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71)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71화(71/143)
71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32)
7.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오래 전, 타스타니아는 말을 타고 사흘은 돌아다녀야 할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점차 줄어들어 최후로 산비탈에 솟은 단 하나의 성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성의 종말과 함께 그 이름은 끝이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성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 근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타스타니아’는 여전히 존재하는 이름이었다. 다만 공포를 자아내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폐허의 이름으로.
반쯤 허물어진 성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산 구릉에 나무로 지은 임시 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스무 걸음 정도면 가로지를 크기의 반원형 무대였다.
연습용이었으므로 무대 바닥은 거칠었다. 배경 그림을 걸 곳도 없었다. 올라가는 계단 대신에 나무상자 몇 개가 쌓여 있었다. 풀밭은 누르스름했고 억새와 말라비틀어진 덤불, 토끼굴 따위가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 기묘한 풍경에서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1조, 2조!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세요. 3조와 4조는 시간이 남았으니까 모닥불 피울 자리를 정리합시다!”
사람들이 분주히 줄을 서거나 흩어지자 아마릴리 크라운은 몸을 돌려 천막 쪽을 봤다. 천막에서 머리를 내밀고 내다보는 사내를 발견하자 이마를 찡그리며 한 번 더 소리쳤다.
“에리히! 빨리! 음악은?”
에리히라고 불린 젊은 사내가 천막에서 나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더니 아마릴리를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넌 안 춥냐?”
남부 지방이라 해도 한겨울이었다. 더구나 산중턱이라 바람이 많이 불었다. 아마릴리는 발레 의상에 얇은 스타킹, 검정 숄 하나만 걸치고 있었지만 고개를 흔들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넌 추운 게 문제야? 감독님 금방 돌아오실 거거든? 그런데 그 꼴이 뭐야?”
“왜? 오늘은 그냥 오디션이잖아?”
“너희 삼촌이 네 꼴을 봤으면 리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빨리 가서 재킷이라도 입고 와.”
에리히는 슬슬 옆걸음으로 천막을 향해 돌아가며 중얼댔다.
“감독님은 아마릴리한테 잔소리 듣는 비용도 줘라줘라…….”
“웃기고 있네. 꽁무니에 불을 붙여 버릴까 보다.”
곁에서 오디션 참가자들이 둘의 설전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돌아본 아마릴리는 장난기를 담아 혀를 조금 내밀어 보인 뒤 흘러내린 잔머리를 말끔하게 가다듬고 재킷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티아라를 꺼내 썼다.
완벽한 공연 당일 의상이었다.
이윽고 돌아온 에리히는 재킷을 걸치고 있었지만, 어떻게 봐도 자기 옷이 아니었다. 너무 커서 밀가루 부대를 개조해 만들기라도 한 듯했다. 아마릴리가 한숨을 쉬며 노려보자 에리히가 변명했다.
“아, 그놈의 옷이 발이 달렸는지, 날개가 돋았는지.”
그런 다음 잽싸게 악기 담당자들 쪽으로 달아났다. 아마릴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지만 의상 제작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터라 대안이 없었다. 적당한, 아니 완벽한 담당자도 찾아내지 못했고 말이다. 감독님의 무대에 완벽하지 않은 스태프가 단 한 명이라도 가당키나 하겠어?
어쩔 수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가며 아마릴리가 중얼거렸다.
“옛날에 쥬시탕트 양이 만든 의상이 진짜 끝내줬었는데.”
물론 아마릴리는 쥬시탕트 양이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감독님’에게 슬쩍 운을 띄워봤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무대에 올라서자 주위가 한결 잘 보였다. 비스듬히 뻗은 산자락은 너 도밤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능선 아래로 그들이 묵고 있는 마을의 조그마한 지붕들이 보였고, 왼쪽에는 타스타니아 성의 허물어진 탑이 또렷이 솟아 있었다.
