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5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52화(52/143)
52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13)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쪽에 좋은 자리를 마련해두었으니 어서 드시지요.”
귀족 가문의 하인처럼 구두 뒤축에 펠트까지 붙인 급사의 안내로 식당 안쪽에 따로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메뉴판을 받아보니 정찬 코스의 내용은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가격이 없었다. 막시민은 메뉴판의 한 줄 한 줄 꼼꼼히 살펴보고, 뒷면도 보고, 마지막으로 덮개를 분리해서 뒤집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생각했다. 이런 식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보기만 했는데, 진짜로 오게 될 줄이야.
심지어 이번에는 막시민이 돈을 내기로 한 자리다. 막시민은 가격이 궁금…… 아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틀림없이 평범한 상식을 가진 인간을 기절시키기에 충분한 가격이겠지만 막시민은 플레상스 경이라는 한심한 작자의 성품과 주머니 속에 두둑하게 든 남의 돈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버티었다. 플레상스 경은 그리 큰 부자는 아닌데 취향만 까다로워서 씀씀이가 제법 큰 사람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이 실제 인물이긴 한 건가? 혹시 아니라면 누구 뒷목 잡으라고 이런 설정을 한 거야?
선장은 신이 나서 멋대로 코스마다 제일 비싸 보이는 것들을 골라 주문하고 포도주까지 추가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지안니도 선장을 따라하고, 이등항해사까지도 슬그머니 평소에는 언감생심 기웃거리지도 않던 요리들을 끼워 넣었다. 주문을 받은 급사도 신이 났다. 이 식당은 아나베르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으로 평소에는 손님이 무척이나 없었다. 아나베르크가 아니라 켈티카 같은 곳에나 자리잡았어야 할 메뉴와 가격 때문이었는데 보통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이렇듯 잘못 걸린 손님이 나타나 평소의 적자를 메워 주곤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손님은 자주 지나다니는 배의 선장이 데려왔다.
주문을 받은 급사가 물러가자 선장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아나베르크에서 이 가게 말고는 플레상스 경의 품격 높은 취향을 만족시킬 곳이 없을 겁니다.”
그 플레상스 경이라는 인간한테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마흔이 되기 전에 폼므 도핀(pommes dauphine)을 곁들인 송아지 등심 대신 감자 껍질이나 끓여먹게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막시민은 눈썹을 올린 채 눈을 희미하게 뜨는 것으로 자아를 이탈시킨 다음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창하게 시킨 결과 음식은 대단히 느릿느릿 나왔다. 기다리다 굶어 죽는 것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속도였다.
아스파라거스와 전복으로 만든 가벼운 한입거리가 먼저 나온 뒤, 빨갛게 익혀 껍질을 벗긴 가재에 로즈마리 가루를 뿌린 요리, 그리고 뭔가를 잔뜩 채운 퍼프 페이스트리가 나왔다. 페이스트리는 고기와 버섯, 각종 채소를 익혀 얹은 일종의 파이에 가까웠는데, 한두 입에 끝장날 요리지만 무척 손이 많이 갔을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에 그치면 될걸, 모처럼 비싼 식당에 와서 잘난 체해 보고 싶었던 선장이 막시민 쪽을 바라보며 급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분은 켈티카에서 세련된 모임을 많이 경험해보신 신사라네. 아나 베르크의 자부심을 담아 손님께 음식 설명을 좀 드리면 어떤가?”
“오, 그러시군요. 저희 식당에 그런 분을 모시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 퍼프 페이스트리로 말씀드 리자면 아나베르크 최고의 요리사인 저희 주방장이 큰 자부심을 품고 있는 요리로 열 겹이 넘는 섬세한 페 이스트리를 먼저 구워낸 뒤 뒤뜰에서 정성스럽게 키운 신선한 당근과 양파, 정향과 셀러리와 부케가르니와 후추를 넣어 부드럽게 삶은 닭고기에다가 이틀 전에 채취한 신선한 버섯에 레몬즙을 넣어 익히고 거기에 특제 베샤멜소스를 섞어서…….”
급사가 설명을 마치는 것보다 막시민이 그걸 먹어버리는 쪽이 더 빨랐고, 그런 뒤로도 설명이 계속되는 바람에 네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급사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말한 뒤 정중히 절을 하고 나가자 막시민은 플레상스 경을 반의 반쪽 정도 함유시킨 막시민 리프크네로 돌아가 다시는 이런 것을 묻지 마라, 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는 선장도 확실히 동의했다.
“그게, 아…… 참 훌륭한 요리였지요. 역시 그러는 게 좋겠죠. 그럼요.”
이어서 샐러드도 나오고 수프도 나오고 빵도 나오고 철갑상어도 나오고 오리고기도 나오고…… 그런 끝에 아티초크를 곁들인 쇠고기 등심구이와 소뼈를 이용한 그라탱을 다 먹었을 즈음에는 꽤 잘 먹는 편인 막시민도 더 먹기 힘들 정도로 배가 불렀다. 그런 채로 이게 대체 얼마짜리일까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뒤이어 디저트로 나온 분홍색 프랄린을 얹은, 놀랍도록 달콤한 머랭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막시민에게는 부자 친구가 한둘 있었으므로 그동안 마음만 먹었다면 이런 식당에 와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세 시간이나 걸려 느릿느릿 먹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막시민의 상상력은 그가 가본 가장 비싼 식당에서 받아 본 계산서에 세 배쯤 곱해보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 결과, 마침내 급사가 반짝이는 은제 접시에 얹어 가져다준 계산서를 본 막시민은 말 그대로 눈이 튀 어나올 뻔했다. 4…… 480엘소? 넷이서 저녁 한끼 먹었는데 이 돈이 말이 되는 거야? 귀족들은 이런 거 먹고 살면 수명이 오백 년 정도 돼야 되는 거 아니야? 너희들은 입 열면 보석이 나오고 화장실 가면 황금이 나오냐?
