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79)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79화(79/143)
79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6)
여단 본부에 이르러 열쇠를 건네받은 로랑은 고작 길쭉한 나무패에 매달린 열쇠의 조악함에 실소했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같이 조금씩 우스운 데가 있었다. 여단 전체가 사용하는 창고의 열쇠가 마치 시골 마을 방앗간 열쇠처럼 생겼다니.
이어 숙소로 돌아가려던 로랑은 소란스러운 외침 때문에 아래쪽 연회장을 내려다봤다가 비비엔의 모습을 발견했다.
마침 누군가가 나오느라 연회장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비비엔은 한쪽 구석에 서서 연회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볼일이 있으면 들어가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로랑은 문득 계단 세 개를 내려가 비비엔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가 물었다.
“마담 아르망주?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갑자기 비비엔이 활짝 웃어 보이는 바람에 로랑은 화들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죽을 자리는 설마 아닐 텐데 대체 왜…….
“연회장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저는 신경쓰지 말고 어서 가보십시오.”
그때 열린 문 안쪽에서 사람이 나오다가 로랑을 보더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다비드였다.
“어, 네가 여긴 웬일이냐?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그러면서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지만 뒤따라 또 다른 사람이 나오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9시가 가까운 터라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은 슬슬 연회장을 떠날 시각이었다.
“특별한 볼일은 없습니다만.”
“그럼 얼른 가라. 안에 술 취해서 정신 나간 소리 늘어놓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야. 들으면 머리만 아파진다.”
그렇게 말하는 다비드도 술을 안 마신 얼굴은 아니었다. 로랑의 한쪽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나온 모양이죠?”
딱 잘라 묻자 다비드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시선을 피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휴, 조안느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헌금함에서 동전 슬쩍해 단풍 사탕 사 먹은 얘기까지 다 튀어나오려 하잖아.”
그러면서 도와달라는 듯 비비엔을 봤지만 비비엔은 이쯤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눈만 굴렸다. 로랑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두 걸음 다가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밀자 연회장이 펼쳐지면서 목소리들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동시에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예민한 귀를 찔렀다. 저도 모르게 왼손이 꽉 쥐어지며 핏줄이 파랗게 돋았다.
캉페슈 후작이다.
저만치, 세 테이블 너머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법 먼데도 목소리가 워낙 알아듣기 쉽고 또 컸다. 술을 제법 마셨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으로 둘러싸인 불그레한 얼굴이 사람들 틈으로 가려졌다 나타났다 했다.
그자의 맞은편에서 웃어대고 있는 자는 상리스 후작부인의 친척인 파팽 소령이다. 상리스 후작은 베르나르 대공자를 낳았던 죽은 대공비의 아버지였다. 그 가문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샤를로트를 미워했다.
다른 파벌은 대공 가문의 일원이 중심이어서 차기 대공 자리를 노리느라 그런다고 해석할 여지라도 있었지만 상리스 후작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딸에 이어 손자까지 죽는 바람에 대공가에 제 가문이 남긴 흔적이 깨끗이 지워지고 엉뚱한 여자의 딸인 샤를로트가 장차 대공이 되리라는 사실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비드가 따라 들어오자 로랑이 말했다.
“참사관이 저분이었군요.”
“그랬다. 되도록 늦게 마주쳤으면 싶었는데. 하루이틀 있으면 이것저것 보고 나서 좀 수그러들 거 아냐. 지금은 기고만장해서 꼴이 말이 아니다. 얼른 나가자.”
“아뇨.”
로랑은 주위를 둘러봤다. 나간 사람이 여럿이라 빈자리는 금세 눈에 띄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들어보고 가야죠.”
“들어서 뭘 하게?”
“최신 오를리 소식이 있겠죠.”
“최신 오를리 소식은 나한테 들어. 술 취한 양반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로랑은 어느새 침착한 상태로 돌아와 다비드를 보았다.
“저런 사람의 입에서 들어야 할 소식이 있는 법이죠.”
로랑은 정말로 문가에 가까운 테이블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다비드도 참사관이 연회장을 떠나기 전에 쉬러 갈 입장은 아니었으므로 옆자리에 앉으며 로랑의 눈치를 살폈다.
“이래서 내 꼴이 우습게 된 거야. 너도 알다시피 후작의 어머니가 우리 할머니하고 친하시잖아. 후작이 킵에 다녀올 참사관으로 뽑혔다는 소리를 듣고 네 생각이 나서 어머니한테 어쩌자고 저런 인간을 보내느냐고 불평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수행원으로 끼워 넣어놨지 뭐냐. 예전원보다야 추밀원이 출셋길이다 이거지.
어휴, 아들은 못났는데 어머니만 꿈이 너무 야무지셔서 살기가 힘들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가서 너랑 후작이랑 싸움이나 말리자 싶었던 건데.”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후작하고 싸울 상대가 되겠습니까.”
다비드가 킥킥 웃었다.
“후작이 칼 못 뽑고 꼬리 내리게 만든 유일한 사내인 주제에 그런 소리는 하지 말지?”
“그거 그런 상황 아니었고요. 그땐 이유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알고말고. 너야 딱 한 가지 이유만 없으면 조용히 지내잖냐.”
