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6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62화(62/143)
62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23)
그와 동시에 이스핀의 검이 소파 커버를 찢었다. 커버에서 해방된 남자가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저, 저는 저 여자와 한패가 아닙니다! 오늘 처음 봤어요!”
“양탄자에 말아뒀더니 예의가 생겼네. 청어를 절여두면 파리가 생기는 원리인가.”
말투가 존대로 바뀐 것에 대한 얘기였겠지만 이스핀은 순간 웃어버릴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남자가 계속 말했다.
“저는, 그러니까 그냥, 아래층에서 잠이나 자려 한 것뿐인데 저 여자가 어젯밤에 갑자기 들어와서 멋대로 2층에 올라갔지만, 내 집도 아니니까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남자는 조금 전에 계단 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 되어 도망가려다가 붙잡힌 터라 태도가 처음과 사뭇 달랐다.
그는 횡설수설하면서도 자기는 ‘제레미 드 플레상스 경’에게 선금을 주고 작은 일을 부탁했는데 플레상스 경이 갑자기 잠적했기 때문에 평범하게 돈 될 만한 것을 집어갈 작 정으로 들어왔을 뿐임을 열심히 변명했다. 물론 자신의 경솔한 판단과 불법적인 행동과 무모한 도주 시도와 하여튼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적당히 듣고 있던 막시민은 ‘선금을 받고 해결해주기로 한’이라는 부분에서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제레미 드 플레상스 경도 탐정 비슷한 일을 했었다는 거야?
그러는 동안 옆의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는데 입이 틀어 막힌 부분을 빼고라도 너무 느긋한 것 같아 수상쩍었다.
“……그러니까 살려서 보내주신다면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잘 들었고, 그쪽 의견은 어때?”
막시민이 크라바트로 묶인 여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여자는 물론 대꾸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것처럼 입가를 움직였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였으므로 섣불리 입을 열게 해줄 수는 없었다. 막시민이 다시 말했다.
“자, 너는 이 남자와 한패가 아니다. 맞으면 눈을 세 번 깜빡이고, 틀리면 어깨춤을 춘다.”
여자는 사나운 눈빛으로 막시민을 올려다봤지만 이윽고 눈을 세 번 감았다가 떴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좋아, 다음. 너는 플레상스 경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아니면 죽여버리고 싶었다. 도움, 오른쪽 어깨춤, 죽여버리기, 왼쪽 어깨춤.”
꼼짝없이 어깨춤을 춰야 하는 상황이 되자 여자는 무척 신경질이 나 보였지만 어쨌든 노력을 했다. 양쪽 어깨를 다 움직였던 것이다. 막시민은 의아한 것처럼 눈썹을 올려 보였다.
“아, 그래? 그것참 희한하군.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거절하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는 건가? 죽어준다는 것으로 네게 도움이 될 예정이었다는 건가?
젠장, 질문이 잘못됐네. 어깨춤만 부르는 질문을 하고 말았네. 그냥 바이올린이나 켜주는 건데.”
그런 소리를 하는 내내 막시민은 조금도 웃지 않았지만 이스핀은 그만 참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소리를 들은 막시민이 흘끔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제 웃음이 좀 나냐?”
이스핀은 웃음을 그쳤지만 조금 전의 분노가 어느새 흐려졌음을 깨달았다. 대단히 미묘한 방식의 도움이었다.
그간 이스핀의 성품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주로 피하거나, 드물게 정면 대결을 하려 했다. 이렇게 흘려 보내려 했던 사람도, 그리고 그걸 성공했던 사람도 없었다.
“자, 그럼 얘기를 분명히 해보자고. 당신은 여기 들어올 때 제레미 드 플레상스 경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막시민은 소파 옆 테이블에서 잼과 나이프를 집었다. 여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병을 열고 나이프를 넣어 잼을 푹 뜨더니 마룻바닥에 단순한 그림을 그렸다.
0, 그리고 X.
여자는 턱을 움직여 O를 선택했다.
“그래서 플레상스 경이 돌아오도록 기다릴 작정이었어.”
X.
“그럼, 플레상스 경이 남긴 물건이나 서류나, 하여튼 값나가는 것을 훔쳐서 도망칠 생각이었어.”
X.
“플레상스 경에게 뭔가 메시지를 남기려는 생각이었어. 경고라든가.”
X.
막시민은 약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 말했다.
“그것도 아니야? 그럼 플레상스 경의 손자인지 뭔지 하는 놈이 오늘 나타날 줄 알고서 그놈한테 할아버지가 실종됐는데 정신 좀 차리라고 마법 한 방 먹여주기 위해 기다렸나?”
O.
“뭐?”
막시민은 당황한 표정을 했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뭔 소리야. 내가 오늘 여기 도착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당신이 어떻게 알아?”
옆에서 이스핀이 말했다.
“오늘인 줄 몰랐더라도 미리 들어와 기다릴 수는 있잖아.”
“저쪽의 청어절임은 여자가 어젯밤에 들어왔다고 하던데? 청어가 거짓말을 했나?”
막시민이 남자 쪽을 흘끗 보자 남자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사실이에요! 진짜예요! 한 패도 아닌데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이스핀이 천천히 다가가 검을 도로 뽑았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들이밀더니 말했다.
