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78)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78화(78/143)
78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5)
2. 공녀의 검
“전하의 관심?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대공국이 영토 밖으로 여단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게 팔 년 전쟁 이후로 처음이야! 이런 투자를 하셨는데 전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성과는 나오고 있나? 지금까지야 타국에서 우리 오를란느인의 뛰어남을 실감할 기회가 그리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리 크지도 않은 이 성채에 온 대륙의 인간들이 다 모여 있지 않나? 대공국 군대는 물론 두각을 드러내어 대공 전하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겠지? 어떤가?”
“그야 뭐 당연한 말씀이지만…….”
킵이 각국 군대의 힘자랑 놀이터가 아니라는 것도, 이렇듯 여러 나라가 군대든 뭐든 보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발생한 문제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나타낸다는 것도, 아직까지 어느 나라 군대든 특별히 실력을 발휘할 상황이 벌어진 적이 없다는 것도, 그런 상황의 발생이란 마상시합 따위와는 성격이 다른,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위난을 의미한다는 것도, 어느 것 하나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상대는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성격이 아니었다.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오를리로 돌아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부류가 아니오. 전하께서는 그런 자들을 매우 싫어하신다오. 캉페슈 가문이 전하께 신용이 있는 것은 어딜 가든 자세한 상황을 파악해 정확한 정보를 전해드리기 때문이니까. 자, 재미있는 이야기를 좀 들려주면 좋겠군. 오를란느는 어떤 일을 했소? 설마 주도권 다툼에서 밀리거나 한 건 아니겠지? 레옹 여단장은 연합군에서 어떤 위치요?”
“그건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캉페슈 후작은 입맛을 다시다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훌쩍 마셔버렸다. 눈치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얼른 새 잔을 가져와 건넸다.
서쪽 홀에 마련된 만찬은 오를리 사교계에서 칭찬받는 우아한 연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벽지 한 장 바르지 않은 살풍경한 벽에 투박한 테이블과 의자,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상차림에 캉페슈 후작의 눈살은 일찌감치 찌푸려진 뒤였다.
고작 마흔 명 정도 모였을 뿐인데 홀의 크기만 쓸데없이 넓어서 다소 휑했고, 저 혼자 그럴싸한 샹들리에가 테이블이 놓인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홀 한가운데에 우스꽝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그날 후작이 유난히 빈정대고 트집을 잡은 이유 중 하나는 샴페인이 너무 맛이 없었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이 건조한 땅에 막 들어온 후작은 줄곧 목이 말랐으므로 맛이 있든 없든 계속 음료를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킵에 온 귀족들의 실망에 익숙한 장교들은 대충 비위를 맞춰 넘어가려 했지만 하필이면 누군가가 공녀의 안부를 질문하는 바람에 후작의 입에 쓸데없는 활기를 불어넣은 꼴이 되었다.
“샤를로트 공녀 연하께서 안녕하신가, 그 말인가? 글쎄. 워낙 여기저기로 훌쩍 사라지시는 분이라 알 길이 없군그래. 그만하면 자중하실 때도 됐는데 여전히 어린 아가씨답게 천진하셔서 말이야. 덕택에 대공국의 미래가 참으로 안개 속이라지.”
새 참사관에게 좋은 인상을 줘야겠지 싶어 가까이 앉았던 귀족 출신 장교들이 머뭇머뭇 놀란 시늉을 했다. 손님 접대를 하자면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래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어. 그러니까 호위병이 일흔여덟 명이나 필요한 게 아니겠나?”
후작이 무엇을 비꼬는지 알아듣지 못한 누군가가 되물었다.
“아니, 일흔여덟 명이나 됩니까? 왜 그렇게 많은 호위가 필요하죠?”
다른 자가 그자의 팔꿈치를 툭 쳤다.
“에투알 얘기잖아.”
“아, 에투알이 일흔여덟 명인가요? 하지만 에투알은 지금…….”
후작은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킵에 장교로 파견된 귀족들은 이른바 상류사회의 눈치라는 것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이런 척박한 곳으로 보내지는 거겠지만.
어쨌든 독설을 퍼붓고 싶어 안달이 난 후작에게는 비비꼬인 농담을 착착 받아주는 눈치 빠른 상대가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공녀님께서 어딜 가셨는데요?”
“난들 아나. 모르니까 문제 아닌가.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사라질 신분이 아닌 분이 그러시니까 아랫사람들만 전전긍긍하는 게지. 대체 점잖은 몸가짐은 언제 익히시려는지.”
캉페슈 후작이 샤를로트가 아노마라드로 간 정황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녀가 나타날 만한 장소에서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귀족들이 평소처럼 억측하는 것을 그도 옮겨 말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아무 파벌에도 속하지는 않았지만, 좋든 나쁘든 유명세가 있고 거리낌 없이 막말을 잘하다 보니 소문의 진원지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연줄이 없어 킵 같은 곳에나 보내지는 얼뜨기들은 유행도 모르고 상식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럴 만큼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 건 아닐까요?”
후작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열아홉 살 되신 공녀님께서 은밀히 해결하셔야 할 중요한 볼일이 대체 뭔가? 이 평화로운 대공국에 그런 위기가 있을 리도 없지만, 있다 한들 그게 그분께 맡길 일인가? 귀여운 공녀님께서 시시때때로 멋대로 사라지는 건 어린 아가씨들이 꽃놀이 가는 거나 다를 것 없는 이유뿐이야.”
