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67)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67화(67/143)
67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28)
란지에가 상자를 향해 막 손을 뻗었을 때였다.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컹! 컹컹!
예배당의 넓은 천장이 날카롭게 울리도록 짖으며 달려온 스노리가 란지에와 상자 사이로 뛰어들었다.
스노리는 란지에를 상자로부터 떼어놓으려 한 듯했지만, 개의 힘에 밀려 몸이 젖혀지며 란지에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중심을 잡으려고 부지불식간에 왼손을 바닥에 짚는 순간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 파르르 번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본래 왼손을 사용하지 못했다. 오스틀리 교수가 만들어준 장갑 덕택에 큰 힘을 쓰지 않아도 되는 조작은 가능해졌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을 견딜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흡…….”
간신히 눈을 뜨자 상자 너머의 벽에 흐릿한 검은 점이 나타나 있었다. 그건 마치 비현실적으로 벽 위에 떠 있는 그림 같았다. 찡그린 채로 쏘아보는 동안 점은 점점 커지고, 짙어지고, 두께와 질감을 띠었다. 그러더니 거무스레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상자를 향해 뻗어왔다.
“멀리 가. 어서.”
란지에는 개를 밀어내고 자신도 느리게 몸을 끌며 일어났다.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고 왼팔도 덜덜 떨렸다. 부러진 인형처럼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바르게 섰다. 그리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오른손은 멀쩡하다. 머릿속도. 눈과 입술에 힘을 주며 애써 또렷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판단력은 빠르게 돌아왔다. 인정하기에 괴로운 사실이었지만 인간성을 유지하기 힘든 순간에 빠졌던 몇 번의 경험 때문에 그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그리고 신체적 고통이 심할수록 명료하게 핵심을 짚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지키려면 나머지는 망설임 없이 내버려야 한다. 그 생각이 떠오르면 모든 것이 회색 돌덩이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조차도.
저 검은 점이 무엇이든, 레오멘티스 교수의 강력한 보안 마법을 뚫고 들어오려 하고 있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른다. 알아낼 방법도 없다. 막을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보안 마법에 강한 충격을 가해 시전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방법뿐이다. 마법사가 걸어놓은 채 거두지 않은 주문은 마법사의 정신과 약하게든 강하게든 연결되어 있으니까.
란지에는 청록색 상자를 뒷주머니에 넣고 허리띠에 끼워두었던 쇠자를 꺼내 들었다. 천천히 뒷걸음질치면서 쇠자를 이용해 상자를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힘주어 벽에 들이받았다.
콰쾅!
이미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보안 마법이 준 충격 때문인지 상자는 마치 폭발한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도 함께 박살나서 우박처럼 떨어져 굴렀다.
란지에는 상자 안에서 봤던 물건들 중 아주 중요한 물건은 없었다고 자의적 판단을 내렸다. 오스틀리 교수가 사랑하는 나사와 너트 컬렉션이 흩어져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납득해줄 것이다. 안 해주면…… 할 수 없지.
동시에 토끼굴 전체를 그물처럼 뒤덮은 보안 마법 전체에 진동이 번져갔다. 건물 전체가 속이 텅 빈 관처럼 한동안 울렸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그건 모를 일이다.
모르니까 한 번 더 하는 게 좋겠지.
가까운 상자를 아무것이나 택했다. 안에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든 말든 보안 마법이 침탈당한 이 상황과 비길 것은 아니었다.
상자를 띄워 한 개 더 박살냈을 때, 소음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희미하게 밀려오는 듯하다가 금세 소나기처럼 커지며 귓전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황하지도 않고 소음이 검은 점 쪽에서 오고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예상이 맞았다.
스며든 검은 연기는 흩어진 잡동사니 위로 낮게 퍼져 있었다. 뭔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찾는 것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란지에는 손을 뒤쪽으로 가져가 상자를 잡았다. 그리고 문득 기억해냈다. 이 안에 든 것을.
막시민의 권총이다. 그 초코시럽을 뿌린…… 초코는 아니긴 하지만.
그날의 우스꽝스러운 대화가 떠오르자 인간성 일부가 되살아나 집중을 흐트러뜨렸다. 투명한 그림자 같던 자신에게 중력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사이 팔의 통증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손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소음은 다시 사라졌다. 대신 여기저기에서 찰칵거리거나 탁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온갖 상자 속에서 나고 있었다. 수많은 물건들이 누군가가 흔들어대는 것처럼 요동치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뭔가가 폭발하는 건 아닐까?
란지에는 예배당 중심 쪽으로 물러나다가 문득 검은 연기를 보았다. 바닥에 깔려 있던 그것이 뭉쳐지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키보다도 더 커졌다. 하지만 형태나 윤곽은 없는 그저 덩어리였다. 그런데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것이 이 상자 속의 권총을 노리는 것이 맞는다면 이쪽으로 올 것이다.
다시 소음이 솟아오른다. 한층 커진 채로 밀려온다. 사방이 뱀으로 가득찬 것처럼, 마치 뱀 우리에 갇힌 것처럼 소음에 갇혔다. 란지에는 상자를 잡은 채 연기를 쏘아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두려움이 망가진 권총처럼 잘 작동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생각했다. 저것이 자신을 죽인다면, 그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은 뭘까.
