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7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74화(74/143)
74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1)
5장.
1. 카스티유 경의 고난
로랑 카스티유는 양쪽 발에 들러붙은 정체불명의 오렌지색 반죽을 내려다보며 이런 곳에 오기로 했던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던가 생각했다. 반죽에서는 변질된 위스키에 상한 달걀을 띄운 것 같은 냄새가 풍겼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가 하면, 있었다. 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사 년 전 그날의 결심이 아니었더라면 어려서 온갖 괴담의 배경으로나 들어왔던 대륙 반대편의 위험천만한 황무지까지 왔을 리 없다. 로랑은 자신을 태어난 영지의 경계 밖으로도 나가기 싫어하는 고향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필멸의 땅이 잘 있나 궁금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 곳에 세워진 이 기괴한 성채는 그냥 ‘킵’이라고 불렸다. 누가 세웠는지도 모른 채 그저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어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 누구도 거기에 이렇다 할 이름을 붙이려 하지 않았다.
이 모습 그대로 가나폴리 시절부터 존재했을까 상상해보면 조금 오싹해지기도 했다. 천 년 가까이 흘렀는데 무너진 흔적도 없이 그대로라니.
필멸의 땅에 인접한 지역을 빠르게 황폐화시키는 ‘메타모르포시키 프시키’, 통칭 변종 프시키가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삼 년 전이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비밀리에 접근했지만 프시키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각 나라가 변경지로 조사관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자 마법사들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이대로 두면 마법도 모르고 필멸의 땅도 잘 모르는 왕들이 대책이랍시고 엉뚱한 일을 벌여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차라리 정보를 공유하고 조언에 따르게 하는 편이 낫다.
각 나라의 마법사들도 평소 서로에게 협조적이지는 않았지만, 중대한 문제를 앞뒀으므로 처음으로 심볼리온을 중심으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내부 거점으로 이 유적을 택했다.
하지만 마법사들만을 믿고 있을 수 없었던, 그리고 손 놓고 있다가 주도권을 빼앗길까 우려한 각 나라들은 도움을 줄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나섰다. 마법사들은 예로부터 소속 국가에 큰 충성심이 없기 마련이었고 왕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게 되자 마법사들은 전이문라는 순간이동 장치를 몇 군데에 설치했다. 오를란느 전이문은 트레비조의 에팔란트라는 산에 있었다.
에팔란트에서 킵까지, 사흘 정도 걸릴 거리를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건너온다. 위험천만한 황무지를 직접 가로지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편리함이다.
이렇듯 왕들조차 겪어본 적 없을 엄청난 편의를 누리고 있지만 어디 가서 자랑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었다. 편리함은 인정해도 경험 자체만 놓고 보자면 불쾌함에 가까웠다.
마법사가 아닌 자들이 마법을 간접 체험하기 때문일까. 전이문을 통과하는 잠깐 동안 자신의 인격이 수천 가닥의 실타래로 갈라졌다가 기적적으로 도로 이어붙여진 기분이지만, 그래서 가위질 한 번이면 엉킨 실뭉치로 돌아가버릴 것 같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원래의 인격을 연기해야 한다. 저절로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을 이루는 요소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그런 기분으로 떨어지게 되는 장소가 이곳 ‘대기실’이었다. 온도 조절에 실패한 식품 저장고처럼 생긴 이곳은 더웠고, 늘 썩는 냄새가 났다. 냄새의 원인은 바로 이 반죽이었다. 전이문을 통과하면 어찌된 셈인지 꼭 저 오렌지색 반죽이 발에 묻었다.
반죽의 정체가 뭐냐고 여러 마법사들에게 캐물어 봤지만 하나같이 어린애한테 어른의 비밀을 감출 때 쓰는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알게 되어도 딱히 즐겁지 않을 겁니다” 같은 대꾸나 할 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십 분 정도 기다리고 나서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마법사들의 권고 사항이라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어기는 사람도 없었다. 이 위험천만한 땅의 유일한 안전지대인 킵에서 마법사들은 의뭉스럽고 답답하지만 동시에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모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믿어야 했다.
진짜로 그런지, 귀찮아서인지, 단순히 잊어버렸기 때문인지는 판별 불가지만.
하지만 만약 스물두 살로 돌아가 다른 길을 택한다면 평범한 에투알로서 대략 마흔이나 쉰 살까지 복무하다가 어딘가 부상을 입고 고향 영지로 은퇴해 망나니 뒷바라지를 하며 여생을 보내게 됐을 테고 그때쯤엔 망나니도 통풍이나 매독에 걸려 본의 아니게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젠장, 이쪽이 백배 낫지.
“돌아오셨습니까, 카스티유 경.”
눈앞에는 2년차 에투알인 비비엔 아르망주가 곧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 이 냄새 지독한 헛간에서 침착하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비비엔의 미소는 에투알 사이에서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고 소문나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고 전망은 더 나쁘고 희망이 없을수록 보게 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비비엔이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걸 본 모두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둘 다 에투알이지만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게 다 대공국 군대 개편 사업 때문이었다. 다른 군대와 섞여 지내며 이래라저래라 해야 하는데 사병들처럼 굴 순 없었다.
