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73)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73화(73/143)
73화.
벨벳을 씌운 초대장 (34)
아마릴리가 반색하며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에리히가 감독에게 무례를 저지르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1조 4번이었던 지원자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루드비크, 그러니까 루드비카 역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아까는 즉흥적으로 어떻게든 하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또렷한 상이 잡히지가 않고요. 그래도 감독님께서 저를 뽑아주신 걸 보면 약간이라도 가능성이 있는가 싶고…… 뭔가 머릿속의 상이 나올 듯 말 듯해서…… 그래서 혹시 감독님께서 한 번만 시연으로 지도를 해주시면…….”
말을 하고 있는 4번 지원자뿐 아니라 나머지들도 기대에 찬 눈빛들이었다. 조슈아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둘러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시연을 보는 게 꼭 좋지만은 않을 텐데.”
“하지만…….”
“제 일생에 꼭 한 번만 보고 싶거든요. 이번 오디션에 참가한 것도 실은…….”
지원자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조슈아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동안 조금 뒤에 선 에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저렇게 좀 빼는 체하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체하며 할 게 뻔하지. 진짜로 무대에는 오르지도 않으면서.
이런 시연의 기회가 왔을 때, 갑자기 하라고 해서 준비가 안 된 척하면서, 잘생긴 얼굴을 효과적으로 써 먹어서 대강 얼버무리면 평판에 금도 안 가고 최고 아니야?
타고난 천재로 보이고 싶어서 안 보이는 데서 죽어라 물장구를 치는 백조 같은 인간들이 무대예술계에는 정말로 많으니까.
에리히의 예상대로 조슈아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졌다.
“알았어.”
시연이 시작되려는 기색을 눈치채자 다른 오디션 합격자들도 우르르 일어났다. 모두에게 놓쳐서는 안 될 순간이었다.
그들의 감독은 쉽게 시범 연기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운이 좋아 오늘 같은 순간을 잡는다면 몇 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한 순간만으로 선사해준다고 들었다.
오늘 오디션에 합격한 것보다 이 시연을 한번 볼 기회를 잡은 것이 앞으로 배우 생활을 계속할 거라면 더 큰 행운이라는 말도 돌았다. 누군가는 비탈 밑까지 내려간 불합격자를 소리쳐 불렀고, 늦을세라 뛰어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사이 조슈아는 모자를 벗어 빈 의자에 걸쳐놓고, 판초를 끄르고, 임시 소품인 검은 코트를 받아들어 입었다. 조슈아가 입을 예정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딱 맞는 사이즈인 이유는 모두의 머릿속에 주연의 형태가 조슈아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둥근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는 참인데 아마릴리가 다가와 커다란 화장품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는 화장 수와 분은 물론 각종 붓과 먹붓, 다양한 색조의 섀도와 입술연지, 볼연지 따위가 가득차 있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시연만 할 건데.”
“시연도 완벽하게 하셔야죠.”
“너무 완벽한 것도 좋지 않아.”
조슈아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모르는 아마릴리는 상자를 들고 끈질기게 따라왔다.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 왔는데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시라고요!”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선 조슈아가 말없이 섀도 상자에 손을 뻗더니 약지와 중지로 몇 가지 색을 찍어갔다. 어두운 분홍, 심홍, 은, 그리고 검정. 무대로 걸어가는 동안 거울도 보지 않고 눈가, 그리고 입가를 슥슥 건드렸다. 남은 것은 머리카락 끝에 비벼 닦았다. 상자 세 개를 밟고 무대에 올라선 그는 돌아섰다.
“…….”
몇몇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고, 몇몇은 호흡을 잠시 멈췄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진짜로 미칠 것 같네…….”
잠깐 사이에 조슈아는 완벽히 미친 남작, 루드비크 스칸데르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화장 때문만이 아니라 표정이나 자세는 물론, 손끝의 움직임조차 달라졌다. 마술처럼 분위기를 바꾸고 시선을 장악하는, 악마의 재능으로 불리는 시연의 시작이다.
내가 나를 유폐한 무덤에서
내 손을 잡아끄는 이 손은
추악한 수의를 볕 아래 펼쳐
혼례의 예복으로 바꿀 수 있다 믿는가
시연을 요청한 4번 지원자를 위한 것임을 알리듯 일부러 똑같은 노래를 골랐다. 그러나 예전처럼 드라마틱하게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음색이 뻗어나가지는 않았다. 어딘가 거칠었고, 단선율처럼 아름답지만 외롭게 들렸다. 심지어 반주도 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잠시 후, 지원자 중 하나가 악사가 내려놓은 첼로를 잡고 낮은 반주를 깔기 시작했다. 또 다른 지원자가 바이올린을 집어 들어 화음을 불어넣었다.
연주는 조슈아의 노래와 잘 어울려서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했지만 물론 그렇지 않았고, 지원자들 스스로도 놀라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게 이런 재능이 있었던가?
조슈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바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첫 해 여름에 그의 별명이 되어버린 〈임페라토르〉 공연을 올린 후로 지금까지 조슈아는 네냐플의 학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비인간적인, 범주 밖의 기묘한 존재처럼 살아왔다.