그렇게 말해놓고도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는지 조금 후, 다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혹시 너 이러고 있다가 술잔 같은 거 집어던지는 거 아니지?”
로랑이 눈을 가늘게 떠 보였다.
“저 이제 스무 살 아닙니다, 도벨 비서관님.”
로랑은 실제로 스무 살에 술잔은 아니고 포크를 집어던진 전적이 있었다.
다비드도 함께 있었던 어느 야외 모임 자리였는데 에투알의 실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떠드는 누군가의 모자에 달린 깃털을 들고 있던 포크 한 자루로 날려보내고는 “수련병이 이 정도니까 정식 에투알의 실력은 알아서 상상하라”고 말했던 사건이었다.
로랑도 어렸기에, 그리고 술을 몇 잔 마셨기에 했던 일이지만 금세 에투알 본부에 누군가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불려가서 한바탕 야단을 맞고 경위서까지 써야 했다. 그 뒤로 또 그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때 비비엔이 척척 들어와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받았다.
“스무 살 아니니까 검을 뽑으면 무슨 일이 날지도 잘 아시겠죠. 그런 의미에서 포도주나 한 잔 드시고, 저도 좀 주시죠.”
그러면서 어디선가 들고 온 새 잔 두 개를 나란히 내려놓고 로랑을 빤히 보았다. 로랑도 비비엔을 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말없이 술을 따라 밀어주며 물었다.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립니까?”
“보아하니 저한테도 삼 분 안쪽 같은데, 자칫하다가는 주황 딱지 밟을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라도 마시고 날 좀 무디게 하시란 겁니다.”
“…….”
잠시 후 둘은 술잔을 마주치고는 금세 마셔버렸다. 다비드가 고개를 갸웃대다가 비비엔을 건너다봤다.
“주황 딱지인지 그게 난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카스티유 경한테 술 권하는 거, 그거 잘하는 일이 맞습니까?”
“네.”
“쟤가 술이 그리 세지 않은데?”
“그러니까요.”
다비드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술기운이 돌면 적당히 참고 넘어갈 일에도 발끈하게 되지 않던가?
다비드는 비록 동생이 에투알이었지만 본인은 몸 다루는 재주가 형편없었다. 검술도 어려서 흉내만 조금 내다 말았다. 그렇다보니 에투알의 검술이 몸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에투알이 가장 강해지는 때는 죽음을 앞뒀을 때다. 그다음은, 평상시다. 그들은 평상시에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과음이나 과식, 여흥 등 무절제한 생활을 피하고 비상시가 아니라면 하루 일과를 깨뜨리는 법도 없었다.
군인이지만 마치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진심으로 싸울 마음을 먹고 칼을 뽑았을 때는 팽팽히 당긴 활시위처럼 반응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난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술 한 잔도 뚜렷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에투알은 시간의 흐름이나 거리 가늠에 예민한 것처럼 몸의 변화에도 민감했다.
다만 비비엔이 몰랐던 것은 로랑이 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도 포도주를 몇 잔 마셨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똑같아 보였으니까. 아니, 사실 비비엔은 지금껏 로랑과 술을 마셔본 일이 없었으므로 변화가 있다 한들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지 못했다.
여기 들어와 앉은 것부터가, 아니 가다 말고 비비엔을 봤다고 굳이 내려와 말을 붙인 것부터가 평소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만큼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때 후작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아노마라드 놈들은 명예심이 없어서 저들에게 이득만 된다면 무슨 짓이든 사양을 안 하지. 알다시피 엉터리 교단 따위를 만들었을지라도 돈만 퍼부으면 금세 멀쩡한 꼴로 탈바꿈하지 않던가? 그런 탈을 쓴 자들이 오를리에 들어와서 학교 같은 데를 다니며 평범한 학생인 체하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었던 로랑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들 알겠냐?”
하지만 곧이어 로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특별한 단어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꽃 따위로 학교를 뒤덮어서 공녀님의 생신을 축하한다느니, 그런 아부를 하는 놈들의 정체도 필시 그런 놈들과 연결이 있을 테지. 다들 조심해야 해. 여기라고 그런 놈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공녀’만큼 로랑의 귀에 잘 들어오는 단어도 없었다. 다비드가 크게 당황하며 후작을 건너다보더니 말했다.
“원래 헛소문 좋아하잖아. 어디서 또 이상한 소리라도 들었나 보지. 일일이 다 상대하려면 입만 아프다니까.”
“…….”
로랑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캉페슈 후작의 목소리는 다소 낮아졌지만 로랑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나이가 어리면 그런 놈들을 쉽게 알아보지를 못해. 경험이 부족하거든? 그걸 그놈들도 알지. 왜 하필이면 공녀님을 찍어서 환심을 사려 들겠어?
모르지, 벌써 한두 번 만나줬을지도. 공녀님이 좀 고독하시잖아. 사교계의 예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구니까 귀부인들이 상대를 안 해주지.
그러니 사탕발림하는 인간들이 여간 아쉽지가 않을 거 아니야. 누가 충심으로 보살펴드려야 할 텐데. 워낙 남의 말을 듣는 성미가 아니셔서 말이야.”
“공녀님 주위에 조언해주시는 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설마 한 분도 없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