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5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58화(58/143)
58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19)
“뭐…… 너 진짜…… 넌 태도가 왜 그 모양이냐?”
이스핀은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가, 슬쩍 훑어보다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커다랗던 눈이 초승달처럼 한껏 가늘어졌다.
“아하하…… 화내는 거야? 에이, 내가 잘 고쳐줄게. 그러지 마. 내가 사람 갱생 좀 잘 시켜.”
“웃기지 마. 세상에 날 고쳐보려고 한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아무도 성공 못 했거든?”
이런 걸 자랑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나오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스핀은 여전히 코를 살짝 찡그리며 웃고 있었다.
“저런, 왜인지 알 것 같네. 그 사람들은 너를 너무 사랑한 거야. 넝마 같은 코트를 입고 곰팡내 나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네 모습이 너무나 좋았나 봐. 하지만 너무 사랑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그런 생각 또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스핀은 다시 막시민을 위아래로 슥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런 패션에 추억도 감상도 없거든. 그 사람들이 지금의 너를 봤으면 사랑이 식었을지 도로 불탔을지 모르겠다만, 내 취향에는 이 모습이 훨씬 낫네. 특히 크라바트 색깔 잘 골랐어. 머리 색깔을 돋보이게 해주잖아? 안경은 좀 고루한 디자인이지만 기본은 했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벌써 한 건 도와준 거였네.”
“네가 뭘?”
“네 넝마 코트랑 작별하게 해줬잖아. 그때 혹시 무슨 예감 안 들었니? 앞으로 그 코트처럼 탈탈 털릴 것 같은…….”
막시민은 진짜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그때 이스핀이 쥐고 있던 냅킨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군지 얘기해볼까. 난 말이야, 중부의 린베르크 출신이야. 어딘지 알아? 어쨌든 아버지는 양봉을 하시는데 난 벌이라면 진짜 질색이라서, 아버지를 후원해 주시던 슈니발트 백작을 섬기게 됐어. 지금은 그분의 명으로 권총들을 찾고 있는 거고. 그분이 돕고 싶어 하는 어떤 높은 분이 그걸 필요로 하신다는데, 난 그런 사정까지는 잘 몰라. 다행히도 나한테는 프시키를 다루는 재주가 좀 있어. 그래서 프시키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여러 가지를 할 수가 있지. 그때처럼 술집에 가벼운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뭐 또 많아.
하지만 탐정은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권총을 찾아냈다는 너한테 관심이 가서 네냐플까지 갔던 거야. 소문만으로는 제법 똑똑할 것 같았거든. 뭐 지금은 의견이 반반이긴 한데.”
이렇게 연달아 말해버리니 나가려다가도 얼떨결에 다 듣기 마련이고, 그러고 나니 물론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게 다 요령인 줄 빤히 알지만 일단은 물어보기로 했다.
“그 권총들은 본래 누구 건데?”
“문제의 높으신 분. 처음엔 그분이 친구나 친척들한테 선물로 보냈던 거래. 그런데 다시 되찾아야 할 이유가 생겼나 봐. 위험한 문제가 있다나? 하여튼 연락을 하니까 선물을 고스란히 갖고 있던 사람들은 쉽사리 돌려주었지만 세월이 흘렀다보니 다른 사람한테 줬거나, 팔아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도둑맞았거나, 그런 경우도 있었지 않겠어? 그래서 그렇게 흩어진 것들을 찾으러 다니고 있는 거지.”
“그런 식이면 대체 몇 개나 찾아야 하는데?”
“넌, 음, 다섯 자루만 도와주면 돼.”
막시민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까는 권총 한 자루만 찾으면 될 것처럼 말하더니 은근슬쩍 네 자루가 불어나네?”
“아, 다섯 자루가 세트거든. 같은 세공사가 만든 거라서. 아참, 이거.”
