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50)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50화(50/143)
50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11)
후작부인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이스핀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작이잖아. 남작이 후작령을 샀을 때 무덤도 그 안에 있었어.”
이스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남작은 후작령을 샀을 뿐이죠. 그 안에는 후작령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여럿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고요. 무엇보다 무덤은 후작령의 주인인데 어떻게 후작령에 속할 수가 있겠어요? 모자가 저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죠. 제가 보기에 그 무덤에는 지금 주인이 없는데요?”
물론 이스핀의 논리는 절반쯤 궤변이었지만 현재 남작과 후작, 후작령과 후작 저택의 관계도 궤변이나 다름없는 괴이한 논리로 이어 붙여져 있었으므로 새로운 궤변을 하나쯤 더한들 안 될 것은 없었다. 이스핀이 말을 이었다.
“밤중에 주인이 없는 무덤으로 가셔서 그 안에 있는 관을 이 저택 안의 납골당으로 이장해버리세요. 어차피 조상의 무덤인데 안 될 것 없잖아요? 그리고 무덤의 본질은 고인의 관이지 돌무더기는 아니니까, 이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따져보자고 해보세요. 재판을 잘해보시면 차 두 상자보다 훨씬 큰 것을 돌려받으실지도 모르겠는데요.”
후작부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십 년 전에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는 것이 가능하다면……. 후작부인의 얼굴에 갖가지 감정이 지나간 후 이스핀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요. 공물선이라는 배 말이에요. 아무나 탈 수 있는 건가요?”
“아무나는 아니지.”
후작부인의 얼굴에서 ‘내가 보낸 사람을 아무나라고 하겠느냐’라는 뜻을 읽은 이스핀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작은 부탁을 몇 가지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5. 수상쩍은 호의
쾌청하게 맑은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멀리서 보면 새파랗게 맑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다소 혼탁한 강 위를 세 척의 배가 나아가고 있었다. 엇비슷한 크기의 공물선들이었다.
세 척 모두 돛배였지만 돛은 접힌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거꾸로 부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노를 꺼내 젓지도 않았다. 이 근방은 물에 빠진 것을 모조리 뜯어먹는다는 조그마한 물요정의 영역이어서 아무 것도 물에 집어넣으면 안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헤엄치는 사람도 없었다. 강물의 흐름에만 몸을 맡긴 배는 하늘을 떠가는 구름처럼 느릿했다.
하지만 그건 역시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나 떠올릴 이유였다. 실제로는 그런 해묵은 미신을 진지하게 믿는 뱃사람도 거의 없어진 세상이었다. 그들이 노를 젓지 않는 진짜 이유는 조금만 나아가면 큰 강, 노아질베르와 합쳐지며 급류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배의 속도를 높인 채로 급류를 만나면 선체가 심하게 기우뚱거리고, 그러다가 쓸데 없는 피해를 입기 쉽다. 어차피 느린 구간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셋 중 두 번째 배의 갑판 위에 귀족의 살롱에나 놓으면 적당할 법하게 생긴 라운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호두나무 틀 위에 붉은 벨벳을 씌웠는데 발받침이 특이할 정도로 길었다. 따라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으면 두 발이 허공을 자연스럽게 걷어차는 자세가 되었다.
바로 그 자세로 그 의자에 앉은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 역시 멀리서 보면 편안한 자세로 수면을 응시하며 여행을 즐기는 듯했지만 가까 이에서 보면 달랐다. 남자는 외투 자락이 구겨지든 말든 발치까지 둘둘 만 채 누운데다 머플러까지 친친 감고도 추위를 참지 못해 콧물을 훌쩍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자려고 애쓰고 있었다.
“에엣취!”
그의 노력은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는 중이었다. 첫째로 배 밑에서 뭔가가 긁히는 기묘한 소리가 줄곧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둘째로 계절에 어울리는 칼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왔다. 셋째로 옆에서 말을 거는 인간이 있었다.
“플레상스 경, 경의 굳센 의지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과연 강인한 귀족의 귀감이라 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이 존경 받을 만한 행동이 경의 건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요.”
막시밀리앵 드 플레상스 경, 다시 말해 막시민은 닷새 전에 이 배에 탔다. 배는 공물선이었으므로 승객이 많지는 않았고, 또 귀한 물건을 탐낼지도 모를 신분 낮은 자들의 탑승은 처음부터 금지되어 있었다. 반면 남부로 내려왔다가 켈티카로 돌아가는 귀족들은 공물선 탑승을 좋은 선택지 중 하나로 생각했다.
말이나 마차로 흔들리며 가는 것보다는 훨씬 쾌적하고 빠르거니와 공물선들은 탑승료를 많이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가끔 이렇듯 나이와 취향이 비슷하며 대화를 나누기에도 즐거운 사람을 만나 친분을 쌓는 재미도 있었다.
아니, 나이와 취향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앵 드 플레상스는 스물다섯 살이고, 노인네들처럼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건 다 설정일 뿐이란 말이다! 설정이라고! 대화를 나누기에도 전혀 즐겁지 않아! 너나 재밌지!
이 모두는 내면의 외침일 뿐, 막시민은 우아한 플레상스 경의 역할을 제법 잘 해내고 있었다. 로렐딘 교수가 가방에 넣어준 금테 안경과 송아지 가죽 구두와 청록색 비단 크라바트(cravat)도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머리 모양이 귀족치고 자유스럽다는 점만이 상대를 의아하게 했지만 오를란느의 유행인 것으로 해서 대강 넘어갔다.
