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80)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80화(80/143)
80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7)
“조언자? 있긴 누가 있어? 아노마라드 귀족이랑 결혼한 여자? 공녀님 귀에 아노마라드 얘기를 속살거려서 나라를 망치는 그런 매국노들이야말로 다시는 오를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추방령을 내려야 하는데.
그다음에는 뭐, 에투알밖에 더 있나? 그런데 공녀님은 그 에투알을 좀 멀리해야 해. 에투알을 그만뒀다지만 그러고도 계속 그놈들이랑 어울리니까 귀공녀답지가 못하고, 사납고 제멋대로인 게야.
사내애들하고 어울려 노는 여자아이들이 꼭 그렇거든? 내 친척 중에도 그런 애가 있었는데 꼭 하는 꼴이 봉두난발에 도깨비같이 하고는…….”
후작의 말이 조금 거슬린 누군가가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에투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건 대단한 일인데…….”
“인정?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모른단 말이야. 예로부터 에투알에는 ‘명예 에투알’이라는 것이 있어. 대공 가문 출신인 분들은 적당히 흉내내며 날짜만 채우면 에투알 자격을 준단 말이야. 그런데 공녀께선 그것조차 못 받았는데 뭘 봐서 실력을 인정받아?
검 좀 쓴다고 소문이 나서? 그야 돌아가신 대공자한테 처진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무리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예의상 해주는 소리잖아. 대공자의 검을 왜 갖고 다닌다고 생각하나?”
파팽 소령은 무척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아하, 공녀께서 그 인간 같지 않다는 에투알에서 어떻게 버티셨나 했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역시 소문만 믿을 게 아니네요. 당연히 특혜가 있었지.”
로랑이 쥐고 있던 열쇠 달린 나무패가 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다비드가 벌떡 일어나면서 로랑에게 제발 참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런 다음 서둘러 후작 곁으로 갔다. 허리를 굽히며 뭐라고 속삭이자 후작이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직 초저녁이야! 이 정도로 취하긴! 나를 뭘로 보고…….”
또 다른 자가 물어왔다.
“그럼 공녀님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걸 믿었나? 열아홉 살 먹은 아가씨치고는 좀 쓸 만할지 몰라도 제대로 상대하면 한 칼 거리도 안 되지. 귀부인들의 검술이란 게 예로부터 별것 있던가? 괜히 그런 걸 배워봤자 품성만 거칠어지는 게야.”
“하지만 공녀님하고 대결해서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던가요?”
“멍청하긴. 상대가 공녀님인데 알아서 져드려야지. 그런 식으로 근사하게 포장해왔지만 나처럼 검을 오랫동안 연마한 사람의 눈은 소문 따위로 못 속이거든?”
그때 문가 테이블 쪽에서 로랑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곳에 공녀 연하를 잘 아는 분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군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로랑의 얼굴을 발견한 캉페슈 후작은 순간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곧 키들키들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여기는 에투알도 들어오나? 그런 줄 알았으면 말조심 좀 할걸 그랬네? 난 장교들만 들어오는 줄 알았지. 고귀한 가문 출신들 말이야.”
‘경’으로 불리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고귀한 가문 출신은 아닌 로랑을 비꼬려는 의도가 틀림없었지만 로랑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여기선 카스티유 대령이라고도 합니다만.”
조금 전까지 그까짓 임시 직책이 다 뭐냐고 생각하던 로랑은 자신이 생각해도 뻔뻔스럽게 대꾸하고는 식탁 뒤를 돌아 나오며 말을 이었다.
“공녀 연하가 에투알에서 특혜를 받으셨는지 궁금하시면 제가 잘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로랑은 후작 앞으로 다가가는 대신 연회장 옆의 빈 공간, 샹들리에가 걸린 곳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사실상 결투를 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널찍한 자리였다.
“연하께선 이미 열다섯 살 수련병 시절에 당시 정식 에투알이던 저보다 뛰어나셨죠.”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꽤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로랑을 자주 보아온 알리스 공녀 연대의 장교들이 그랬다. 로랑은 에투알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지 않던가?
물론 로랑은 킵에 온 이래 훈련 외의 일로 검을 뽑은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일이 없었다. 이유가 있든 없든 에투알과 대결하고 싶어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저를 못 꺾는 실력이라면 감히 연하께 덤벼들지 않는 편이 현명한 행동일 겁니다.”
캉페슈 후작과 마주 앉았던 자들이 옆자리로 비키는 바람에 후작과 로랑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술잔과 접시로 난잡한 테이블뿐이었다. 그 너머에 비스듬히 앉은 후작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 말은 지금 너…… 아니지, 대령과 여기서 칼 한번 맞대보자는 뜻 같은데, 내가 대공 전하께서 임명한 참사관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닌지?”
캉페슈 후작의 말대로 파견 여단의 군대에 소속된 로랑이 참사관과 결투하는 것은 큰 문제를 불러왔다.
후작이 대귀족이라는 사실보다 공무로 파견되었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 대공 전하가 임명한 관리를 죽이는 것은 개인적인 결투로 변명될 수 없었다. 대공 전하의 일을 방해한 셈이 되는 것이다.
비비엔이 말한 ‘주황 딱지 밟을 일’이 그런 사태를 가리킨 말이었다. 에투알 사이에서 주황 딱지는 대법원을 뜻하는 은어였다.
