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5)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5화(5/143)
5화.
공녀와 탐정 (5)
“아뇨. 로랑 카스티유 님은 뛰어난 에투알이시고 저보다 훨씬 강하시죠. 오빠도 저한테 자길 지켜줄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전 오빠를 믿었지만, 믿는 것과 지켜주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네요. 세상엔 예상 못 한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가 있고, 저도 지키기로 한 사람을 다시는 안 놓쳐요.”
베르나르 대공자의 이야기가 나오자 로랑은 움찔했다. 샤를로트가 그 말을 이렇게 쉽사리 내뱉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알아차린 로랑은 다소 어조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네 기분은 알겠는데, 난 그분이 아니야. 그런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리고 대공자께서도 그랬을 거야. 어린 동생한테 호위를 받고 싶지는…….”
그러자 샤를로트가 바로 반박했다.
“아뇨. 오빠는 대공감이었고, 검은 제가 더 나았기 때문에 그러려고 한 거예요.”
“잠깐, 대공자께서는 실버스컬 우승자 아니었나?”
“그건…….”
뭐라 대답하려던 샤를로트가 갑자기 입을 꼭 다물더니 고개를 돌렸다. 로랑도 말을 내뱉은 직후에 깨달았다. 열다섯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만 출전이 가능한 전 대륙 규모의 검술 대회, 실버스컬에 샤를로트도 올해 나갔다고 들었다. 그러나 대공자의 실종 사건 때문에 대회 도중에 급히 귀국해야만 했다. 그러니 순위권에 들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다시는 나갈 일도 없을 것이다. 외적 사정으로 증명할 수 없게 된 부분을, 심지어 대공자 때문이었다면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로랑은 뒷머리를 한바탕 문지른 다음 말했다.
“미안하다.”
샤를로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검은 제가 나아요.”
“그래……. 그랬겠지.”
그냥 인정하는 것 말고 더 나은 대꾸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다고 로랑의 상황이 나아질 건 전혀 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거야 그거고 어쨌든 지금은, 하여튼 난…… 너도 알다시피 대장님의 명령은 그 뜻이 아니었잖아?”
“저를 지키라는 뜻이었다 그거죠?”
다시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런 채로 샤를로트가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전 저 자신을 지킬 수가 있거든요.”
“그럼 난 아니고?”
“그건 저한테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
재빠르게 말을 마치더니 샤를로트는 한 발짝 물러나 입구를 바라봤다. 호위병다운 자세로. 로랑은 기가 막혀 입을 잠시 벌린 채로 생각했다. 뭔가 순식간에 휘둘린 기분이 드는데…….
그런데 솔직히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기막힌 호흡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에투알끼리도 따로 연습하지 않고는 쉽지 않은 경지였다. 전투 상황과 흐름을 보는 눈이 에투알과 같은 수준이고, 심지어 상대의 마음을 빠르게 짚어야 했다. 훈련도, 경험도 필요하지만 실은 상당 부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대공 가문에 무인의 피가 흐른다고는 들었지만 체감해보지 못했기에, 귀족들에게 냉소적인 로랑은 그저 띄워주는 말이겠거니 했었다.
“직접 싸워봤으니 보고를 해야지? 저게 뭔 것 같나?”
크루파드가 묻자 로랑은 얼른 고개를 한번 흔들어버리고 보고할 말을 정리했다.
“베었을 때 피도 없고, 소리도 내지 않는 걸 보면 영체나 에너지 계열 같습니다. 그런데 살려고 도망치는 걸 보면 생물 같기도 하고요. 외부 명령으로 제어를 받는다고 보기에는 너무 수가 많고 움직임이 제멋대로입니다. 제 검으로 베어지긴 하지만 완전히 소멸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구슬처럼 변해 떨어지더군요.”
그러자 크루파드가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정말로 그랬다. 로랑은 생색내려다가 실패한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흉갑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가 꺼내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내민 손바닥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구슬이 놓여 있었다. 그 와중에 언제 주워들 새가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크루파드가 수련병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마리 루이!”
그러자 스무 살쯤 된 깡마른 수련병 하나가 대열에서 뛰어나왔다. 그는 체격도 전사답지 않았지만 옷차림도 다른 수련병들과 조금 달랐다. 색은 똑같이 검정이었으나 무릎까지 오도록 줄인 튜닉에 가까운 옷이었다. 즉, 그는 마법사였다.
“이게 뭔지 말해봐.”
