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66)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66화(66/143)
66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27)
오스틀리 교수를 비롯한 네냐플의 교수들은 그날 밤 심볼리온에서 온 마법사들을 만나야 했다. 무척 재미없는 회의가 될 게 뻔하니 연구 보조 학생에 불과한 란지에가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간다 해도 실제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실에 딸린 보조실에서 다른 조교들과 저녁이나 먹고 잡담이나 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조교들 역시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아늑함이라고는 토끼똥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토끼굴에서 차가운 샌드위치나 먹으며 여기저기 앉아 있기보다 이왕이면 따뜻한 음식도 먹고 푹신한 소파에서 뒹굴다가 오는 편이 훨씬 좋았으므로 모두 기꺼이 가는 쪽을 선택했다. 어차피 교수와 한방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교수들과 조교들이 자리를 비우게 된 토끼굴은 유령이라도 나올 법한 폐허로 보였다. 해가 들 때는 고대의 발라드에 나올 법한 신비로운 장소로 상상해볼 수도 있겠지만 사람 한 명 없고 해마 저 저문 겨울밤에 혼자 이곳에서 세 시간을 보내려는 인간의 머릿속은 네냐플 교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자 란지에는 스노리를 내려다보았다. 스노리도 란지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란지에는 개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넌 좀 괜찮지.”
이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더니 말했다.
“편하게 있고 싶지?”
그러면서 목줄을 풀어 주었다. 오스틀리 교수가 나가며 토끼굴 전체에 걸린 보안 마법을 활성화했을 테니 누군가가 갑자기 안에 들어올 염려는 없었다. 개가 멋대로 튀어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늑대와 셰퍼드 사이에서 태어난 스노리는 겉모습이 늑대에 가까운데다 눈매가 매서워서 먼발치에서 마주쳐도 겁에 질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오스틀리 교수도 늘 목줄을 매어 산책을 다녔다.
란지에도 처음에는 이 개 곁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보니 스노리는 마치 생각 많은 사람 같은 개였다.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도 않았고, 쉽게 공격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스노리는 자유로워지자 멋대로 내부를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란지에는 실험대 앞으로 돌아갔다.
현재 교수들의 연구는 모두 멈춘 상태여서 다른 조교들은 아무도 실험 같은 것을 진행하지 않았다. 네냐플에서 나온 물건들을 정화하는 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하지만 란지에는 조교도 아니고 마법도 잘 모르니 네냐플에 가서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사실상 토끼굴의 상근 학생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상근이라 해서 크게 할 일이 있지는 않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 교수나 조교들이 누가 언제 왔다 갔는지 따위를 물어볼 때 대답해주면 되었다.
오래 머물다 보니 토끼굴에 설치된 이런저런 주문, 그리고 이곳에 뒤죽박죽으로 놓인 물건들 중 어떤 것이 위험하고 어떤 것이 별것 아닌 잡동사니인지도 잘 알게 되었다.
불평불만이 일상이 되고도 남을 이런 상황에서도 란지에는 잡담을 즐기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하던 연구를 계속 하는 이유도 틀림없이 대화를 피하기가 편리해서일 것이다.
실험대 위에는 필멸의 땅에서 가져온 1507번 유물이 놓여 있었다. 오스틀리 교수가 관심을 갖는 기계 형태의 유물에 한해 붙이는 번호였다.
1507번의 형태는 서른여덟 개의 조각을 대강 맞춰본 결과 권총을 길게 늘린 것처럼 생겨서 ‘장총’이라고 부르면 알맞을 듯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말은 없지만.
란지에도 오스틀리 교수의 연구실에 있으면서 가나폴리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기계를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계에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정체를 모르는 구성품이 있었던 모양으로, 모든 유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형태가 제법 훌륭하게 남아 있는 경우에도 결국 작동시킬 방법이 없었다.
오스틀리 교수의 가장 큰 연구 목 표는 이러한 유물들을 비교 분석해 문제의 구성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권총은 그나마 드물게 일찌감치 작동 원리가 규명된 경우였고 그래서 예로부터 세공사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것도 제대로 발사시킬 수는 없었다. 고작 향수를 뿌리거나 가벼운 장난감이 튀어나오게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란지에는 다시 핀셋을 들고 유물을 한 조각씩 배열하는 일에 몰두했다. 배열이 끝나면 스케치를 하게 될 것이다. 스노리는 여전히 한번 짖지도 않고 토끼굴 곳곳을 탐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가 지났을 무렵,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아치 형태의 입구 너머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실내는 교수들이 걸어놓은 온도 조절 마법 덕택에 춥지는 않았지만 너무 고요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졌다. 란지에는 그런 기분을 떨치려 노력하지 않았다.
고요는 그에게 자신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그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그건 기묘하게 평화로운 느낌이기도 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손을 내리고 조용하게, 꼼짝도 하지 않고 예배당의 돌의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손에서 힘이 빠지며 오른손에 쥔 핀 셋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툭.
그와 함께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하고 뭔가를 미는 듯한 소리였다. 돌바닥에 배를 쓸며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단 한 번 나고 다시 나지 않자 란지에는 개를 불렀다.
“스노리?”
대답이 없었다. 란지에는 일어났다. 개가 돌아다니다가 어딘가에 갇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끼굴에는 지하가 있었다. 입구는 막아 놓았다지만 이름처럼 어딘가에 다른 출입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노리!”