그런 말이 평소와 달리 머릿속으로만 오간 이유는 단 하나, 막시민이 네냐플 교수들이 공들여 마련해 준 설정을 최대한 깨뜨리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시험은 너무 심했다. 조용한 식당 한 구석에서 켈티카 신사 플레상스 경과 시골 거지 막시민 리프크네가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눈치를 보았다. 선장은 계산서를 들여다보는 막시민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고, 지안니는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며 딴전을 피웠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키긴 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른다는 귀부인이 단순히 선물로 보냈다는 포도주가 자주색 황금이라고 불러야 될 정도로 고급이라는데, 그런 선물을 받는 분이 이 정도 계산서에 설마…… 하고 그들이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막시민이 마음속에서 극적인 타협을 거쳐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코스 마지막에 나온 코냑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만 막시민 리프크네로 돌아가 주먹으로 선장의 면상을 지금보다 조금 낫게 다듬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돈이 모자랐다. 막시민의 상상력 안에서 이렇게 비싼 저녁 식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나올 때 적당히 100엘소 금화를 한 개 집어 오는 데 그쳤던 것이다.
이제 와서 돈을 나눠 내자고 하기도 곤란하고, 무엇보다 저들인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지나가는 항구의 식당에다 대고 외상을 하자고 해 봤자 이빨이 들어갈 리도 없다. 결국 비싼 소지품을 잡히고 돈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되는데……. 네냐플 교수님들이 주머닛돈을 각출해서 마련해주신 플레상스 경의 금회중시계 정도면 어떻게 되려나.
그런 결론은 순식간에 났지만, 무엇보다 이 뻔뻔스러운 작자들에게 한마디해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가 가장 쉽지 않았다. 동시에 세상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싼 것이 많다는 것도 처음으로 실감했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조슈아와 몇 년이나 친구로 지내왔으니 막시민이 비싼 것을 못 먹어보거나 비싼 물건들을 구경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에는 그런 것을 갖고 싶지도 않았고 가지려고 노력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남의 일이었다. 금화 한줌을 넘어서는 물건의 가격은 들어도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지금 그런 돈을 제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건네야 하는 상황이 오고서야 그는 드디어 궁금해졌다. 예전에 조슈아가 태어났다는 공작 가문의 거대한 성에서 손님 노릇을 하며 지낼 때 먹고 입고 사용했던 것들은 모두 얼마였을까? 가만히 있어도 자기 영지에서 보석이 나고 세금이 걷혀 차곡차곡 들어오고, 그 큰 성의 어디를 가더라도 하인이 척척 나타나는 그 가문은 얼마나 상상 초월하게 부유한 것일까?
하지만 막시민이 몰랐던 것도 있었다. 이 식당의 계산서는 켈티카 최고의 식당에 가서 보여주더라도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아나베르크 역사상 최고의 바가지였다고나 할까.
막시민이 내려놓은 계산서를 요령 좋게 흘끔거린 지안니가 손을 약간 떨면서 막시민을 쳐다봤지만 막시민은 그즈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초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돈이라…… 그게 가끔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꼭 필요하기도 하고 안 필요하기도 한 거니까……. 그런데 왜 눈물이 약간 나는 것 같지.
그런데 잠시 기다렸는데도 급사가 돈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이 식당은 이렇게 고급, 아니 고가, 아니 초고가인 주제에 나가는 길에 계산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세 시간이나 지겹게 저녁을 먹은 터라 한시라도 더 있기 싫었으므로 막시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최근 연습중인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들 갑시다.”
“아, 그러실까요? 그러시죠. 네, 네.”
막시민이 홀을 가로질러 가며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를 찾아 움켜쥐며 입속으로 다양한 욕을 퍼붓고 있는 동안 뒤따라오던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민망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미안하긴 해도 뭐 어떻게 되려니 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되었다.
“즐거운 식사 되셨습니까, 손님?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무한한 기쁨이겠습니다. 아,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주방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하러 다가온 식당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막시민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계산은 평소 신사분을 흠모해오셨다는 어떤 귀부인께서 하고 가셨습니다. 정말로 품격 높고 너그러운 분이셨지요. 아, 모르셨습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음식 값 외에 팁까지 두둑하게 받은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표정이 됐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세 사람은 말 그대로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자기들의 역할을 깨닫고 경쟁적으로 찬사를 퍼붓기 시작했다.
“와아, 역시 재치와 배려가 넘치는 우아한 분이시네요! 경을 감동시키기 위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 거겠죠?”
“프, 플레상스 경의 매력이 상상 초월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거겠죠? 정말 대단합니다.”
“우와, 오늘 먹은 거 엄청 비싸지 않았나요? 그분, 대단한 부자인가 본데요. 근데 부자들의 마음은 진짜로 모르겠네.”
이등항해사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오려 하자 선장이 재빨리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식당 주인과 주방장, 그리고 급사들까지 줄줄이 따라 나와 인사를 퍼붓는 가운데 멍해진 막시민과 세 사람은 얼떨결에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나오고 보니 거리에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차 앞에 앉아 있던 마부가 얼른 뛰어내려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플레상스 경이십니까? 경을 부가까지 모셔다드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서 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