마리 루이가 구슬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에너지가 굳어진 것 같긴 한데…….”
마리 루이는 품에서 비단 손수건처럼 생긴 새파란 천을 꺼내더니 구슬을 쌌다. 그러자 구슬이 갑자기 부스러지더니 사라져버렸다.
“어?”
마리 루이는 놀라 허둥지둥 손수건을 폈지만, 흰 가루가 약간 남았을 뿐이었다. 크루파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마리 루이는 당황해서 쩔쩔 매며 웅얼거렸다.
“저기, 이런 현상은, 제 생각엔…….”
마리 루이는 말을 맺을 새가 없었다. 입구를 감시하던 수련병들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다시 옵니다!”
크루파드가 명령했다.
“제자리! 1열 준비!”
로랑은 즉각 검에 손을 얹으며 입구로 다가섰다. 대장을 제외하고 유 일한 에투알인 자신이 맨 앞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샤를로트가 재빠르게 따라와 오른쪽에 서는 것만은 당연하지 않았다. 물론 위치 선정은 좋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샤를로트가 한쪽 입가만 올려 씩 웃는 것이 아닌가?
“잘 지켜드린다니까요?”
할말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대꾸할 틈도 없었다. 새들이 한꺼번에 파도를 이루며 입구로 몰려들었다. 입구를 막아버리면 좋겠지만 결정 방벽은 아까 써버려서 다시 쓰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뻗어갔을 때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밀려든 새들이 입구에서 뭉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덩어리가 되자 새의 형태는 지워져버렸고,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진짜 불길로 변했다. 상상도 못 했던 변화였다.
“물러나!”
로랑과 샤를로트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물러나게 하려다가 손을 부딪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로랑이 샤를로트의 손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둘이 간신히 오른쪽 벽으로 붙어 피했을 때 불덩이는 입구를 꽉 채운 채 이글거리며 그들 모두를 가둬버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쇄류처럼 터져 들어왔다.
“흡…….”
모두가 숨을 삼키며 그대로 굳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져 어떤 판단도 불가능한 순간이었다. 동굴 안이 불바다로 변해 모조리 몰살당하기 직전, 크루파드가 외쳤다.
“모두 오른쪽으로! 붙어!”
판단 불가의 상태에 처해서도 몇 년 동안 에투알 훈련을 받아온 그들은 본능적으로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이어 크루파드의 주위에서 공기를 빨아들이는 점이 생겨나더니 불길을 향해 뻗어 나가며 휘어졌다. 크루파드의 특기인 ‘공압’이다. 에투알의 특기는 하나뿐이긴 해도 시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런 순간에는 마법사들의 주문보다 오히려 위력적이었다. 불길이 일시적으로 왼쪽 벽에 갇히자 입구가 잠시 열렸다.
“모두 나가! 당장!”
혼이 반쯤 빠진 수련병들이 우르르 뛰어나가고, 로랑과 샤를로트에 이어 마지막으로 크루파드가 빠져나가며 로랑을 불렀다.
“로랑!”
로랑은 이미 돌아서는 중이었다. 입구를 향해 팔을 뻗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알거든요?”
한 번 더 결정 방벽을 시전하자 입구가 막혔다. 오래 가지는 않더라도 얼마간 시간은 벌 것이다. 이 정도로 특기를 연달아 쓰면 로랑의 기력도 많이 소모된다. 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어 막 자신도 피하려고 돌아서는데 옆에서 여전히 샤를로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만은 로랑도 진심으로 화가 났다. 대공국의 계승권이고 나라의 안위고 그딴 건 다 개나 줘버린다 쳐도, 제 목숨쯤은 추스르며 다녀야 할 거 아냐? 모조리 죽기 살기로 도망쳐버린 상황에서 뭘 하자고 남아 있는데?
“너…….”
그러나 로랑은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대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샤를로트의 뒤로 바위가 소리 없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진인가? 하지만 흔들림도 없었는데?
그때 샤를로트도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로랑의 뒤에 있던 벽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한 폭의 천처럼, 서서히 너울거리며 두 사람을 휘감으려는 그것이 돌이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손을 내밀어 상대를 자기 쪽으로 당기려 했다. 그러다가 사태를 깨닫고 오히려 서로에게 붙어 섰다. 어느새 사방 세 걸음짜리 감옥에 갇힌 꼴이 된 그들은 등을 맞대고 돌아선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돌벽을 쏘아봤다. 온몸에서 진땀이 솟아났다. 이대로 압살당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