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76)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76화(76/143)
76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3)
“카스티유 경! 오랜만이군!”
로랑이 막 문을 열자 몸집이 크고 둥글둥글한 인상의 남자가 숙소 안쪽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금세 상대를 알아본 로랑의 얼굴이 펴졌다.
3분견대 소속 조안느 드 도벨의 오빠인 다비드였다. 다비드는 에투알이 아니었지만 동생 덕택에 에투알 여럿과 아는 사이였고 특히 3분견대와 친하게 지냈다. 그가 로랑의 발치를 흘끗 보더니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이문을 통과한 모양이군. 그거, 필멸의 땅의 유령들이 좋아하는 감자튀김 소스 같은 거라지?”
로랑이 콧잔등을 찡그려 보였다.
“감자튀김 신세가 되더라도 이따위 소스가 발라지고 싶지는 않네요.”
“역시 이런 소스나 좋아하니까 죽고 나서 유령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약간 치즈 같은 냄새 나지 않아? 너희 고향에서 만드는 거 있잖아.”
“……푸른곰팡이 치즈요?”
로랑의 기막힌 표정을 본 다비드는 킬킬 웃어대며 로랑을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귓가에 대고 “야, 너 방금 속으로 욕했지”하고 놀려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이 포옹을 나누는 사이 비비엔이 말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비비엔은 로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가버렸다. 어쩐지 곤란한 일을 피해 달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로랑은 다비드가 반갑긴 했지만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단 눈앞의 싱글싱글 웃고 있는 사내가 왜 여기 있는지부터가 그랬다.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예전원에서는 드디어 나오신 건가요?”
“응. 로랑 너도 내 자리를 노리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세상에 할 일 없이 노는 둘째 셋째 넷째들이 어찌나 널렸는지, 이 꿀 떨어지는 자리를 혼자 오 년이나 꿰차고 있었으면 이제 그만 나가라고 남아도는 자식들을 둔 귀족들이 서른 명이나 연명장을 썼다지 뭔가. 하루에 열 줄 기록할 일도 드문 예전원에 있다가 그런 걸 보니 난독증이 와서 눈이 핑핑 돌아가잖아. 그래서 재빨리 도망 나왔지.”
귀족들의 품계와 예우를 관장하는 예전원은 귀족 자제들의 한가한 직장으로 인기가 좋았다. 백작 가문의 차남인 다비드는 한량에 가까운 유한 성품에 온갖 가문의 사람들과 잘 지냈으므로 예전원 비서관 노릇에 제격이었다.
다비드의 평소 말버릇을 아는 로랑은 기괴한 설명을 곧이듣지 않고 눈썹을 한차례 찡그린 다음 말했다.
“빙빙 돌리지 마시고 효율적인 설명 바랍니다. 에투알 방식을 알면서 그러십니까.”
다비드가 킥킥 웃었다.
“그 소리 조안느한테도 한 번 들어본 것 같은데.”
“한 번이 아니었겠죠.”
“그래, 그래. 내가 입만 열면 조안느가 손을 내저으면서 ‘에투알식’으로 요점만 말하라고 그랬지. 그래도 로랑 너는 아니었잖아. 한 이 년 전까지만 해도 귀여웠는데. 이제 너도 알레망 단장처럼 서류에 철자 하나 뒤집혔다고 페루즈 강에 던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인간이 되어가는 거겠지.”
귀족 한량인 다비드와 달리 로랑은 제 상관을 농담 대상으로 삼으려 들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단장님처럼 될 수만 있다면 잘된 일이죠.”
다비드가 피식 웃고는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아 테이블의 잔을 집어 들었다. 킵에 처음 온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에 적응을 못해 한동안 갈증으로 고생하곤 했다.
로랑은 오렌지색 반죽이 묻은 부츠를 벗어놓고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날마다 생각하던 질문이 자연히 튀어나왔다.
“공녀 연하께서는 평안하십니까?”
다비드는 고개를 까딱해 보인 뒤 대꾸했다.
“석 달 전 기준으로는 그러셨지.”
“석 달이라면 연하께서 새롭고 멋지고 위험천만한 생각을 해내시기에 충분한 기간이군요.”
“그야 그렇지. 또 무슨 사고를 치셨더라도 네가 오를리까지 쫓아갈 일은 없을 규모여야 될 텐데.”
로랑이 즉각 웃음기를 날려버리고 대꾸했다.
“연하를 사고뭉치 어린아이처럼 보는 말씀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넌 왜 내 얼굴 보자마자 그런 질문을 하고 있냐?”
“새롭고 멋지고 위험천만한 생각과 사고를 친다는 것은 다릅니다. 저는 거기서 ‘위험천만한’ 부분을 감당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다비드는 웃을까 말까 하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주군을 모시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참, 아까 나 왜 여기 왔느냐고 했지?”
다비드는 로랑이 열여덟 살 수련병이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로랑이 조안느와 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비드도 로랑을 동생처럼 대해왔고 다른 에투알과도 곧잘 어울리곤 했다.
그렇다 보니 안락한 삶을 살아온 다비드도 에투알의 본능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편안히 있는 듯하다가도 임무를 상기하면 바로 기본자세로 돌아간다는 것을.
“참사관님이 오늘 막 여기 도착했거든. 난 그분하고 같이 온 거야. 수행원으로.”
로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참사관 수행원이 되셨다고요? 아예 소속이 바뀌신 것 아닙니까?”
“그게 좀 그렇게 됐다. 떠밀려서…… 자원한 셈이라고나 할까.”
“자원하셨다고요?”