보안 마법을 건드려서 교수들에게 신호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뒷걸음질로 물러나 원하는 위치로 갔다. 마름모꼴 무늬가 흐릿하게 남은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둥근 창 쪽을 보며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창 밑의 벽감 속에 수정 유리로 만든 레버 네 개가 잘 보였다.
유리 안에는 수은이 들어 있다. 평소에는 위험해서 손으로 잡아야 하는 물건에는 수은을 쓰지 않지만 지금은 급하니까, 그리고 교수나 조교들은 충분히 조심할 테니까 저런 재료를 썼을 것이다. 본래 수은은 마력을 매우 잘 머금는 물질이었다.
란지에는 레버 네 개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는 보안, 두 번째는 빛 조절, 세 번째는 온도 조절, 그리고 네 번째는…….
모험을 하기 전에는 시험을 해봐야 했다. 란지에는 허리띠에서 쇠자를 꺼내 레버 쪽을 가리킨 채 신경을 집중했다.
너무 세게 힘을 가하면 레버가 깨지고 수은이 흐르게 된다. 반면 레버 자체는 제법 묵직해서 손가락 한두 개로는 눌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을 때처럼 가볍게, 그러나 단호한 힘을 실어 눌러야 한다.
“…….”
마침내 목표로 했던 세 번째 레버가 툭 하고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낮은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뛰어나온 스노리가 뭔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컹!
란지에가 레버에 집중하는 사이 검은 연기는 어느새 서너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더니 천장에 닿도록 부풀어올랐다. 개가 연기를 붙들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건 연기로 가장한 실체였다.
늑대개인 스노리가 달려들어 밀치면 웬만한 사람은 서 있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 채로 조금 밀려나기만 하더니 스노리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졸랐다. 허공에 매달린 개가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다.
“…….”
란지에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이 개를 열렬히 사랑한 적은 없었다. 스노리는 물론 좋은 개였지만 어린시절의 괴로운 기억 때문에 개를 사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짐승을 괴롭히는 행동의 비열함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그때 그것이 란지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형태가 없는데도 그렇다는 것이 느껴졌다.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 란지에를 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눈이 불타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가 명령했다.
너는 두려움에 압도되리라고. 고대의 마법은 평범한 인간의 정신을 태워버리리라고.
하지만 그 존재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지금의 란지에는 공포를 사실상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도 초자연적인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해부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마법보다 인간 세계가 무한히 더 거대한 비밀이었다. 불가해한 존재란 아직 해석이 덜 된 것뿐이다. 계속해서 알아가면 될 일인데, 모른다고 두려워하겠는가?
란지에는 연기를 침착하게 쏘아보며, 왼손에 청록색 상자를 쥐고 내밀어 보였다.
“이걸 갖고 싶나?”
그러더니 상자를 마름모꼴 위로 던졌다. 검은 연기가 스노리를 던지듯 놓아버리고 작은 먹구름처럼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연기가 상자를 뒤덮었을 때 란지에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쇠자를 레버를 향해 뻗었다. 서서히…… 누른다.
네 번째 레버가 쑥 내려갔다. 동시에 검은 연기도, 상자도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란지에는 쇠자를 떨어뜨리고는 스노리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목덜미에 손을 넣어 맥박을 확인했다. 살아 있었다.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지만 무사했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면서 그제야 최면 같던 긴장 상태가 깨어졌다.
그는 어색한, 마치 통증을 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끝났어.”
그리고 왼손에 낀 장갑의 버클을 열고 틈새에 끼워놓은 권총을 꺼냈다. 검은 연기가 스노리를 붙들고 있을 때 상자에서 꺼내서 왼손에 낀 장갑 속으로 밀어넣어 감췄던 것이다.
장갑의 성질도 마력 차폐 상자와 똑같다는 것이 권총의 존재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끝까지 속이기 위해 상자도 왼손으로 던졌다. 위험천만한 도박이었지만, 저 존재가 이것을 노려 보안 마법까지 뚫고 침입했는데 순순히 넘겨주겠는가?
이윽고 침착함을 되찾은 란지에가 권총의 노리쇠에 손가락을 넣고 잡아보더니 중얼거렸다.
“20만 엘소짜리가 맞는 모양인데.”
네 번째 레버는 해당 위치에 선 물건이나 사람을 네냐플 안의 정화 체임버로 보내주는 순간 이동 장치였다. 그리고 정화 체임버는 사실상 밀폐된 금고나 다를 바 없었다. 이 시각 모든 사람들은 심볼리온의 회의에 갔으니 누가 그곳에 남아 있다가 사고를 당할 가능성도 없었다.
만일 저 존재가 정화 체임버마저 탈출한다 해도 네냐플 또한 지금은 거대한 감옥이었다. 정화가 끝나기 전에는 무엇도 네냐플에서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교수들은 네냐플에 뭔가 낯선 힘이 나타났음을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스노리가 조금 기운을 차리고 란지에의 손을 핥았다. 란지에도 개의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그런데 흥분이 가시자 이상하게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차가웠다. 뒤늦게 몸이 두려움을 깨닫고 공황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온도 조절 레버를 내려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