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5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54화(54/143)
54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15)
지스카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아니, 그 얘기는 나중에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드릴 말씀은 하나뿐입니다. 그걸 당장 팔아 버리십시오. 제가 이제부터 말씀드릴 경로를 통하면 안전할 것입니다. 절대로 따님이 계속 갖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걸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리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지스카르를 보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네. 그렇지요. 노리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잊어버리십시오. 누가 노리든, 그런 것은 그냥 모르셨던 것입니다. 알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냥 따님의 손에서 떠나보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님도 안전해집니다. 그저 작은 세공품 하나를 처분하시는 것뿐입니다. 아무도 따지러 올 사람은 없습니다. 베르나르 대공자는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리자의 태도에서 ‘진실은 위험하니 쉬운 길을 택하라’는 뜻이 명백히 전해졌다. 사실상 통보, 아니 협박에 가까웠다. 대단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리자를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아니 나이트 워커를 수없이 접해보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시작이 어떠했든 지금의 나이트워크는 민중의 벗에 소속된 조직이었다. 정확히는 정보 분과에 속한 하나의 위원회일 뿐이다. 비록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위원회인 셈이지만, 어쨌든 그런 점을 생각할 때 민중의 벗의 사상적 스승에 해당하는 지스카르에게 ‘위험하니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 호의에서 비롯됐다 해도 당혹스러울 정도의 무례이자 월권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스카르가 그런 말을 들었다고 시키는 대로 따른 뒤 편안히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일생을 종마 교배나 예술가 후원 같은 소일거리로 보내도 될 신분으로 태어나 공화 혁명을 추구하는 위험천만한 조직을 건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자도 그 점을 잘 알리라. 그런데도 왜 이러는가?
이윽고 지스카르가 나직이 대답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마스터께서는 위원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리자가 어떤 일이 나이트워크 마스터의 뜻임을 지금처럼 분명히 밝혀 입에 담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지스카르는 놀라는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지만 저와 같은 사람은 굳이 온실 문을 열고 나가서 바깥이 한겨울이었음을 알아내고서 얼어죽는 한심한 부류가 아니겠습니까?”
알아서 병인 걸 알면서도 타고난 세계 밖으로 나간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지스카르가 평소처럼 우회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할 리자가 아니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그런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최후통첩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리자는 조금 더 버티었다. 간신히 나온 말이 이러했다.
“위원님께서는 저희에게 너무나 중요한 분이십니다.”
“마스터께서 저를 요람에 넣어 보호하고자 하시니 앞으로 백 년 정도는 안심해도 될 듯하지만 역시 조금 심심하기는 하겠습니다.”
“위원님, 제발…….”
마침내 리자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지스카르는 기다리면서 조금 생각했다. 리자의 이러한 예외적인 태도가 마스터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면, 나이트워크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해가 가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엄청나게 무례하다는 것도 압니다. 입을 열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못 하겠습니다. 그저 저희의 말씀을 따라주십사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따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위원님께서는…… 그 물건을 제발 건드리지도 마십시오.”
지스카르는 조금 의도를 섞어 빙그레 웃었다.
“이런, 아기들한테는 빼앗아서 높은 선반에 올려놓은 장난감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법인데요.”
“위원님께서는 이 세상에 건드려서는 안 될 위험한 물건도 있다는 것을 아실 정도로 현명하시지 않습니까?”
“장난감이 왜 위험한지 정도는 설명해주어도 될 정도로 나이를 먹은 것 같긴 합니다.”
“아니오, 아닙니다. 그건 몇 살이든, 얼마나 현명하든, 세상의 대부분은 알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저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상대가 위원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러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모르는 체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이렇듯 찾아온 것은 위험천만한…… 사실상 목숨을 내놓은 행동입니다. 그만큼 저희에게 소중한 분이십니다.”
지스카르는 리자가 하는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그렇듯 안전한 곳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민중의 벗을 위해 존재하는 한 조각의 부속이다. 위험한 비밀을 남에게 맡겨둔 채 안심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지스카르가 민중의 벗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서, 마치 기묘하게 뛰어난 막냇동생과도 같은 나이트워크를 완전히 믿지만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스카르는 몸을 약간 젖혔다가 턱을 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워낙 정보를 다루는 업무에 소질이 없지만 이대로라면 그 권총이 무엇인지 직접 조사해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위원님께서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저희는 그걸 훔쳐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보았다. 이제 미소는 사라졌다. 지스카르는 리자가 그 물건을 왜 두려워하는지 끝내 말해줄 생각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순간 나이트워크가 민중의 벗과 공유하지 않는 비밀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중대한 분열이다.