불리하다 싶을 때 화제를 돌리는 데도 능숙했다. 이스핀은 가방에서 손바닥 정도 크기의 상자를 꺼내어 테이블에 놓았다.
“이거 생각나?”
붓꽃 문양이 새겨진 참나무 상자였다. 막시민은 금세 알아보았다. 이스핀이 상자 뚜껑을 열자 황금으로 지은 작은 궁전이 나타났다. 막시민은 놀라지도 않고 그걸 들여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어째서 네가 갖고 있냐?”
“좋은 값에 샀지.”
그건 막시민이 예전에 친구들한테 이끌려 갔던 벨 골짜기라는 곳에서 어느 귀족의 의뢰를 받아 찾아주었던 음악 상자였다. 하지만 보기만큼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다. 진짜 황금이 아니라 도금이었으니까. 그렇더라도 50노트짜리 음악상자는 제법 근사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충분히 소장 가치는 있었겠지만 막시민이 되찾았을 무렵에는 망가져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대단한 보수를 받지도 않고 넘겼다. 그런데 이스핀이 연 것을 보니 멀쩡해 보이는데다 금칠도 새로 해서 완전히 새것 같지 않은가?
“야, 그거 고친 거야?”
“그럼. 내가 사람만 갱생시키는 게 아니고…… 후훗, 들어봐.”
이스핀은 음악상자 오른쪽의 버튼을 슬쩍 밀었다. 그러자 맑은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50노트답게 하나의 악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부한 소리였다. 주방 쪽에서 쉬고 있던 할머니가 달려와 탄성을 올렸다.
“아, 정말 아름답네요!”
음악은 몇 분 간 작은 식당 안을 울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앞치마를 두른 채 나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작고 빨간 새〉라는 북부 민요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가락인 데다 은은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어쩐지 아주 길었던 이야기가 막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스핀과는 쌓은 추억은커녕 죽이니 살리니 한 사연밖에 없는 사이인데 뜬금없이 이런 걸 같이 듣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진 막시민은 코를 긁어대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피아니스트처럼 근사하게 건반을 미끄러뜨리며 곡이 끝나자 노부부가 갈채를 보냈다. 할머니가 상기된 얼굴로 물어왔다.
“정말 멋진 선물이네요. 틀림없이 신사분께서 아름다운 숙녀께 청혼을 하시고자 준비하신 거겠지요?”
엉뚱한 상상력에 당황한 막시민이 ‘아니 지금 무슨 헛소리를’이라는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이스핀이 턱을 괴고 할머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역시 그간 품고 계시던 호감을 전하시고자…….”
“뭐 그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스핀은 갑자기 막시민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선배, 내가 고용해도 될까?”
“…….”
말뜻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노부부는 기대에 차서 막시민의 입을 바라봤다. 그들이 보기에는 틀림없는 프러포즈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긍정이든 부정이든,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끈다는 건 프러포즈가 실패했다는 뜻이고, 어쩐지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노부부가 주방으로 사라지고도 한참 뒤, 막시민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고용이든 계약이든 하려면 서로에게 솔직해야지, 숨기는 게 있고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냐?”
이스핀은 김빠졌다는 듯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렇지.”
“그런데 아까 네가 한 말. 그 양봉 어쩌고 하는 얘기 말이야.”
“응, 그거 뭐?”
“하나도 안 믿어지거든.”
“…….”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랐지만 막시민은 침착하게 이스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도 직감이 발달한 부류인가? 하지만 대책 없이 바로 간파당할 정도로 그렇게 허술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스핀은 갑자기 양팔을 펼치며 빠른 말투로 말했다.
“그래, 잘 알아봤네. 다 헛소리였어. 사실 난 마법 왕국의 공주인데 못된 마법사에게 나의 소중한 마법 권총들을 다 도둑맞았어. 그래서 잠들었다가 천 년 만에 깨어나 보니 왕국도 없어졌고 이런 꼴로 혼자 남의 나라를 떠돌게 된 거야. 그걸 되찾아야만 공주로 되돌아갈 수가 있어. 그러니까 나 좀 도와달라고.”
