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8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84화(84/143)
84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11)
“아, 그건…… 그냥 페터라고 부르세요.”
곁에서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페터? 너무 존재감 없는 이름인데. 청어절임이 차라리 낫겠다.”
막시민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으로 데보라를 힐끔 봤다. 그런데 뜻밖으로 페터라는 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뭐, 그럴까요? 생각해보니 누가 저한테 별명을 지어준 것도 처음이거든요.”
별게 다 처음이라 좋겠네, 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막시민도 줄곧 청어절임이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페터라고 부르려니 어색한 건 사실이었다.
지금 창문을 열고 ‘페터!’라고 부르면 거리 곳곳에서 창이 열 개쯤 열릴 것 같기도 하고.
“성은 뭔데?”
“바우어인데요.”
다시 창을 열고 ‘페터 바우어 씨!’라고 외치는 상상을 해보았다. 창이 세 개는 열리지 않을까?
“……알았다. 청어절임 해라.”
이름으로 실랑이하는 사이 데보라가 남은 그릇을 바구니에 도로 챙겨 넣었고 막시민은 “어휴, 추워”라고 중얼대며 창을 닫고 왔다.
이스핀은 쿠션이 뜯어진 의자에, 막시민은 긴 의자 끄트머리에, 데보라는 뒤집어놓은 쓰레기통에, 청어절임은 밑 빠진 의자에 걸터앉아보려 애쓰는 가운데 데보라가 체크무늬 식탁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예쁘네요. 소풍이란 게 내 삶에 존재했던 게 언제였던가 싶기도 하고.”
“다들 소풍 좋아하네. 언제 한번 갈까.”
이스핀이 턱을 괴며 중얼거리자 막시민이 검지를 세워 한 바퀴 돌려 보이며 핀잔을 주었다.
“이 멤버가 소풍 다닐 사이냐? 그럴 날씨도 아니고.”
“아니긴 하지만, 때와 상대를 골라가며 가려다가는 죽을 때까지 못 가는 수가 있거든.”
어쩐지 시무룩한 목소리였지만 막시민은 굳이 반응하는 대신 말했다.
“소풍은 나중에 알아서 가든지 말든지 하고, 아침도 다 먹었으니까 내가 첫째로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가 꼭 이 방에 모여 있을 필요는 없는 사이라는 거야.
빈집털이 하다가 집주인과 마주친 놈들이 왜 도망치지도 않고 내 뒤를 줄레줄레 쫓아왔을까, 이 지점부터 시작해보자.
자, 너부터. 왜 따라왔냐?”
막시민이 청어절임을 가리키자 그가 얼른 대답했다.
“저녁을 사줄 것 같아서요.”
“그게 다야?”
“배고팠거든요.”
“배고프다고 아무나 막 쫓아가냐?”
집 나온 청소년한테나 던질 법한 말이었지만 청어절임은 막시민보다 몇 살이든 많으면 많았지 적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청어절임이 눈치를 보며 비슬비슬 웃었다.
“그러니까요. 제가 달리 갈 데가 있었으면 빈집에 숨어들어 살아보려는 궁리를 했겠느냐고요.”
“너, 플레상스 경한테 선금을 주고 무슨 일을 부탁했다고 하지 않았냐? 갈 데도 없다는 인간이 탐정한테 의뢰할 돈은 있었다고? 똑바로 말 안 할래?”
“와, 기억력 좋다. 근데 그게, 의뢰를 한 건 맞는데…… 그것도 누가 줬던 거라서…… 원래 그 사람이 저한테 심부름을 시켰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청어절임은 본래 어떤 사람의 심부름으로 플레상스 경에게 편지를 전하러 왔었다고 했다. 플레상스 경은 답장을 써주면서 전하고 돌아오면 심부름값을 두둑이 주겠다고 약속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보니 그 사람은 사라져버렸고, 다시 플레상스 경에게 돌아갔지만 플레상스 경마저 사라진 후여서 받아야 할 심부름값은 허공으로 사라진 꼴이 되었다.
