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6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64화(64/143)
64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25)
잠시 후, 거실에는 다섯 명의 포로가 생겼고 막시민과 이스핀은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용건을 물어보니 이들 셋 역시 플레상스 경에게 뭔가를 맡겨놨다는데 누군가는 사건을, 누군가는 선금을, 누군가는 잔디 긁는 갈퀴와 조리용 소금 10온스라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도 어렵고, 믿는다 쳐도 어느 것이든 남의 집에 구둣발로 쳐들어올 사정은 아니라고 생각한 막시민이 말했다.
“무슨 소린지는 알겠지만 믿고 안 믿고는 내 마음이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빈집 문 따고 막 쳐들어오시면 안 되죠.
이 모두는 대도시에서 사는 조심성 많은 집주인으로서 침입자의 선의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정당방위라는 것을 여러분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정……당방위라고? 하!”
“무, 문은 열려 있었어!”
“열려 있었던 건 아니고 자물쇠가 망가져서 고치려고 잠시 떼어놨을 뿐입니다. 하지만 자물쇠가 잠겨 있었든 아니든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럼 저 사람들은 뭐야?”
“당신들과 같은 행동을 하다가 같은 처분을 받은…… 아, 빈집털이 주제에 반말은 그만 닥치면 안 될까? 내가 인내심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뒤통수 한 대씩 때리고 싶네.”
남자들은 제법 나이가 많았으므로 새파랗게 젊은 상대가 그렇게 말하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지만 그래봤자 묶인 처지였다.
하지만 이스핀과 막시민도 본의 아니게 다섯 명이나 묶어놓고 보니 골치가 아팠다. 이자들을 어쩐다?
둘은 눈짓으로 궁리를 하다가 아무래도 아까처럼 오해가 발생할 것 같아 계단 위로 올라갔다. 이스핀이 아래층을 힐끔대며 작게 말했다.
“우리가 한 거 이거 범죄지?”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묻지 좀 말아줄래?”
둘은 눈썹을 동시에 찡그렸다. 이스핀이 다시 말했다.
“저 사람들을 다 어쩐다. 여기서 보니까 거실이 아주 꽉 찼네.”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 우리가 간수도 아니고.”
“나도 둘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 했는데 다섯 명이 되니까 부담스럽다.”
“저대로 놔두고 이따가 잠이라도 자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잠은 나중 일이고 슬슬 배가 고픈데 어쩌지? 우리끼리 먹으러 나갔다 오기도 그렇고, 이 사람들한테 저녁을 해 먹이는 것도 이상하고.”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양심 없게…….”
배고프다는 말이 뭔가를 건드려서 막시민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공물선의 귀공자 막시밀리앵 드 플레상스 경으로 돌아가 신뢰감 넘치는 저음과 상류계급다운 발음을 버무려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우리 모두가 처한 이 불운한 상황에는 아무래도 약간의 오해가 개재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겠고, 나 또한 여러분께 몇 가지 점에서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우선 나는 물론 플레상스 경의 손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 뵈었을 뿐이라 그분을 잘 안다고 한다면 성실하지 못한 주장이 되겠지요.
또한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여행 도중에 켈티카에 방문하게 되면 할아버지께서 잘 지내고 계신가 살펴보라는 어머니의 충고가 있어서 잠시 들여다보려던 것뿐으로, 그 결과 하필 운명의 장난처럼 여러분과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플레상스 경에게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점은 충분히 납득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게는 그걸 이해할 능력도, 들어줄 재주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첫 만남 당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약간의 충돌이 벌어졌지만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 온 쪽이 더 큰 잘못인가, 들어온 사람을 위협한 쪽이 더 큰 잘못인가 하는 문제는 따지기가 까다롭거니와 더구나 저희 할아버지가 진짜로 실종됐다면, 그 집에 멋대로 침입한 당신들은 집주인의 실종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로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켈티카 치안대가 그런 판단을 한 번 내리고 난 후에는 비록 제 의견이 그와 다르더라도 상황을 바꾸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여러분과 제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더라도 의견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큰 문제를 켈티카 치안대를 불러 함께 따져보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일까요? 이 점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막시민의 짧은 연설은 늘 그렇듯 사실의 교묘한 왜곡을 매끄럽게 막 굴러가는 말재주와 대충 섞은 것이었지만 괜찮은 옷차림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상승효과를 이루는 바람에 제법 설득력 있게 들렸다. 비록 친구들이 들었다면 웃음을 참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또한 막시민이 잘 몰랐던 사실도 도움을 주었다. 켈티카의 치안대는 작은 사건에서 복잡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귀찮아했고, 헷갈린다 싶으면 집주인의 편을 들었으며, 집주인이 귀족일 때는 더더욱 그랬다.
플레상스 경은 귀족인지 아닌지 몰라도 어쨌든 ‘경’으로 불리니 치안대가 손을 들어주기 좋은 인물일 것이다.
켈티카에 살고 있으니만큼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커튼 조각에 묶여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체구가 자그마하고 통통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 말 잘하네. 그렇지만 이 손은 풀어주고 말을 해야 당신 말이 믿어질 것 아니오?”