군사 법원이 그곳을 상징하는 검정 깃발 때문에 ‘검정 딱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대법원의 법관들이 입는 옷은 주황색이기 때문이다.
본래 군인은 문제를 일으켜도 갈 일이 없는 곳이었지만 상대가 추밀원 소속의 참사관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랑은 캉페슈 후작을 보았다. 눈빛만으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담은 채로 말했다.
“우리 모두가 대공 전하의 지엄한 명을 받들어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대공 전하께서 친히 중임을 내려주신 공녀 연하의 기사로서, 조금 전의 무례한 발언에 대해 정정 및 정식 사과를 요구합니다.”
“하!”
후작이 고개를 젖히며 짧은 비웃음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난 어디까지나 공녀 연하의 신변과 평판을 걱정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소. 여기, 내 말을 들은 자들도 다들 동의할 거요. 그렇지 않소?”
“연하께서 남의 말을 듣는 성미가 아니시고, 사납고 제멋대로이며, 돌아가신 대공자한테 처진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무리하고 있고, 제대로 싸우면 한 칼 거리도 안 된다는 소리가 신변과 평판을 걱정하는 말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로랑이 캉페슈 후작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조목조목 짚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로랑이 이곳에서 대령이라 해도 상대는 대귀족이었으므로 진심으로 싸움을 걸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어진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제정신으로는 그런 개소리를 곧이들을 수가 없군요.”
“…….”
안 그래도 붉던 캉페슈 후작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오르고 웅성이던 소음조차 싹 멎었다. 불안한 침묵, 이어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밀쳐낸 술잔과 접시들이 떨어져 박살이 났다.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옆에 있다가 혹시라도 후작의 기분을 거스를까 겁을 먹은 사람들은 멀찍이 비켜났다. 수행원들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며 난처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참사관님께 그 무슨 해괴한 말을…….”
“이런 일은 반드시 대공 전하께서…….”
그들이 말을 맺지 못한 것은 이쪽이 후작이라면 저쪽은 공녀 연하 대신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의 가신 한 명만이 소리쳤다.
“멀찍이서 말씀을 엿듣다가 멋대로 오해를 해놓고 감히 후작께 무례한 망발을 지껄이다니, 당장 사죄하지 못할까!”
갈까 말까 머뭇대던 파팽 소령도 힘을 얻었는지 불쑥 돌아서서 말했다.
“카스티유 대령께서도 참사관님께 예의를 지키셔야 하지 않습니까? 여기는 계급 없는 에투알이 아닙니다. 대령님의 계급은 어디까지나 임시고 말이죠.”
로랑의 눈썹이 짜증스럽게 꿈틀거렸다.
“아, 임시니까 소령이 대령에게 잔소리를 해도 괜찮다 그 말이군요. 대공 전하께서 임시 계급을 내리신 뜻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누구나 대공 전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러니까 대공 전하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신 공녀 연하를 음해하는 말에 ‘당연히 특혜가 있었지’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것이겠고요.”
다른 연대장들이 자리에 없었으므로 이곳에서 대령보다 계급이 위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캉페슈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뒤로 나동그라지고 테이블이 들썩여 술잔들이 넘어지고 깨졌지만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그저 쩔쩔맸다. 반면 로랑은 얼굴색도 변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공녀 연하께서 이곳에 계셨더라면 그런 말을 한 자들의 무엄한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이십 초 정도 걸리리라고 확신합니다. 한꺼번에 상대하신다면 오 초 정도 절약되겠죠.”
비현실적인 숫자가 연달아 나오자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에투알이 최상의 상태에서 대결할 때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알 기회가 없었다.
“저는 연하가 아니므로 사십 초 정도는 걸릴 것 같군요. 한꺼번에 덤비면 저도 십 초 정도는 절약할 수 있을 테니 그쪽으로 하시든가요.”
그런 말을 하면서 칼자루도 건드리지 않고 편안히 서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저 말이 농담인지 위협인지 판단을 못하고 머뭇댔다. 로랑의 말을 들으며 정작 이마를 짚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이쿠, 쟤 취했잖아. 저거 지금 술주정인데…….”
로랑을 오래 보아 와서 잘 아는 다비드가 이마를 문질러대다가 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비비엔이 다비드를 봤다.
“술주정이라고요?”
“쟤가 원래 술 취하면 평소 머릿속으로만 재던 수치들이 입 밖으로 막 튀어나옵니다. 하여튼 아까 당신이 괜히 술을 줘서 지금 큰일나게 생겼잖습니까?”
비비엔이 고개를 저었다.
“싸움을 막는 건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들어온 이상 이미 예견된 결과였죠. 저는 그저 주황 딱지까지 안 갈 정도로만 완화해보려고 했는데.”
비비엔은 입술을 꽉 다문 로랑의 옆얼굴을 한번 보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스티유 경의 주량을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네요.”
그때 캉페슈 후작이 테이블을 돌아 나와 로랑을 향해 걸어왔다. 대략 열 걸음쯤 남았을 때 로랑이 말했다.
“거기서 멈추시죠. 한 걸음만 더 오면 제가 당신을 찌르는 데 삼 초밖에 안 걸리게 됩니다.”
“가문도 없는 천한 놈이…… 건방지게 지껄이지 말란 말이야!”
후작이 검을 뽑아 달려드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비록 술에 취하긴 했지만 왕년의 명성에 걸맞게 민첩한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