로랑이 미소의 의미를 묻듯 비비엔의 얼굴을 빤히 보자 비비엔의 입가가 조금 더 올라갔다. 로랑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말했다.
“수고 많습니다, 마담 아르망주. 잉게스비히 여왕 폐하의 고문관께서는 국경 지역으로 마중 나온 일행과 안전히 합류했다고 보고해주십시오.”
그건 호위라기보다 외교적 친선 행사였다. 정식 교류가 드물던 나라의 관리들이 킵에서 만난 김에 서로 환심이라도 사보자 싶었는지, 누군가가 오를란느의 에투알이 하이아칸 여왕 폐하의 고문관을 호위해주면 어떻겠느냐는 희한한 아이디어를 냈다. 마침 고문관으로 온 사람도 여왕의 친척이라 했다.
“에투알이 킵까지 와서 할 수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역할이 아니냐”, “이왕이면 젊고 잘생긴 친구로 보내자” 따위로 떠들어대는 건 거슬렸지만 다른 나라에도 에투알의 유명세가 알려져 있으니만큼 오를란느를 위해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다녀온 참이었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녀오시는 동안 카스티유 경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로랑은 비비엔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며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담당 연대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당 연대라고 하지만 로랑이 지휘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잔소리나 하라고 불려온 입장이었으므로.
“오늘 부로 대령으로 승진하시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 참견이나마 원활하게 하라고 대상 부대의 지휘관과 동급의 계급을 받도록 했지만 그래봤자 임시였다. 대공국 군대 개편 사업이 끝나면 사라질 이름 따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기까지는 조금도 좋은 소식이 아니었으므로 로랑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비비엔을 바라봤다. 그러자 비비엔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로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까?”
“지휘권 공백이죠. 새 지휘관이 부임할 때까지 알리스 공녀 연대의 지휘권을 카스티유 경이 맡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잠깐,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어제 여섯 명이 실종되어서요.”
담담한 목소리 때문에 언뜻 시시한 사고처럼 들렸지만 그럴 리 없었다. 여기서 사람이 실종될 곳이라면 킵 바깥밖에 없었다.
아직 이렇다 할 작전이 시작되지 않은 지금 나가는 문은 폐쇄되어 있었다. 그걸 열도록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를란느 군 전체에서 단 한 명, 레옹 여단장밖에 없었다. 아니, 여단장이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지휘관들과 협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 여섯 명에 누와예 남작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네. 왜 나갔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뭔가 감춰야 하는 일이 있어서 무모한 행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킵에 주둔한 오를란느의 군대는 케르느 백작 연대, 회색여우 연대, 녹군기 연대, 알리스 공녀 연대의 네 연대와 부속 부대로 이루어진 1개 여단 규모다.
각 연대에 에투알 두 명과 수련병 두세 명이 배속되어 이른바 짜증나는 잔소리꾼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상이 말을 들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은 에투알이니만큼 그 정도 인원으로도 개혁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을 누군가가 내린 모양이지만 실상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으므로 기본적으로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알리스 공녀 연대의 연대장 누와예 남작은 ‘목도리도마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평소 턱짓으로 사열을 마치고 오후에는 반드시 낮잠을 즐기며 제 군복과 군모, 군도에 각각 담당병을 둘 정도로 몸치장에 몰두하는 사내였다. 목도리도마뱀이라는 별명은 로랑이 킵에 오기 전부터 붙어 있었는데 이 근방에서나 볼 수 있다는 그 동물을 처음 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을 정도로 꼭 닮았다.
그런 반면 검을 쓸 줄 아는지는 로랑의 관점으로 아직 확인된 바가 없었는데 어쩌자고 고작 병사 몇 명만을 데리고 킵 밖으로 나갔단 말인가? 황무지가 평소에는 고요하지만 주기적으로 위험천만한 존재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때 비비엔이 덧붙였다.
“개편 작업이 좀더 원활해지겠죠.”
비비엔의 말은 옳았다. 대공국 군대 개편의 가장 큰 적은 늘 지휘관들이었다. 일반 병사들을 제압하기란 에투알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가도 실력 차이를 실감하는 지점에서 쉽사리 승복한다. 하지만 지휘관이라는 작자들은 능청스럽기가 기름 바른 장어 같고 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면 어린애가 웃고 갈 억지도 개의치 않았다.
제 연대의 개편을 담당하게 된 로랑이 턱짓이나 눈짓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대임을 알게 되자 명령, 농담, 친한 척, 청력 저하의 과정을 거쳐 최근에는 로랑이 한 말만 잊어버리는 선택적 기억상실증 흉내를 내고 있는 인간이지만 그렇더라도 내일 죽어버리기를 기원한 적은 없었다.
킵에서 외부 실종이란 사망과 동의어였다. 그런 것을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비비엔의 냉정함이 오싹하기도 했지만 로랑은 내색하지 않았다. 비비엔을 하루이틀 겪는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