대답이 없었다. 란지에는 개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예배당으로 내려왔다. 예배당을 한 바퀴 돌았지만 스노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구획들을 둘러봐야 할 듯했다. 개를 찾아낼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자신이 목줄을 풀어주었으므로.
“스노리!”
작은 아치들을 통과하고 상자들을 빙빙 돌아가며 동쪽 구획 맨 끄트머리까지 갔지만 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불러도 대답 또한 없었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서쪽 구획을 살펴보기 위해 반대쪽으로 돌아 나와 예배당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어느 상자더미 뒤에서 마치 유령처럼 스노리가 나타났다.
“아, 있었구나.”
반가운 나머지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스노리가 다가오더니 란지에의 옷깃을 물고 옆 구획으로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오라는 것처럼. 란지에는 당황한 채로 몇 걸음 끌려다가다 개를 붙들며 물었다.
“왜 그래?”
그리고 흠칫 놀랐다. 스노리는 떨고 있었다. 뭔가에 놀랐을까? 란지에는 개를 달랠 셈으로 바닥에 앉았다. 그때였다.
스스스스스…….
갑자기 소리가 밀어닥쳤다. 조금 전과는 달랐다. 사방에서, 마치 잔물결이 밀려들듯 소리의 물결이 밀려들어 굉음에 가깝게 커졌다. 란지에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본능적인 공포를 떨치고 소음 속에서 맑은 생각을 해내기까지는 잠깐 시간이 걸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판단력을 되찾자마자 그는 빠르게 침착해다. 그는 네냐플에 들어오기 전의 경험 때문인지 마법의 초현실적인 면모에 잘 경도되지 않았다. 마법은 자연처럼 단지 현상이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게 보일 뿐이다.
이곳에 걸린 보안 마법은 레오멘티스 교수의 것이다. 전 대륙에서 이걸 깨뜨릴 마법사는 사실상 없다. 즉,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뭔가가 오작동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개가 뭔가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주문을 활성화하거나 비활성화할 수 있도록 스위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란지에가 알기로는 입구, 그리고 둥근 창 아래쪽에 있었다. 그 외에 어딘가에 또 만들어두었을까? 그걸 개가 건드리기라도 했을까? 설마 교수들이 그렇게 허술하게 스위치를 내버려뒀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때 소음이 다시 썰물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란지에는 안도하는 대신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 소리가 사라져가는 방향을 감지했다. 서쪽 구획 중 하나, 교수들의 상자가 여럿 쌓여 있는 쪽이었다.
란지에는 내려가 상자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중 한 상자의 표면 전체에 미세한 금이 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오스틀리 교수의 것이었다.
상자를 열어서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필 맨 밑의 상자로, 위에 육중한 상자가 두 개나 쌓여 있었다.
물론 무게 때문에 금이 갔을 수도 있겠지만 나무로 된 상자에 이런 형태의 금이 간 모양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도자기 표면의 유약이 터져 생기는 유빙렬에 가까운 실금이었다.
란지에는 둥근 창 아래로 돌아갔다. 창 아래에는 임시로 만든 커다란 서랍장이 있었다. 네냐플에는 본래 훌륭한 가구가 많았지만 모든 물건을 정화를 거쳐야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서랍장 같은 가구에까지 낭비할 마력은 없었다.
란지에는 상근답게 이 안에 든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맨 밑 서랍을 열자 온갖 공구가 보였다. 그 속에서 길쭉한 못뽑이를 찾아내어 허리띠에 꽂았다. 이어 맨 위의 뚜껑을 젖히자 안에는 무슨 기준인가 싶을 정도로 가지각색의 물건들이 나란히 줄지어 놓여 있었다.
막대, 짧은 마법 지팡이, 장갑, 안경, 구슬, 펜, 나무 인형, 사슬, 책, 양피지 두루마리. 교수들이 급한 상황에서 사용 가능한 실용적 마법을 압축해놓은 물건들이었다. 물건의 종류는 각 교수의 취향을 반영했다.
란지에는 그중에서 무거운 것을 옮길 때 쓰는 거중(擧重) 마법을 넣 어둔 직각 형태의 쇠자를 집어 들고 상자 앞으로 돌아왔다.
옮기려는 상자에 자를 잠시 접촉시킨 채 기다리자 그 안에 든 마법이 활성화되며 금속 표면에 희미한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비록 자 안에 주문이 압축되어 있다지만 시전자의 집중도 필요했기에 란지에는 한참 동안 상자를 주시하고 있다가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손에 쥔 자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상자를 허공에 띄웠다.
상자는 느리게, 예배당 중심부를 가로질러 맞은편 구획으로 갔다. 내려놓을 때 더 고도의 주의가 필요했다. 안에 든 물건들을 파손시키면 곤란하다.
그런 식으로 두 개의 상자를 치우고 나자 이마에 땀이 맺히고 팔과 어깨가 뻐근하게 아팠다. 아마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팔에 너무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힘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소매로 땀을 닦아내고, 손목을 몇 번 흔들어 풀면서 문제의 상자로 다 가갔다. 못뽑이를 쥐고 뚜껑을 봉한 못을 하나씩 뜯어냈다. 이어 뚜껑을 치우고 안을 들여다본 란지에는 흠칫 놀랐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주로 개인 사물이었는데 겉상자와 똑같은 실금이 번져 있었고, 사방 벽으로 일제히 밀려나 있었다. 그런데 한가운데에 작고 납작한 청록색 상자 하나만이 아무런 변화도 없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이 상자가 뭐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