왜 그런 큰돈을 내가며 거길 들어가 절인 올리브 꼴이 돼야 하는지. 너, 인간을 네냐플에 절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올리브 얘기를 하자 옛날 생각이 났는지 후작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스핀도 부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깨닫고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아, 린디즈 절임 얘기죠? 저 먹어 봤어요. 시고 짜고 매운 맛.”
“어떻더냐?”
이스핀은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이 되어 눈썹을 팍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에투알 시절의 말투가 튀어나 왔다.
“완전 개똥맛이었죠!”
후작부인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식당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래! 완전 똥맛이야 똥맛! 네냐플 맛! 하하하하!”
두 사람이 한바탕 웃는 동안 후작부인의 시종들이 덮개를 씌운 새 접시를 가져와 테이블의 빈 접시와 바꾸어놓았다. 무화과와 꿀을 넣고 자고새 요리와 크림을 듬뿍 얹은 절인 살구 타르트가 나왔다. 식사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다. 지금껏 계피와 계수나무 껍질을 넣은 포도주를 쉬지 않고 곁들여 마셨건만 후작 부인은 취한 기색도 없었다.
후작부인 카타리네는 오래전, 약 스무 살 무렵에 네냐플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시험도 쉽사리 통과했고, 자기가 꽤 똑똑하다고 자만하던 시절이라 네냐플도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네냐플은 별것 아니지 않았고, 젊은 카타리네가 자랑하던 똑똑함과는 전혀 다른 재능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내가 거기서 배운 건 네냐플에 절여지면 그 똥맛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난 그러기가 싫어서 삼 년 차에 탈출했지.”
즉, 낙제를 거듭하다가 퇴학당했다는 뜻이었지만 후작부인은 그리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후로 자신의 똑똑함이 통하는 곳을 얼마든지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또 후작부인은 네냐플을 아예 미워하지는 않았다. 젊은 날의 애증이 깃든 곳이랄까.
“네냐플형 인간은 따로 있어. 잠깐만 봐도 알 수 있지.
하지만 마리 너는 그쪽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야. 내가 그 애들을 싫어하진 않아. 왜냐하면 그 애들이 날 좋아해. 한심하지만 귀여운 애들이지. 내가 과제 마감일은 아는지 시험공부는 했는지 돌아가며 챙겨주고, 수업에 안 나타난다고 교정 구석구석 찾으러 다니다가 길을 잃어 제 수업도 못 들어가고, 밤중에 정원에서 파티 열자고 불렀더니 춥다고 마법으로 불을 피우는 바람에 주무시던 교수님까지 초대하게 되고, 그 일 때문에 생활 점수가 모자라서 유급당하게 되니까 눈물 짜면서 탄원서도 받으러 다니고…….”
추억에 잠기자 학창 시절의 말투가 슬슬 튀어나왔다. 후작부인이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보고 있자 이스핀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슷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저도 어쩐지 네냐플에 가면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아요. 아, 벌써부터 추억담이 밀려오는 느낌이네요.”
후작부인은 다시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 시건방진 아이는 콜레트처럼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다. 이스핀은 후작부인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지라도 추억담의 내용으로 보건대 사실상 네냐플 깡패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모르는 체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문을 닫아버렸으니 저한테는 그런 기회가 없겠네요.”
“설마 아예 닫겠어. 학생 하나 때문에! 그렇게는 안 될 게다.”
“학생 하나 때문이라고요?”
이스핀이 슬쩍 되묻자 후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지명수배된 모양이니 그 녀석 얘기쯤은 해도 되겠지. 네냐플의 역사에 남을 인물이 탄생한 것 같더구나. 내가 하고 싶었던 위업을 이루다니 보통 녀석이 아니지 뭐냐.”
“전 믿어지지 않는데요. 학생 한 명이 어떻게 위대한 네냐플이 문을 닫을 정도로 피해를 줄 수가 있어요?”
“마법이란 게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사고는 칠 수가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기초를 가르칠 때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것 아니겠느냐. 그 리프크네라는 애가 학교를 이 년이나 다녔지만 별명이 낙제왕이라고 하더라. 한마디로 나처럼 학교를 다녔다는 건데, 마무리만은 나보다 근사하지 뭐냐. 저 혼자 쫓겨나는 대신 학교를 닫아버렸어!”
후작부인이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사이 이스핀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막시민 리프크네가 정말로 네냐플을 닫아버린 장본인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학생이 수배가 됐다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 설마 도망이라도 쳤단 말이에요? 낙제생 주제에 네냐플의 마법사들을 다 따돌리고요?”
“그게 일이 그렇지가 않아.”
후작부인은 말을 해줄까 말까 하는 것처럼 혼자 싱긋 웃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이스핀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잔의 포도주를 쭉 비웠다. 후작부인도 같이 마셨고, 시종이 다가와 두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한 모금 더 마신 후작부인이 결국 입을 열었다.
“네가 네냐플에 이듬해 입학할 예정이었으면 오히려 이런 얘기를 안 해줬을 테지만, 지금은 실망하고 화도 났을 테니까 그냥 남의 재밌는 얘긴가 보다 하고 들어라. 그 녀석의 이름은 막시민 리프크네이고, 겉보기에는 나태한 낙제왕이었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하더라. 평소 한심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이유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으려고 일부러 하는 짓이라는 거야.”
막시민 리프크네의 한심한 꼴이라면 이스핀도 충분히 봤다. 그런데 그게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실상은 뭔데요?”
“대단한 천재라지! 네냐플에 들어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마법적 재능을 타고나서 마법 유물을 척척 다뤘다는 거야. 카프리치오라고 부르는 물건인데, 고대 가나폴리의 찬트를 재현한 유일무이한 악기라고 하거든. 그런 정도의 천재니까 일찌감치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았겠니? 네가 들어봤는지 모르겠다만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아는 대마법사 쥬스피앙이 우연히 그 애와 마주치자마자 바로 재능을 알아차리고는 흥분한 나머지…….”
이스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기가 만났던 막시민 리프크네를 생각했다. 설마 그 꼬락서니에 그 성깔 머리로…….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림이 겹쳐지지 않았지만 입으로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그 애를 제자로 삼았다는 거야! 이백 년인가 삼백 년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제자를 거둔 적이 없는 분이! 대단한 사건이라 할 만하지! 그런 분의 제자가 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열 배는 빨리 마법을 배운단다. 한마디로 대마법사로 가는 탄탄 대로가 열린 거야. 하지만 세상에는 남의 그런 재능과 행운을 질투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지 않겠니?”
“그야…… 그렇겠죠.”
더러운 코트와 곰팡내 나는 모자를 떠올린 이스핀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식당 맞은편 벽을 보며 생각했다. 천재성을 감춰보려고 그런 꼴을 했다면 아주 효과적이긴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