“조금 전, 넌 내 목숨을 노렸어. 그러므로 당장 머리를 날려버려야 하지만 누구의 명령인지 알아내어야 해서 살려둔 거야. 너 같은 소모품은 끝도 없이 생겨나니까 한 명쯤 더 있으나 없으나 나한테 크게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네가 입을 안 열면, 목 한 번 긋고 끝나는 거야. 그건 명백한 내 권리지.”
그야 대공위 후계자를 위협한 자는 즉결 처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막시민은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이스핀이 평범한 가문 출신이 아닐 거라는 추측만은 강해졌다. 저런 말은 지배계급이 아니고는 내뱉지 못한다.
“입 벌려봐.”
여자가 망설이다가 입을 조금 열자 이스핀은 검 끝을 입안에 집어넣었다가 허리띠를 감아 끄집어냈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매끄럽게, 입가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해냈다.
마침내 입이 자유로워진 여자는 긴장으로 약간 떨면서 이스핀을 올려다봤다. 이스핀은 허리띠를 한쪽으로 밀어놓은 다음 검 끝을 청어절임을 둘둘 만 양탄자에 닦아 남자를 쓸데없이 긴장하게 만들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말로 대답하는데, 대신 눈은 내 검 끝을 잘 봐. 난 이걸로 네 얼굴에 묘비명도 새겨줄 수 있어.”
농담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깨끗이 닦인 검 끝이 여자의 이마 아래, 미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검 끝을 뚫어져라 보다가 시선을 막시민에게, 다시 이스핀에게 옮기더니 말했다.
“많이 아프네요.”
이미 턱 언저리가 상당히 부어오른 상태였다. 이스핀이 태연히 물었다.
“왜 아프기만 한 줄 알아?”
“박살내려다가 참았겠죠. 말을 시켜야 하니까.”
여자는 턱을 조금 움직여보더니 말했다.
“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쓸모 있게 굴어야 할 것 같네요. 저는 데보라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어 기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은 곧 다 죽게 될 겁니다. 나를 포함해서.”
4. 플레상스 경의 손님들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 이 집 지붕이 곧 무너질 예정인가보지? 아니면 위층 침대 머리맡에 램프라도 비스듬히 걸쳐놓고 왔나?”
“그런 것 말고도 방법은 많지요. 그분은 사람을 죽일 때 심혈을 기울이시니 틀림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죽게 될 거예요. 제레미 드 플레상스 경이 그분이 죽이라고 한 자를 도우려다가 결국 같은 꼴이 된 것처럼.”
막시민은 이스핀을 흘끗 봤다. 이스핀은 검으로 데보라를 겨누느라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직 데보라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시민은 네냐플 교수들이 가방 속에 넣어 준 플레상스 경의 설정을 기억했다.
막시밀리앵 드 플레상스에게는 할아버지인 제레미 드 플레상스가 있다. 그는 본래 오를란느 귀족이지만 오랫동안 켈티카에서 살아와 아노마라드 작위가 없는데도 ‘경’으로 불린다. 하인 하나를 두고 혼자 살며 가끔 집을 비울 때는 하인을 고향으로 보낸다.
집 외에 별다른 재산은 없지만 다른 일로 제법 수입이 있는 편이다. 고상하고 깔끔한, 고급스러운 취향의 신사이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종종 기꺼이 돕곤 한다…….
막시민은 의혹을 겉으로 표현하는 대신 약간의 비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난 창의력이 없어서 그런가 세 명을 동시에 죽일 더 좋은 방법이 달리 생각이 안 나네. 아니지, 청어절임도 포함인가. 야, 넌 죽는 거야, 안 죽는 거야? 빨리 노선을 분명히 하라고.”
어느새 청어절임이 돼버린 남자는 데보라가 한 말에 흠칫 놀라고 있다가 막시민이 다그치자 더욱 당황했다.
“제, 제가 왜요? 전 안 죽고 싶은데…….”
“그래? 그럼 3 대 1이네. 이걸로 죽는 얘기는 기각한다. 죽고 싶으면 데보라 너 혼자 죽든가 하고,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증명된 사실이야? 네가 봤어?”
데보라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말했다.
“안 봤지만 살아 있을 리 없죠. 만약 살아 있다면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도망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막시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우리 할아버지인데 당연하지. 넌 그분의 손자인 나도 죽이지 못했잖아. 그런 실력으로 감히 누굴 죽인다는 거야?”
빌린 이름의 조상 따위 신경 안 쓴다더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우리 할아버지’가 돼버렸다. 데보라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이봐요. 잘못 봤어요. 난 당신들을 죽이러 온 게 아니에요.”
“아닌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마법을 퍼붓나?”
“그건…….”
데보라는 이스핀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눈에 독특한 빛이 어렸다. 두려움과 감탄, 질투와 기대가 뒤섞인.
“살아남을 만한 자들인지 알고 싶어서.”
이스핀은 무표정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난 그런 시험이 딱 질색이야.”
“내가 썼던 건 사람을 죽이는 주문은 아니었어요. 잘됐다면 내가 당신들을 나처럼 묶어놓고 대화하게 됐겠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진 않았네요.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살아남을 만한 힘이 없으면 그냥 내가 죽여버리고 가려 했어요. 그게 더 관대한 처사이기 때문이죠. 나를 제압할 힘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을 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모르고 죽으나 알고 죽으나의 차이밖에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그건 뭐였죠? 마법은 아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