사방이 탁 트인 이 구릉지는 감독님의 지시 사항을 들은 스태프들이 세 차례나 와서 온 산을 이 잡듯 훑은 끝에 골라낸 곳이다. 다만 근처에 목장이 하나 있어 가축들이 아무 때나 풀을 뜯으러 나오는 것만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감독님은 세 번째 로케이션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목장주를 만나 겸손한 태도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더니 목장을 통째로 사버렸다. 일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아마릴리는 신이 나서 그 목장의 급수탑 꼭대기에 멋대로 깃발을 꽂아 놓았다. 지난 공연에 썼던 소도구였지만. 숲 너머로 그 깃발도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릴리는 싱긋 웃더니 풀밭에 편안히 앉은 1조와 2조를 향해 소리쳤다.
“자, 시작 이십 분 전입니다!”
감독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건만 아마릴리는 당연한 것처럼 시간을 못박았다.
감독의 주머니에 회중시계가 있던가? 그런 것은 알 바 아니고 어쨌든 감독은 오디션을 망치지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 감독이 어떤 사람인데 실망 같은 걸 시키겠어?
처음 감독과 마주친 날을 떠올릴 때면 곧잘 아마릴리는 폭소가 터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웃기는 장면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땐 지금 같은 미래를 상상도 못 했다. 자신의 인생을 어디까지 바꿔놓을 사건인지 예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 년 전, 아마릴리는 칼라이소라는 항구의 한물간 극장에 소속된 발레리나였다. 약간은 실력이 있어서 한 무리의 무용수들을 이끄는 처지이긴 했지만 제 직업에 이렇다 할 자부심도, 전문성도 없었다. 심지어 열정조차도. 그저 타고난 재주를 조금 가다듬어 밥벌이가 되니 그걸로 만족했고, 그러다가 곧 은퇴하게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실은 은퇴라는 말도 사치스럽고 그냥 퇴직이나 해고 정도?
그러던 어느 날, 지금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조 히스파니에. 그때는 그게 본명인 줄 알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조 히스파니에는 아마릴리 앞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칼라이소의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유명한 사람, 뛰어난 사람, 멋지고 화려한 사람들 앞에. 그리고 평범하거나 시시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앞에도. 그렇듯 갑자기 나타나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모두의 혼을 빼놓았다.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은 하룻밤 만에 쓴 대본 한 뭉치로 시작되었다. 그런 대본에 온갖 명사들이 휘말려들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는 공상으로 들렸던 기획이었다. 칼라이소의 온갖 뛰어난 사람들이 처음에는 코웃음치고 비웃던 것을 잊고 그에게 홀렸다. 그렇게 조 히스파니에와 그들은 단 십오 일 만에, 한 편의 완벽한 공연을 만들어냈고, 그 도시의 역사에서 잊히지 않을 순간을 창조했다.
그건 진짜로 십오 일 간의 마법이었다. 단 2회의 공연만으로 100만 엘소가 넘는 돈이 칼라이소에 쏟아졌다. 몰려든 관객들은 표를 샀을 뿐 아니라 숙박과 식사 등에도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리고 후속 공연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런 게 없자 주위의 온갖 극장들로 몰려가 아무것이나 봤다.
그런 다음 잔뜩 화가 난 채로 돌아와 처음 봤던 그런 끝내주는 것을 다시 만들어내라고 두둑한 지갑을 흔들어댔다. 최소 10회짜리 공연의 제작비 전액을 대겠다고 덤벼든 사람이 열네 명이나 되었다. 일시불로 내겠다고 한 사람은 다섯 명.
동시에 그 공연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의 인생도 바뀌었다. 그 마법에 직접 참가했던 사람들은 얼마 후 한 사람을 위한 추모 공연을 기획하기 위해 다시 뭉치게 되었는데, 공연을 마치고도 해산하기가 아쉬워 정기 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스스로를 ‘모르비아네즈’라고 불렀다. 모르비앙의 주민들이라는 의미였다.
