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8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82화(82/143)
82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9)
수문장은 ‘보르 거리의 식당으로 가는 식료품’이라고 답했다. 안쪽에 밀가루 자루만 잔뜩 실려 있더라는 것이었다.
로랑은 마차가 달려간 쪽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생각했다. 밀가루를 수레가 아니라 마차에 실을 필요가 있나?
동시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오늘 공녀 연하께서 가시기로 한 쇼몽 저택이 보르 거리에 있지 않던가.
물론 그 거리에는 쇼몽 저택 말고도 수많은 집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녀가 오늘처럼 다른 귀족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하필이면 뭔가가 겹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백작부인은 워낙 가까운 사이인지라 근접 호위를 하는 에투알 대신 일반 근위병이 따라가기로 했다던 기억도 났다. 왜 그랬을까? 혹시 백작부인이 요청했던 건 아닐까?
밤새워 달려가도 제때 닿을지 모를 여정을 앞두고 있었지만 로랑은 결단을 내려 마차를 뒤쫓아갔다.
마음속에서 망상이 지나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체했다. 단 한 번만, 오늘밤까지만 확인하자. 틀렸다면,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 없이 출발하자. 착오의 대가는 자신이 치르면 된다.
그 마차는 과연 식당이 아니라 쇼몽 저택 쪽으로 향했고, 저택으로 들어가기 직전 로랑에게 붙들려 멈춰 세워졌다. 거기서 끌어냈던 시종을 저택 밖에서 공녀를 기다리던 근위병들에게 맡겨놓고 미처 마차를 조사할 틈도 없이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로랑이 살롱에 샤를로트가 없음을 확인하고 위층으로 뛰어올라갔을 즈음 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샤를로트가 갇힌 방을 찾아내어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이미 저택은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모조리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캉페슈 후작은 시종을 살해했다.
뒤늦게 달려온 다른 에투알들이 저택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도망친 하인 몇 명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밀가루가 실려 있던 마차는 불티가 튀어 타버렸다고 했다.
증거는 모두 사라졌다. 오직 공녀를 구했을 뿐.
그날 세운 공으로 로랑은 기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면 그런 순간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느냐며 신기해했다. 사실상 예지력 아닌가? 또는 평민이 새파란 나이에 작위를 받다니 운도 좋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로랑은 그날의 일을 명예롭게 기억하지 않았다. 자신은 공녀를 훨씬 잘 지켰어야 했다. 모르는 사이에 공녀의 목숨이 첨탑 끝에 내걸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기에 로랑은 사람들이 그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기사 작위 또한 영광스럽다기보다 막중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 했다. 그걸 막을 책임은 이제 자신에게 있었다.
샤를로트와 그날 이야기를 나눈 일은 그후로 딱 한 번이었다. 작위를 받은 다음날 궁전의 정원에서였다.
샤를로트는 로랑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더 조심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로랑은 말없이 몇 걸음 내처 걷다가 뜻밖의 대꾸를 했다.
“내키지 않는 사교 모임 같은 건 앞으로 무시하시고 좀더 재미있는 취미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귀족들이 놀라 자빠질 만한 게 좋겠네요.”
샤를로트는 놀란 눈으로 로랑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비꼬는 것인가 싶었지만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눈을 들여다보자 금세 진심임을 알았다. 잠시 후 샤를로트가 나직이 속삭였다.
“왜, 내가 재밌는 일도 못해보고 가련하게 죽어버릴까 봐?”
“열일곱 살이란 원래 목적도 없이 쏘다니다가 싼 맛에 형편없는 물건도 사보고, 웃기지도 않은 얘기에 허리가 꺾어지도록 깔깔 웃고, 얼굴만 멀쩡한 멍청이를 만나봤다가 너무 멍청하면 엉덩이도 걷어차버리고 그러면서 보내는 겁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웃지도 않았으므로 샤를로트도 웃지 못한 채 정원의 잎사귀를 하나 비틀어 따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얘기 같네.”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죠.”
“로랑의 열일곱 살은 수련병으로 구른 기억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그때 그러면서도 할 건 다 했거든요.”
샤를로트가 입술을 비죽였다.
