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55)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55화(55/143)
55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16)
4장.
1. 광장의 두 사람
며칠 뒤 막시민이 탄 공물선은 강의 끝에 다다랐다. 끝이자 시작인 곳이다.
질베르 만과 켈티카 만을 합쳐 ‘용의 입’이라고 불렀다. 두 강과 바닷물까지 뒤섞이는 거대한 만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배 위에서 막시민은 안개 너머를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 수많은 광경이 흘러갔다.
질베르 만을 빠져나가 켈티카 만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암초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만에 접어들기 직전에 물길 안내인을 태우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공물선 선장들 중에는 ‘용의 입’ 항해의 달인들이 많았다. 다른 두 공물선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왔다. 점차 늘어나던 배가 질베르 만 한가운데로 빠져나왔을 무렵에는 바다에 흩 뿌린 색종이 같은 무늬가 되었다. 오전 11시.
겨울치고 묘하게 따뜻한 날이었다. 코트 안쪽에서 땀이 약간 배어날 정도였다. 아침 햇살이 뱃머리마다 부서지는 가운데 크고 작은 배들이 강의 흐름을 벗어나기 위해 힘차게 조타를 틀며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곳곳에 조약돌처럼 귀엽지만 피해야만 하는 바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암초 공주들’로 불리는 위험천만한 존재들이다.
해안은 오간자 베일처럼 희뿌연 해무에 가려져 있었다. 암초 지역을 벗어난 배가 속력을 내자 녹색 곶들이 불쑥불쑥 솟아나고 비탈진 강둑이 커튼처럼 열리며 뻗어갔다. 물거품도 나란한 선을 그어갔다. 이제부터는 쏟아져 나오는 블루엣 강의 물결을 거꾸로 갈라야 했다. 뱃전에 서 있자 용골에서 나오는 희미한 울림이 배 전체로 번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삐그덕, 하는 소리가 배가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막시민은 몇 년 전에 배를 타고 켈티카 만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강이 아니라 바다 쪽에서 들어왔었다. 길었던 항해를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
여름이었다. 그날은 ‘용의 입’이 내뿜는 흰 입김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갑판에 나와 서성거렸던 것 같다. 먼발치에 또렷이 드러난 해안선을 바라보자 안심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그날은…….
그 배에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다. 친구들, 든든한 보호자, 그들을 지켜주려 하는 유능한 사람들, 그 속에서 자신은 그들의 일원이었고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믿으려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는 입장이 되니 잘 보였다. 믿고 싶었다고. 자신의 가치를.
하지만 켈티카에 다다라 맞았던 새벽은 그렇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막시민의 눈앞에 세계가 약간 윤곽을 드러낸 듯했다. 거대한 바위 절벽처럼 솟아올라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부딪쳐도 뚫을 수 없는 벽, 틈새 없는 바위의 존재를. 그런 건 없다고, 계속해서 부정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향해 덤벼들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비집고 들어 갈 곳을 찾을 수 있다고, 파고들다 보면 틀림없이, 한 점 약한 곳이 있다고.
정작 진짜로 틈새 없는 벽과 마주하게 된 건 그때 중요하게 생각한 모든 일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제야 알게 됐다. 그때까지 자신이 믿었던 자신의 가치란 자신 속에 들어 있지 않았음을.
“자, 다 왔네요.”
생각을 떨치고 보니 어느새 부두 앞이었다. 힘을 내어 물을 가르던 배는 잔물살에 흔들리며 떠 있었다.
잠시 과거로 다녀오기라도 했을까? 생각이 남긴 열기로 뺨이 화끈거려 찬바람이 시원할 지경이었다. 앞을 보니 배다리를 놓기 위해 선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막시민은 고개를 흔들며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썼다. 지금 자신은 막시민 리프크네가 아니다. 그 녀석은 여기 없다.
막시밀리 드 플레상스 경은 돌아서서 의자를 내려줄 선원들에게 은화 한 닢씩을 건넸다.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제안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지팡이를 쥐고 천천히 배다리를 건너 뭍에 내렸다. 땅은 약간 젖어 있었다. 오전답게 북적이는 부두는 무질서한 듯 보여도 모두 제 갈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 이상하게도 길을 잃은 듯했다. 그에게도 갈 곳은 있는데. 직접 정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플레상스 경이십니까?”
조금쯤 예상했을까?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아까부터 막시민을 쳐다보고 있던 마차 부가 다가오더니 정중히 절을 했다. 뒤따라오던 지안니가 싱글거리며 떠들었다.
“햐,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마차부는 플레상스 경을 원하는 주소까지 모셔다 드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켈티카 어디라도 상관없다는 말을 들으며 막시민은 무표정한 얼굴을 약간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켈티카는 익숙하니 나 혼자 갈 수 있소.”
막시민이 마차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자 놀란 지안니가 얼른 따라 붙으며 물었다.
“아니, 뭐 여기서 켈티카로 가는 역마차야 많긴 하지만…… 그러면 저 의자는 어쩌시려고요?”
막시민은 지안니가 어느 정도 따라오도록 기다렸다가 몸을 돌렸다. 이어 점잖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팔미 씨,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항해하며 우리가 쌓은 돈독한 우정을 생각할 때 기꺼이 도움을 주시리라 믿는데 어떠신지요?”