모르비아네즈에는 화통한 극장주, 천재적인 음악 감독, 왕년의 프리마돈나, 전설적인 안무가, 빼어난 작사가 등이 골고루 있었다. 본래 그들은 경력의 황혼기에 막 접어들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공연의 폭발력으로 그들의 창작력은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그들은 새로운 공연을 기획하고, 성공시키고, 몰려든 신인들을 데뷔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칼라이소에는 일시적 호황까지 밀어닥쳤다.
아마릴리는 당시 하필 그 극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에서 무용수들을 이끌었다. 즉, 그 사건의 중심에 있긴 했지만 이름난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해낸 줄도 몰랐다. 그저 마법 같은 한 순간에 휘말렸다가다 끝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모르비아네즈는 그 공연에 발끝이라도 담갔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안무가 지오반 한트케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 오자 아마릴리는 ‘새 공연에 발레리나가 한두 명 모자라나?’하고 생각하며 자리에 나갔다.
“크라운 양, 우리 패거리에서 일 좀 할래요? 무용 감독이 한 명 필요한데.”
“네?”
아마릴리는 입에 막 집어넣었던 사탕을 혀에서 뚝 떨어뜨렸다. 지오반이 자기 사탕 갑에서 꺼내 건네 준, 진짜로 쓰지는 않고 다소 쌉싸래한 사탕이었다.
“와우, 그 사탕 비싼 건데. 하여튼 와서 나 좀 도와줘요. 당신이 무용 감독 하고, 난 안무만 합시다. 어때요? 좋은 분업 아니오?”
아마릴리로서는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지오반에게 아마릴리가 정말로 필요하긴 했다. 그는 자기 재주를 물려줄 제자를 젊어서 괴팍하던 시절에 다 쫓아버리고는 그까짓 재주 따위, 물려줄 놈 없으면 화분 거름으로나 쓰지, 하며 시큰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 히스파니에 덕택에 옛날의 열정이 되살아나자 갑자기 자기 재주에 대한 애정도 불붙었다. 이렇게 재미난 일을 벌이는 재주를 썩히다니 아까워죽겠네. 누구한테는 물려줘야 되겠는데?
그런 지오반에게 살아오며 한 번도 더 나아지려 발버둥쳐본 적 없이 그저 본능대로,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 꺼내 쓰듯 재능을 사용해온 아마릴리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거만한 지오반 한트케였다면 일별도 안 했을 한심한 부류다. 그러나 조 히스파니에는 그런 아마 릴리조차 벽장 깊은 곳의 황금 한 조각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다.
지오반은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군무 연출의 관점에서 무용수들을 이끄는 아마릴리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은 더 갈고 닦아볼 만하다.
지오반은 성격대로, 제대로 갈고 닦았다. 아마릴리에게는 무용뿐 아니라 안무와 연출의 재능이 정말로 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 쉽사리 발견된 발레의 재능이 너무 뚜렷해서 본인조차 호주머니보다 더 깊은 곳은 뒤져볼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약 이 년 뒤, 아마릴리는 정말로 모르비아네즈의 무용 감독이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산 두 해였을 것이다. 지오반은 약속대로 안 무만 맡으면서 ‘무용 감독 아마릴리 크라운’ 밑에 자기 이름을 쓰는 데 만족했다. 정확히는 제대로 사람을 골라내어서 키워냈다는 데 만족했던 것이지만.
다른 모르비아네즈도 2세대를 키우려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삼 년으로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 어렵다고 관대하게 바라본다 치면 에리히 한트케는 그 회색 지대에 있었다. 지오반 한트케의 조카인 그를 음악 감독 스트라우즈가 키워보려 나섰지만, 에리히는 재능과 별개로 놀랄 만큼 삐딱했다.
어떤 뛰어난 가르침일지라도 즉각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고, 제 식으로 소화하겠다며 버티다가 흐지부지 날리곤 했다.
“에리히! 음악 세팅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