막시민은 그런 말을 하는 이스핀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팔짱을 끼면서 몸을 의자에 기대더니 말했다.
“역시 왕자는 아니었군.”
“야, 넌 지금 그걸…….”
“그런데 왕국을 잃었어도 제법 능력이 넘치네. 강 위를 떠가는 배로 선물도 퍼붓고.”
“…….”
둘의 눈이 마주쳤다. 떠보듯이, 또는 진위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스핀은 살짝 딴전을 피웠다가, 어깨를 움츠렸다가, 결국 막시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알았니? 나 노력 많이 했거든?”
막시민의 표정은 복잡했다. 감사 인사를 하기도 그렇고, 화를 내기도 그렇고, 왜 그랬느냐고 따지기도 그렇고, 난감한 순간이 많긴 했지만 결국 받은 입장이니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막시민은 몇 번인가 말을 하려다가 말기를 반복한 끝에 결국 말했다.
“야, 넌…… 선물에 이름이란 걸 써서 보내거나, 직접 얼굴을 보며 건네주면 어떻게 되기라도 하냐?”
“글쎄. 너나 나나 신분을 숨기고 도망치는 입장에서 좋은 생각 같진 않았지.”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말문이 막힌 막시민은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 언저리를 문질러댔다.
“넌 돈을…… 왜 쓸데없는 데 막 써대는 거야?”
“왜 쓸데가 없는데? 양털 담요가 따뜻하지 않았니? 저녁 식사가 맛이 없었어?”
이스핀이라고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날 심부름값을 두둑이 주고 고용했던 공물선 사환이 묻지 않은 그쪽 배의 사정까지 전해주는 바람에 너무 웃겨서 계속 하게 됐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평판이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소식도 제법 재미가 있었고.
“덕택에 오해를 너무 많이 받아서 자아를 잃어버릴 지경이거든, 재치와 배려가 넘치는 품격 높으신 귀부인?”
“의자 위에서 떨고 있는 게 불쌍해서 선물 좀 보냈는데 과대 해석이 지나치시네요.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플레상스 경?”
둘 다 말할 때는 뻔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쳐다봐 놓고는 곧 소름 끼친다는 것처럼 몸을 약간 젖히며 뒤로 물러앉았다. 이윽고 막시민이 말했다.
“야, 알았는데 어쨌든…… 넌 나한테 그런 공을 들일 가치가 있어 보이냐? 난 마법 왕국의 사정에 개입할 재주 같은 거 없다. 네냐플에 다니긴 하지만 유급 이 년 차에 조만간 퇴학 예정이라고.”
“괜찮아. 너한테 마법은 기대 안 해. 평소처럼 추리력을 써.”
“권총을 훔쳐간 놈이 마법사라며?”
“아, 그건 뭐, 괜찮아. 걔도 천 년쯤 자고 일어나 보니 그냥 평범한 인간 됐나 보더라.”
“그럼 가서 권총 좀 돌려달라고 상식적으로 부탁해보면 안 되냐?”
“그렇게는 안 돼. 지금은 걔가 갖고 있지도 않거든. 다 잃어버렸다나 봐.”
“야, 너…… 지금 무대 뒤에서 쪽대본 수정하냐?”
막시민은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들어 넘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 머리에 손가락을 쑤셔넣고 문지른 끝에 말했다.
“근데 아무리 수정을 해도 전혀 몰입이 안 되네. 왜인지 아냐? 내가 무대나 대본 같은 거랑은 아주 거리가 먼 인간이긴 한데 옆에서 구경해 본 적은 있어서 그런가 어쩐지 이유를 알 것 같네. 실패하는 대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있거든.”
이스핀은 왜냐고 묻는 대신 눈썹만 올렸다. 막시민이 말을 맺었다.
“관객을 우습게 봐서야.”
“관객이 누군데?”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