오늘날 가까운 사람들 중 누구도 본 일이 없는, 지스카르가 스무 살 무렵에나 보이던 냉정하고 상류계급다운 시선이 리자의 눈을 꿰뚫듯 바라봤다.
“그렇게 한다면 이 문제는 조사 분과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
조사 분과로 넘어간다는 말은 이 문제가 민중의 벗의 수뇌부인 ‘망명 의회’에서 다뤄질 것이며, 자칫 조직 차원의 배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지스카르의 입에서 나온 이상 이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원님께서 쉽게 납득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마스터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과연 그렇군요. 물론 적당히 꾸며낸 이유를 드리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저희가 위원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모욕하는 셈이었기에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제 존경심과 위원님의 목숨을 맞바꾸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니 처음의 선택을 조금쯤 후회하게 되는군요. 그럼, 원하시는 대로 진실과 죽음을 한 상자에 넣어서 드리지요.”
그렇게 말하는 리자의 눈이 새빨갰다. 입술도 떨렸다. 마주 쥔 양손의 손톱은 손등의 피부를 파고드는 중이었다. 태어난 그대로의 자신과 새롭게 만들어낸 자신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죽여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가는 나이트워커가 두려워서, 자신을 억누르지 못해서 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찾는 자가 있습니다. 그자는…… 모든 나이트워커의 악몽이며…… 인간성도, 동정심도, 짐승 수준의 감정도 없는…… 사람이 낳았다는 것을 믿기 힘든 자입니다. 저희는 그자를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으나…… 부득이한 경우 ‘오래된 자’라고 이르며…… 누구도 그자의 진짜 이름을 모르고…… ‘아이언페이스’라는 별명으로만 불립니다.”
지스카르는 흡사 검은 구멍에서 끄집어낸 듯한 리자의 목소리를 대리석 같은 무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이성의 세계에 어둠이 달려와 부딪치는 듯했다. 고대의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날뛰는 자연을 보며 품었을 공포를 반들반들한 그림책에 그려진 삽화를 보며 이해할 수는 없다. 필치가 사나울수록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다.
저것이 리자 한 명의 생각이라면,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나이트워커가, 즉 수많은 사람이 단 한 사람에게 저러한 공포를 품는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는 민중의 벗의 동료들이라면 그저 어리둥절해졌을 것이다. 또는 상대를 진정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달랐다. 그는 이론가이기도 했고 예술가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오를란느인이었다. 오를란느인은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안전한 세계를 뒤트는 섬뜩한 민담을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 민담들은 합리적인 결말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늘 뜻밖의 파국으로 치달았다.
요정을 만나 선물을 받지만 이유를 알려 하다가 나무뿌리로 변하고, 세 번 되풀이된 호의는 세 번의 저주로 대가를 치르며, 버려진 아이는 애타게 찾던 가족이 상자 속의 잘린 머리가 된 채로 ‘도망쳐’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만 이미 늦었음을 알게 된다.
요정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고 마법사들은 사악한 유혹에 빠지며 말하는 동물들은 인간의 영혼을 빼앗으려 들고 아름다운 보물은 괴물이 놓은 덫에 불과한, 그 세계는 오를란느 북쪽 바다 너머의 어딘가라고도 했고 수천 년 전의 오를란느라고도 했다. 누군가는 오를란느인들의 머릿속이라고도 했다.
그런 오를란느인이었기에 지스카르는 리자가 설명하려 한 공포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민담에 나오는 기괴한 그림책을 쥐고 어디까지 넘길까 망설이는 기분이었다. 끝까지 넘기면 그는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리자가 한 말은 사실 별것이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사악한 범죄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자는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몇 명씩은 있다. 그러나 리자는 그 이상의,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오를란느적(的)’이라고 불러야 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체 그자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떨림이 가라앉은 리자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 권총은 그저 우연히 사라져야 합니다. 감추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 아는 사람을 살려둘 그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부터 위원님도 저와 같은 입장이 되신 겁니다. 제발, 제가 말하는 방법대로 권총을 처분하십시오. 살아날 기회는 그것뿐입니다.”
지스카르는 테이블에 놓인 모래시계를 보았다. 모래가 거의 다 떨어진 것을 본 그는 일어나 촛불을 껐다. 훅, 소리와 함께 캄캄해진 방 너머에서 희미한 새벽빛이 감돌았다. 둘 다 자리를 떠야 할 시각이었다.
어둠에 반쯤 잠긴 얼굴로 지스카르가 물었다.
“혹시 그자가 베르나르 대공자를 죽였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