가까운 친구들 외에는 그의 속내를 몰랐기에 겉보기에 그는 남의 기분, 남의 사정, 남의 계획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 배우를 모아 하는 여름 공연 주제에,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는 추억이 되려니 하며 공연에 끼어든 아마추어들을 한 명 한 명씩 붙들고 연기 지도를 해준 것이 돌이켜보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건 마치 지나치게 값진 약재를 모조리 넣어 마침내 독이 되어버린 약과 같았다. 공연 당일이 다가올수록 한 명, 두 명씩 정신이 나가는 것 같더니 마침내 진짜 무대를 겪고 마력에 홀린 몇 명이 학업을 사실상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새로운 재능을 찾아주기도 했지만 배우가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만큼 일상과 미래를 동시에 파괴해버린 셈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네냐플에서 공부해 마법사나 학자가 되려던 평범한 진로가 끝장나고 조슈아의 다음 공연만 쳐다보고 있게 된 인간들을 ‘희생자’라고 불렀다. 두 번의 공연을 거치는 동안 희생자는 다섯 명 발생했다가, 두 명은 간신히 정신을 차려 탈출했다. 즉, 네냐플을 나갔다.
최근작에서는 서로 원수 관계인 배역을 맡았다가 실제로도 아무 이유 없이 서로를 미워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두 명이 새로운 희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쯤 되자 교수들이 조슈아를 불러 면담을 해야 했다. 피해자의 부모가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고 따지고 들다가 상대가 소공작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막시민이 조슈아에게 더이상 신경 안 쓸 테니 마음대로 하라며 화를 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평소와 달리 조슈아도 이번에는 웃으며 들어 넘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날의 말다툼은 그들에게 2차전이었다.
어쨌든 그후로 조슈아는 학생 배우들에게 주연을 주지 않게 되었다. 그들 앞에서 시연을 하는 일도 없어졌다. 이번 공연은 모르비아네즈의 사람들을 초청하는 대신 지난번 공연에서 주연급을 맡았던 사람들은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단역을 했던 학생 두 명만 겨우 합류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오늘, 조슈아는 시연의 방향을 약간 바꾸었다. 완벽한 경지를 보여주어서 사람들에게 갈망을 안겨주는 대신 영감을 불러일으켜 뭔가를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쪽으로.
시연은 짧았다. 고작 삼 분여의 시연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열정이 전염된 듯 환했다. 다들 조슈아가 보여 준 것에 무언가를 보태고 싶어 했다. 근사한 배역을 맡지 못한다면 조연이든, 스태프든, 하다못해 소품을 나르는 역할일지라도. 어찌 보면 조슈아도 자신의 힘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연습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섞여 살기 위해서.
조슈아가 막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소품 천막 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왔다. 손에는 편지 한 통이 있었다.
“감독님! 조금 전에 이런 걸…… 글쎄, 족제비 한 마리가 주고 갔는데 말이죠…….”
족제비라는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지만 조슈아는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바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티치엘이다. 티치엘이 네냐플에서 먹이를 주며 기르는 동물들 중에는 마법사의 마음과 강하게 동화되어 심부름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조슈아는 손을 내밀어 편지를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
기묘할 정도로 예의가 바르기도 한 감독이었다. 어떤 일에도 고맙다는 말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조슈아는 선 채로 편지를 뜯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더니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해 읽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한 번 읽으면 모조리 외우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편지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편지를 접은 조슈아의 눈빛은 어딘가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자신을 우아하게 조절하고자 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켈티카라고?”
그러더니 문득 현실로 돌아온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연의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슈아만 쳐다보고 있는 예비 배우들과, 막 만들어놓은 가설무대와, 에리히와 아마릴리를 차례로 보았다. 그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여러분,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공연 개막을 연기합니다. 내년 여름으로.”
“네?”
“뭐라고요?”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지만 누구보다도 넋이 나간 사람은 아마릴리였다. 말 그대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굳어져 있었다. 조슈아도 그럴 것을 예상했는지 먼저 아마릴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알았지?”
아마릴리는 여전히 입술이 떨렸지만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아마릴리의 어깨를 한차례 껴안아주고는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리히에게도 희미한 미소를 보낸 뒤 말했다.
“공연의 개막은 잠정적으로 8월, 임시 재소집일은 5월 1일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의 일정은 자유입니다만 고용은 지금과 동일한 조건으로 8월까지 유지할 것입니다. 일당 또한 계속 지급됩니다. 혹시 계약 조건 변경 및 파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크라운 씨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기타 금전적 손해가 발생하는 부분은 제가 두 배로 보상하겠으며 이동 및 체류도 모두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당혹감과 불쾌감만은 보상될 수 없는 것임을 압니다. 모두 저 한 사람으로 인해 생긴 일입니다.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사람들을 향해 정중히 절을 했다. 사람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했다. 몇몇은 소공작이 자신을 향해 그런 절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허둥지둥 허리를 굽히기도 했다.
조슈아는 돌아서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의 화장을 지웠다. 코트를 벗고 한 순간 추위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판초를 집어 둘렀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안경을 꺼내어 도로 썼다. 간단한 동작들이지만 늘 그렇듯 부드럽고도 강약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하지만 조슈아를 이루는 것은 그런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공연의 대가이자 빼어난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고 듣고 읽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학문과 예술을 배우자마자 능숙하게 해내며,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인간이 세운 계략과 전략쯤은 어린애 마음속처럼 꿰뚫어 보는, ‘데모닉’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인 천재.
이 순간 데모닉 조슈아로 돌아간 그가 나직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뇌까렸다.
“막시민이 위험하다는데, 내가 당연히 가야지.”
언젠가 누구든 마침내
내 가슴을 찌를 때,
나는 오늘의 너를 기억하리라.
나의 어린 적이여,
새로 태어난 나의 첫 번째 적이여.
그리고 그날, 만일 내 안에 심장이 들어 있다면
그중 검은 불을 품은
가장 단단한 조각은
너의 것이리라.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였음을 의심치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