장교들은 무어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서로 눈치를 보았다. 후작의 생각대로 그들은 오를리 사교계와 거리가 먼 존재였기에 샤를로트 공녀는 여전히 하나뿐인 대공국의 존귀한 후계자였다.
게다가 그들은 군인이었으므로 공녀의 에투알 경력도 꽤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다. 그렇다보니 웬만하면 지체 높은 후작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싶은데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게…… 뭐 꽃놀이를 가실 수도 있죠. 꽃철이 되면 누구나 한 번쯤…….”
“대공국이 평화롭다니 다행스럽네요. 하하하…….”
엉뚱한 소리를 듣는 후작의 표정은 짜증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한 명이 맞은편에 와 앉으며 대꾸해 왔다.
“공녀 연하께서 귀공녀답지 못하다는 거야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멋대로 사라지시기까지 하는 줄은 몰랐군요. 혹시 수상쩍은 무리와 손이 닿으시는 건 아니겠죠? 제가 듣기로 최근에 아노마라드 쪽의 어떤 세력과 손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던데. 이 킵에서도 수상쩍은 소문이 나돈 지가 좀 되었거든요. 아무래도 연합군이랍시고 아노마라드 군대와 어깨를 맞대다시피 지내고 있으니까요.”
지도부 면담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로랑은 만찬에 참석하는 대신 새로 맡게 된 알리스 공녀 연대의 장교들과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특별히 축하할 일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지휘관이 된 셈이라 축하의 의미로 포도주가 나왔다. 로랑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장교들이 자꾸 권하는 바람에 몇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막 숙소로 돌아가려 하는데 바란 연대장이 보낸 병사가 왔다. 퇴근 전에 여단 본부에 잠시 들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로랑이 묻자 병사가 대답했다.
“아까는 건네주는 것을 깜빡 잊으셨다고, 여단 창고의 여분 열쇠를 받아 가시랍니다.”
킵은 개조가 불가능한 구조물이고 오를란느 군대에 배정된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각 연대별로 물품을 보관할 창고 등을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가 없었다. 지휘관들도 종종 어디까지가 자신의 관리 범위인지 깜빡하곤 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여단 본부 부속실입니다.”
로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단 본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 년 전, 사과의 섬에서 그랬듯 경쾌하고 빠른 걸음이었지만 그날의 스물두 살 먹은 로랑과 지금의 로랑 사이에는 색채조차 기괴한 거친 강이 흐르는 듯했다.
공녀의 측근이 되고 나서야 그는 공녀를 제대로 지킨다는 것이 각오나 의지 이상의 것임을 알았다. 귀족들의 세계는 겉보기에 화창하게 갠 봄 날씨 같지만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 보면 냉혹함이 축축한 안개처럼 드리워지고 곳곳에 집요한 악의가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말뚝을 찾겠다고 정신없이 걷다 보면 뭔가에 취한 듯 어지럽고 숨을 쉬기도 힘들어진다. 고향에서 영주 아들의 망나니 같은 행동을 바라보며 미워하던 마음으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유독한 공기였다.
오를리의 귀족들은 겉으로 고요하되 한시도 눈을 감는 일이 없다는 전설 속의 흙요정 같은 데가 있었다.
흙요정은 온몸에서 축축한 진흙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젖은 웅덩이 근처에 고요히 누워 있으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엿보고 들려오는 모든 말을 외운다. 자기가 있다는 기척은 내지 않지만 만약 들킨다면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그들이 엿본 것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웅덩이 근처에 작고 가느다란 어린애의 윤곽 같은 것이 보인다면 입을 다물고, 못 본 체하며 지나가라.
한때는 샤를로트도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몇몇 우호적인 귀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해보려 했다. 그랬기에 쇼몽 저택의 모임 같은 곳에도 갔던 것이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거기서 죽을 뻔한 후로 샤를로트는 친분에 끌려다니다가 위험에 처하느니 단호하게 끊어내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은 대공이 되고 난 후에도 쉽지 않으리라. 사실상 머리 몇 개쯤은 날려버릴 각오로 공포 정치를 펴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연하께서 그 정도를 못 하시겠는가?
로랑은 정치가가 아니었기에 그 정도에서 적당히 상상을 그쳤다. 필요한 일과 적절한 시기는 공녀 연하께서 정한다.
지금은 베르나르 대공자의 암살 문제에 집중하고자 하는 공녀의 뜻을 충실히 받들 뿐이다. 그 과정에서 힘을 다해 공녀를 지킬 뿐이다.
그러자면 그도 강해져야 했다. 육체적인 강함이 아니라 더러움을 견뎌내고, 때로 악의를 꿰뚫어보고도 뻔뻔스럽게 버티는 억센 마음이 필요했다.
선하고 충성스러운 것만으로는 이겨내지 못한다. 천성이 솔직하고 쾌활한 로랑 같은 사람에게는 바람과 햇빛 아래 자란 식물을 늪에 옮겨 심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로랑이 변했듯 샤를로트도 변했다. 하지만 아직은 소녀 같은 천진함이 남아 있어서 로랑은 때로는 안도했고 때로는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샤를로트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다. 샤를로트는 짓궂은 소녀의 모습과 냉혹한 공녀의 모습을 생각보다 가볍게 오갔다.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듯, 남자아이가 되었다가 여자아이가 되었다가 하듯, 누구에게 웃어주고 누구를 쏘아볼지, 손을 내밀지 검을 겨눌지 마치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다행스럽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곁에 있는 로랑이 공녀의 변해가는 모습에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그 모습이 단순히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