다비드는 좋게 말해 한직에 어울리는 성미라 하지만 실은 책임질 일을 극도로 꺼려서, 뭘 하겠다고 먼저 나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다비드가 로랑의 표정을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알아, 알아. 정확히 말하자면 자원은 아니지. 그냥 이런 사람이 따라가야 할 것 같다고 간단히 건의만 하려 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나더러 하라잖아. 딱 적임자라고. 아버지라도 막아주시려나 했더니 예나 지금이나 우리 부모님은 나한테 관심이 없어가지고 말이야. 내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다비드 드 도벨’이 자기들은 발음이 되나 보지? 하여튼 일이 그따위로 풀려가지고 귀족원 방명록의 빗나간 획이나 고치고 있어야 될 내가 이 목마르고 먼지 나는 동네에 떨어지게 된 거야. 이렇게 된 이상 전적으로 에투알만 믿어야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로랑은 잠시 머리를 굴려 오늘 벌어진 기묘한 일들의 앞뒤를 이어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건의를 하실 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게 뭐랄까, 좀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니, 내 생각이 아니고…… 뭐 내 생각도 같았지만.”
“새 참사관님이 성질이 급하신 분인가 보군요.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그때 누군가가 열려 있는 문을 두드리더니 안쪽에서 보이도록 고개를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도벨 비서관님, 여기 계셨군요. 참사관님께서 부르십니다.”
다비드가 잘됐다는 듯 얼른 일어나더니 말했다.
“젠장, 만찬에 참석하라는 모양이다. 나도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그럼 이따가 보자.”
그러더니 다비드도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로랑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다비드도 뭔가 할말을 피해 가버린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은 그럴 이유가 있었다. 새 참사관, 캉페슈 후작은 로랑과 매우 껄끄러운 사이였다. 둘의 악연은 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은 오를리 궁정의 누구라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됐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한쪽은 뼈대 있는 후작 가문의 주인, 로랑은 작위는커녕 귀족 친척 한 명 없는 평민으로 애초에 말다툼 상대조차 될 일이 없는 사이였다. 귀족들이 보기에 평민 출신의 에투알이란 그저 조금 뛰어난 근위병에 불과한 존재였다.
사건의 표면만 보자면 이러했다. 오랫동안 샤를로트 공녀의 시녀였던 쇼몽 백작부인이 모임을 열어 공녀를 초대했다. 그런데 그날 밤 수상쩍은 화재가 일어나 쇼몽 저택은 전소되고 백작부인 본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공녀는 강에 뛰어내려 간신히 살아났는데 그 과정에서 공녀를 구하러 갔던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전해졌다. 큰불에 놀라 뛰어나온 오를리 시민들도 강 앞에서 사납게 다투는 자들을 보았는데 몇몇은 말다툼이 아니라 칼부림이었다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에 화재는 진압되었고, 며칠 뒤 발표된 바로는 부엌에서 불을 잘못 다뤄 벌어진 화재였다고 했다.
그건 오를리 시민들에게 한 발표였고, 귀족들은 조금 다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날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강에서 나온 샤를로트 공녀는 쇼몽 백작부인을 찾으러 가려 했으나 여러 사람이 가까스로 말렸다.
샤를로트는 격분해 있었는데 그건 백작부인이 샤를로트를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화재가 나기 직전에 백작부인은 샤를로트를 어느 방에 가두었다고 했다. 즉, 화재를 가장해 공녀를 죽이려 한 암살 기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작부인이 왜 샤를로트 공녀를 배신했는지는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 백작부인은 샤를로트가 일곱 살이었을 때 공녀를 섬기는 수석 시녀가 된 후로 큰 문제 없이 공녀를 모셔왔다.
샤를로트도 스스럼없이 백작부인의 살롱에 놀러갔을 정도로 제법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백작부인은 딸이 없어서 어려서부터 섬겨온 공녀가 친딸처럼 느껴진다고 종종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제 저택을 다 태워가며 공녀를 죽이려 한 까닭은 무엇인가? 또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 왜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단 말인가?
캉페슈 후작은 그날 사건 현장에 있었다. 쇼몽 백작부인에게 초대받은 손님 중 하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그자는 기막힌 짓을 연달아 저질렀다.
첫째로, 저택으로 달려와 샤를로트의 행방을 묻는 에투알들에게 ‘궁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짓 정보를 말해 수색에 큰 혼선을 주어 놓고는 그저 술에 취해 잘 모르고 한 말이었다고 당당하게 둘러댔다.
둘째로, 그날 화재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쥐고 있는 백작부인의 시종을 붙잡아 근위병들에게 맡겨두었는데 그자를 제멋대로 단칼에 죽여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이런 놈을 감히 살려두다니…… 전하의 지엄한 법을 보여줘야 마땅하지!”
당황한 근위병들이 가버리려는 후작을 붙들고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로랑이 돌아왔다. 상황을 알아차린 로랑은 대뜸 검을 뽑아 후작에게 겨누며 말했다.
“이 행동은 당신이 공녀 연하의 적임을 증명한 것과 다름없다.”
“뭣이? 무례한! 난 오귀스트 드 캉페슈 후작이다! 감히 근위병 나부랭이가 내게 검을 들이대?”
로랑도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움찔하기는커녕 바로 맞받았다.
“공녀 연하의 안전을 해치려 든 자는 누구든 보내줄 수 없다. 원한다면 결투로 봐도 무방하다.”
캉페슈 후작이 결투로 여럿 죽여놓고 뽐낸다는 사실은 로랑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정도로 유명했다. 후작은 순간 당황하는 듯하다가 곧 큰 소리로 비웃었다.
“병사 주제에 감히 나와 결투를 하겠다고? 평민들의 목숨에 후작 가문의 고귀한 칼날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어서 비키지 못해!”
“난 병사가 아니라 에투알이고, 로랑 카스티유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