그랬다.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막시민은 교수들이 나름대로 공들여 가짜 신분을 준비해준 만큼 설정대로 행동하기 위해 제법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설정이 하필 일생 만나본 적도 없는 오를란느인이어서 없는 상상력까지 부단히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교수님들, 꼭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느냐고요. 그나마 다행한 것은 상대도 오를란느인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설정은 아무렇게나 새로 지어내면 되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오를란느에서는 이 정도면 날씨가 따뜻하다고 다들 강둑에 나와 바람을 쐬며 아이스 크림도 먹고 개도 산책시키고 페탕크도 하고…….”
“오, 페탕크! 이름만 들어본 놀이인데 경은 해보셨나보군요. 아니지, 아주 잘하시겠지요. 저도 언젠가 배 워보고 싶군요. 오를란느 귀족들은 페탕크를 즐깁니까?”
“그럼요. 사람이 모였는데 페탕크에 쓸 공이 없으면 지나가는 사람의 대…… 머리에 올려놓은 모자에 붙어 있던 털방울을 대신 사용하기도 하죠.”
지안니 다 팔미는 눈을 조금 크게 떴지만 상대가 세련된 농담을 했는데 자신이 못 알아들었나보다 생각하며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눈치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스물네 살이라는 지안니는 남작 가문의 아들로 이번에 켈티카에 처음 가보는 길이라고 했다. 막시민이 크나큰 위화감과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스물다섯 살이라고 소개하는데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을 때부터 이 인간이 약간 짜증났다. 지안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국의 수도로 여행하는 젊은이답게 세상만사가 흥미진진한 상태였다.
그래서 공물선에 실린 공물은 물론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실어가는 운송품에까지 일일이 참견하다가, 선장이 개인적으로 사들였다는 의자를 포도주가 무한히 제공되는 브리지 게임에 걸게 만들고, 그걸 뜬금 없이 막시민이 따 가게 만드는 업적을 이룩했다. 그건 단지 포도주가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일 뿐이었지만…….
이튿날, 막시민은 당연히 의자를 돌려주려 했지만 한번 앉아보자마자 그 계획을 포기했다. 너무나 편했던 것이다. 이런 의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고 두 군데나 꺼진 소파에 누워 살아왔다니, 처음으로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약간의 슬픔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선장도 막시민과 똑같은 생각으로 이 의자를 샀다는 점이 문제였다. 선장은 다음날 다시 브리지 시합을 열고 그 의자를 걸라고 졸라 댔지만 막시민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선장은 막시민이 이 배를 타기 위한 승선료는 냈으나 화물 운송료는 내지 않았다는 주장을 폈다. 막시민은 그 점을 인정하고 운송료를 내려 했지만(교수들은 그에게 제법 넉넉한 여비를 주었다) 선장은 미소를 지으며 화물칸이 꽉 찼기 때문에 더이상의 화물은 받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아하.
막시민은 이런 종류의 주장을 논파하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지만 고상한 플레상스 경이라는 설정을 유지해야 했으므로 처음에는 점잖게 접근했다.
“아, 그렇군요. 이 배의 화물칸을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는 잠시 놓아둔다 치더라도 당신의 주장은 약간의 철학적 문제를 발생시키게 되는데, 그렇다면 어젯밤까지 이 의자는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야 어제까지는 이 배의 집기였지요. 배의 일부분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손님의 화물이 아니겠습니까?”
“배의 일부분일 때는 있었던 자리가 화물이 되면 없어집니까?”
“배의 집기를 놓아야 하는 자리에 화물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화물이란 부탁을 받고 운송하는 물건일 뿐이고, 집기란 순조로운 운항을 위해 싣는 물건이니까요.”
“순조로운 운항을 위해 이 의자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문제야 선장이 정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고상한 플레상스 경이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상대였다. 막시민은 귀족답게, 다소 섬세하게 인내심을 잃어버린 표정을 짓고는 이런 대화를 킥킥대며 구경하고 있는 지안니라는 놈한테도 약간의 정의로움을 보여줄 필요를 느끼며 말했다.
“그렇군요. 선장께서 말씀해주신 집기와 화물의 정의를 충분히 이해 했으며 한 수 견문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자니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배를 타는 손님들에게는 가방 같은 개인 소지품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화물이 아니겠지요?”
“그야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하지만 개인 소지품 중에서 직접 소지하기 어려운 물건일 때는 화물로 처리하게 되는 거고요. 제 생각이 맞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렇지요.”
“그런데 비록 개인 소지품이라 할 지라도 손님이 소지품을 배 안에서 줄곧 들고 다녀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가방이라는 것이 제법 무거울 수도 있겠고, 이를테면 식사중에도 가방을 들고 있어야만 한다든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실 분은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막시민은 오늘 아침에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금테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눈에 뵈는 게 없는 인간이 되어 말했다.
“하나 묻지요. 이 안경은 화물입니까, 아닙니까?”
“물론 아니죠. 방금 잠깐 내려놓으셨을 뿐이니까요.”
“제가 이 안경을 깜빡하고 이곳에 둔 채로 떠났다가 내일쯤 찾으러 온다면 화물로 변하게 될까요?”
“그것도 아니지만…….”
선장은 슬슬 궤변의 기운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대가 ‘경’으로 불리니만큼 귀족 계급의 말단쯤은 되는 듯했으므로 무시하고 자리를 뜨기는 어려웠다. 막시민은 자연스럽게 안경을 도로 집어 들어 쓰면서 한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제 의자도 잠시 이곳에 뒀다가, 얼마 뒤에 찾으러 올까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