“쳇, 잘난 체하긴.”
잠시 둘 다 말이 없었다. 이윽고 샤를로트가 생각한 시간에 비해 무척 가볍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해볼게. 그 대신에.”
로랑이 돌아보자 샤를로트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도 죽지 마, 카스티유 경.”
“…….”
공녀의 입술로 처음 불려서였을까, 그 이름은 제 것이 아닌 양 어색하게 들렸다.
그러나 대답을 망설인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각오가 없이는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공녀 연하가 흠 없는 칼날로 보일지라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열일곱 살 소녀가 늘 긴장해서 도사린 채 사는 게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로랑이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더욱 안타까워했는도 모른다. 악의의 말뚝이 곳곳에 박힌 안개 속 차가운 호수, 그런 곳에서 태어나 자라 온 공녀를.
그분께 조금의 여유라도 드리고 싶다. 그러자면 호위가 더욱 까다로워질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적들은 그분의 약한 부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영영 알지 못하게 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분의 한 걸음 앞에 설 것이다.
에투알 브릴랑테가 되어서.
그래서 로랑은 ‘네’라고 대답하는 대신 팔을 쭉 펴서 정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딜 가시든 좋은데 되도록 마른 땅으로 부탁합니다.”
사를로트의 입가에도 힘이 들어갔다.
“응. 물에 빨려 들어갈 때 무섭더라.”
이튿날, 로랑은 늘 일어나던 시각에 깨어났다. 뭔가 심각한 꿈을 꾼 것처럼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샤를로트 공녀를 본 듯도 한데.
머리가 약간 지끈거렸지만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 괜찮아졌다. 하지만 얼굴에 물을 끼얹었을 때 어제 일이 떠올랐고, 로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얼굴을 세차게 문질러댔다. 아아, 젠장. 이건 또 뭐람.
그날은 지휘를 맡게 된 연대의 사열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 9시, 알리스 공녀 연대에서는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어젯밤에 있었다던 일이 마구 부풀려져서 퍼지는 중이었다.
“새로 연대장 되신 카스티유 대령이 참사관님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 꿇렸다는 거야. 완전 귀신같았다던데. 어휴, 그 구경거리를 장교들만 보다니.”
“연대장님의 검에 입까지 맞췄다더라고.”
“검에 입맞추는 거 충성 맹세 아니었냐?”
“야, 난 에투알 말로만 어떻다는 둥 들었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싸우는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이거 좀 겁나네.”
“솔직히 지금까지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되게 귀찮게 군다 싶기만 했는데 갑자기 말 좀 잘 들었어야 했나 싶어졌고.”
“오늘부터 완전 빡세게 굴리는 거 아니야?”
“저번 연대장님하고 다르긴 하겠지. 일단 새파랗게 젊잖아.”
“젊은데 그런 실력이라니 성질도 더럽지 않을까?”
“으흠, 흠.”
그때 부관인 보두앵 소령이 헛기침을 했고 병사들의 수군거림은 금세 가라앉았다. 잠시 후 에투알 제복 대신 새 군복을 입은 로랑이 나타나 걸어왔다.
“일동 차렷!”
로랑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열을 마쳤지만 병사들이 평소와 달리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자기 얼굴을 흘끔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꼭 그랬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로랑은 이렇다 할 연설 없이 오후 일정만 말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대공국의 영광을 위해!”
“대공국의 영광을 위해.”
로랑이 자리를 뜨자 등뒤에서 소곤거림이 잔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모르는 체하고 연병장을 빠져나가려다가 한쪽에 서 있는 비비엔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제 같이 있었죠? 그냥 가버려서 미안합니다. 사실은…….”
머리가 맑아지면서 어젯밤에 퍼부은 말들이 차례차례 떠오르고 있었으므로 로랑은 얼굴을 약간 붉혔다. 발끈한 나머지 입이 저절로 움직였을 뿐 로랑은 자신이 말재주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평소 연설을 길게 늘어놓는 것도 싫어했다.
비비엔이 로랑을 올려다보더니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어제처럼 날마다 드셨으면 지금쯤 군대 개편도 다 끝났을 텐데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