셋은 곧 풀려났고, 그들은 약간의 토론 끝에 오늘 있었던 일은 플레상스 경 뒷마당에 있다는 감자 움과 대강 맞바꿔서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그중 한 명이 풀려나지 못한 나머지 둘의 거취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데보라가 “우린 그럴 법한 사람”이라고 대꾸해서 더이상의 논란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해결되었나 싶었을 때 이름이 베네트라는 처음의 통통한 남자가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당신 스스로 아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이 말하는 방식이 당신 할아버지하고 아주 많이 비슷하거든요? 난 말이야, 그 사람을 제법 알아요. 우리 아버지가 일을 세 번이나 맡겼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마법처럼 척척 일을 해결하고 그랬어. 그런 의미에서 혹시 내가 의뢰했던 사건에 대해 한번 들어보시면…….”
막시민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아니, 안 됩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전 사건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갈 건지 아닌지나 빨리 말하세요.”
“물론 나갈 건데…….”
막시민은 친절히 남자를 부축해 일으켜 현관으로 에스코트한 다음 기꺼이 문까지 열어주고 내쫓았다. 그리고 나머지 둘도 주섬주섬 내보낸 다음 문을 닫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이스핀을 봤다.
“우리 아까 자물쇠 주워 왔던가?”
“아니.”
막시민은 나가서 자물쇠를, 그러니까 그것의 잔해를 주워서 돌아왔지만 본래도 낡았던 것을 발차기로 분해해버리는 바람에 쉽게 고쳐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막시민은 이런 문제에는 약간의 재주도 없었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혹시나 하고 이스핀을 불렀다.
“너 이런 거 고칠 줄 알아?”
계단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서 있던 이스핀은 자물쇠를 건너다보기만 하고는 자신만만한 자세로 제 무릎을 톡톡 쳐 보였다.
“아니, 부술 줄만 아는데.”
“둘 다 아주 쓸모가 넘치네.”
자물쇠의 잔해를 테이블 구석에 놓고 막시민은 생각에 잠겼다. 이 집에서 오늘 하룻밤이라도 자도 되는 것일까? 잠깐 사이에 빚쟁이인지 뭔지가 다섯 명이나 밀려드는 이런 집에서 자물쇠도 없이 지내야 하다니.
무엇보다 데보라의 말을 믿는다면 빚쟁이보다 더한 자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고…….
“배고파.”
고개를 든 막시민은 어느새 세 번째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괸 이스핀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이스핀이 커다란 눈을 깜빡여 보였다. 마치 주인한테 먹을 것 좀 내놔보라는 고양이처럼.
막시민은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하려 했다.
“야, 난들 여기서…… 여기가 내 집도 아니고…….”
하지만 조금 전까지 내가 집주인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으므로 어딘가 어색한 주장이 되었다. 그때 옆에서 조그맣게 웅얼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어절임이었다.
“저 식재료 어디 있는지 잘 아는데…….”
“자랑이다.”
막시민이 뇌까리는데 데보라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런 도움이라면 제가 낫지 않을까요? 이미 이렇게 됐는데?”
그러면서 손에 든 크라바트를 손가락에 한 바퀴 휘감았다. 그걸 본 이스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어떻게 풀었지?”
“물론 마법이랍니다. 신사분의 예쁜 크라바트를 찢으면 곤란하잖아요?”
데보라가 막시민에게 한 발짝 다가서서 크라바트를 건넸다. 조금 전까지 세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데보라를 감시하지 못했으니 충분히 일어나고 남을 일이었지만, 그렇다면 데보라는 그 틈을 타고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기다린 것을 보면 역시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한 걸까?
막시민은 그런 생각을 내색하지 않은 채 크라바트를 주머니에 쑤셔 박고는 말했다.
“뭘 만들든 너희도 같이 먹어야 된다는 것만 잊지 말고.”
“마법사한테는 독약보다 나은 수단이 많답니다.”
데보라는 가벼운 손짓만으로 청어절임을 양탄자에서 해방시키더니 부엌 쪽을 가리켰다. 청어절임은 고개를 젓고 바닥에 있는 문짝을 가리켰다.
저거 식료품 창고 맞느냐, 그럼 지하 납골당이겠냐, 그런 얘기를 쑥덕이며 둘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뜻밖으로 먹을 만해 보이는 햄 덩어리와 양파 자루, 밀가루, 치즈 따위를 꺼내다 놓고 프라이팬과 접시를 누가 닦을지 실랑이하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아까보다는 점잖은 접근이었지만, 똑같은 용건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막시민은 누가 냄새가 고약한 요리를 턱밑에 들이민 듯한 표정이 됐다. 이스핀이 계단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나가서 쫓아버릴까?”
“아니, 넌 절대로 됐어. 그냥 가만히 있어.”
막시민은 현관으로 나가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절반 정도 공물선의 신사로 되돌리고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나타난 사람은 얼굴 가득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는 베네트였다. 저절로 눈썹을 찌푸린 막시민이 물었다.
“왜 또 오신 건데요?”
“그게 말이야, 나한테 좋은 제안이 있거든요? 아, 잠깐, 잠깐만. 일단 들어나 봐요. 잠깐이면 돼! 여기 있으면 앞으로 며칠이고 나 같은 인간들이 몰려와 귀찮게 굴 거 아뇨? 내가 그걸 해결할 방법을 갖고 왔거든? 이걸 봐봐. 일단 이거 받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