“아, 저…… 그야 제게 그럴 기회만 주신다면…….”
막시민은 지안니에게 의자를 떠맡겼다. 지안니가 켈티카에 있는 동안 머물기로 했다는 친척집은 플레상스 경의 집과 같은 로크리 구에 있었다. 그쪽에서 의자를 잠시 보관해주면 닷새 뒤쯤 찾으러 가기로 했다. 그 정도 거리라면 사람을 사서 옮기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중 나온 사람들과 만난 지안니에게 가볍게 작별을 고하고, 막시민은 네냐플 교수들이 준 여행 가방과 지팡이만 들고 부둣가에 북적대는 사람들 틈을 뚫고 걸어갔다. 동시에 주위를 훑어보며 자신을 주시하는 자가 없는지 찾으려 했다. 그는 이 ‘귀부인’이 호의를 품고 자신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자가 진짜 귀부인일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짓궂은 장난을 치는 귀족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당에서의 일 이후로 그런 생각을 버렸다. 과도한 친절만큼 공격적인 것도 없다. 의도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어쩌면 음험한 공격이다.
그런 자에게 이제부터 머물 곳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저쪽에서 플레상스 경에 대해 정말로 잘 안다면 주소도 알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마차를 타는 곳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노리는 시선은 찾지 못했다. 막시민은 줄지어 선 역마차 중에서 일부러 엉뚱한 노선을 택했다. 켈티카 주변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아가는 마차였다.
이튿날 정오 무렵,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막시민은 다시 역마차를 타고 켈티카에서 가장 번화한 중앙 광장 앞에 내렸다. 여기부터 로크리 구까지 가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도 날씨가 따뜻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역마차가 떠나갔다. 함께 내린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길 모르는 시골뜨기처럼 서 있는 사람은 막시민뿐이었다. 그는 서두르는 대신 주위를 휘둘러보며 잠깐 옛 일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된 옛날도 아니다. 그래서인가 더 생생하게 눈을 스쳤다. 셋이서 허름한 옷을 입고 이 광장을 지나쳐 술집에 갔고, 다시 반대로 통과해 의상실이라는 곳에도 갔었다. 그때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는 걸 잘 몰랐던 것 같다. 다시 되풀이되기 힘든 순간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곧 생각을 흩어버리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볕 좋은 겨울 낮이라 그런지 온갖 새들이 광장에 나와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찾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뒤섞이고 흥정과 웃음, 삐걱대는 바퀴 소리 뒤로 아이들 발소리가 감겨들었다. 켈티카 사람들은 수레를 밀고, 나귀를 끌고, 구걸을 하고, 볕을 즐기고, 길쭉한 빵 봉지나 최신 유행의 양산이나 배달 중인 우유통을 옆구리에 낀 채로 광장 가운데에서 마주친 친구와 수다를 떠느라 유용하게 광장을 쓰고 있었다. 즉, 만만찮은 인파였다. 조금씩 걸음이 느려진 이유는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볕이 좋고, 새파랗게 뻗은 하늘 이 여름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이곳에 없는 사람들과 나란히 걷는 기분이 들고, 가판에 쌓인 작고 시큼한 사과에 시선이 가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야, 막시민!”
광장 한가운데,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선명한 뭔가가 튀어나와 막시민 앞에 섰다. 흰 블라우스에 짧은 스웨터를 겹쳐 입은 소녀였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소녀였다. 막 불어온 바람에 무릎을 넘는 하늘색 치마와 긴 띠가 휘날리고 손에는 연한 모랫빛 가죽으로 지은 여행 가방이 있었다.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의 겨울 외투가 물결처럼 흘러갔다.
직후,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막시민의 얼굴에 혼란, 당황, 의혹이 차례로 스쳐갔다.
“너…….”
짧은 머리 양쪽에 핀까지 꽂아 올린 이스핀이 싱긋 웃더니 덧붙였다.
“……선배?”
막시민이 할말을 잃을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로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했고, 둘째로 남자아이인 줄 알았던 상대가 여자 옷을 입고 있고, 그런데 그게 자연스러울뿐더러 잘 어울리고 뭐랄까, 이 모습 자체가 켈티카에 다다를 때부터 줄곧 머릿속을 맴돌던 시절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잃었다는 것만은 알았던 순간들을.
기억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곳에서 그건 그때도 내 몫이 아니었다고, 되찾을 수도 되찾아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지금은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하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고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뛰어들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버린 페이지에 미련이 남아 뒤적이고 있는데 불쑥 내민 손이 차르륵 넘기더니 새 페이지를 펴 가리키며 ‘여기를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상대가 이스핀이어서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잘 아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언젠가 좋아했던 풍경을 빈 종이에 끄적여본 듯 닮은 것뿐이었다. 그 여름이 꼭 저런 색깔이어서. 다 알지만, 그런 채로도 눈이 떨어 지지 않았다. 아주 약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러나 간신히 호흡을 삼키고 나온 말은 이랬다.
“너 왜 여기 있냐?”
“글쎄. 난 내가 있고 싶은 데 있으면 안 되나?”
갸웃하며 말하더니 곧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니고. 나한테 용건 남지 않았어? 우리 만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재밌는 거 하기로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