화가 난 청어절임은 한동안 플레상스 경의 집을 기웃거리며 언제 돌아오나 기다렸지만 어느 날 제 집으로 돌아갔더니 도둑이 들어 온 집을 뒤집어엎었고 가족들은 친척집으로 피신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척집 형편도 뻔한지라 뒤따라 가봤자 낄 자리가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플레상스 경의 빈집에 들어가 버텨보려는 궁리를 했다.
플레상스 경이 돌아오면 심부름값을 안 줘서 그랬다고 우기면 될 것 같았다나. 물론 값나가는 것을 발견하면 슬그머니 들고 도망칠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막시민이 인상을 썼다.
“그럼 넌 플레상스 경한테 아무것도 의뢰한 적이 없었던 거잖아? 선금도 준 적이 없고.”
“아 그거요. 주긴 줬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심부름 시킨 사람이요.”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편지를, 봉랍이 조금 뜯어졌기에, 어차피 받을 사람도 없어졌고, 해서 안을 좀 봤죠. 거기에 선금은 잘 받았다, 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뭐, 선금을 주긴 준 거잖아요.”
“그런데 그 선금이 왜 네가 준 걸로 둔갑하는데?”
막시민이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 시늉을 하자 듣고 있던 이스핀도 “대체 왜 이런 인간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청어절임이 항변했다.
“그렇지만 11구에서 여기까지 심부름을 올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거든요! 처음에는 고작 동전 열 닢짜리였는데, 11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려면 한나절이나 걸리고, 마차를 타버리면 5엘소밖에 안 남을 테니까 당연히 걸어와야 하고, 주소를 찾자면 글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야 네가 다른 할 일이 없었던 거겠지. 바빴으면 그 돈 받고 왕복 하루를 쓰려고 했겠냐? 하여튼 그건 됐고 내가 보기에 이상한 건…….”
막시민이 생각을 훑는 사이 이스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심부름값 너무 싸네. 시킨 사람이 못된 건가, 여기 물가가 형편없는 건가, 아니면 켈티카에 실업 문제가 심각한 건가…….”
“그렇죠? 맞죠? 제가 착한 거 맞죠?”
청어절임이 반색하는데 이스핀이 말을 맺었다.
“……네가 한심한 건가. 그런데 얘기를 듣고 있자니까 네 번째에 무게를 두고 싶어지네. 심부름값은 보통 선불이잖아. 그런데 왜 심부름값도 안 받고 플레상스 경의 답장을 전하러 간 거야?”
“그게 플레상스 경이 선불로 받으면 30엘소,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면 100엘소 금화를 주겠다잖아요. 멀쩡한 저택에 사는 신사니까 약속은 지킬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사라져버릴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느냐고요.”
이스핀과 막시민은 동시에 다른 이유로 놀랐다.
“100엘소? 무슨 밀가루 반죽도 아니고 이 동네는 물가가 왜 이리 극단적이야?”
“잠깐, 너 혹시 내가 그 100엘소를 대신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따라온 건 아니겠지?”
청어절임은 막시민을 흘끔 쳐다보더니 딴전을 피웠는데 보아하니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아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돈 문제가 나오자 진지해진 막시민은 체크무늬 테이블보를 탕 소리가 나게 짚으며 선언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다. 할아버지가 멋대로 선심을 쓴 건 나랑 아무 상관도 없고, 젠장할 심부름값이 세상에 100엘소면 내가 지금부터 당장 거리로 나가서 전업 심부름꾼 한다. 그나저나 편지 있지? 내놔봐.”
막시민의 그런 말은 플레상스 경의 손자라는 신분이나 고상한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청어절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꺼내려다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잠깐만요. 이 편지를 당신한테 주면 난 편지를 전한 게 되니까 진짜로 당신이 심부름값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헷갈릴 뻔했지만 막시민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청어절임을 노려봤다.
“야, 그 편지는 우리 할아버지가 쓴 거잖아. 나한테 준들 발송인에게 되돌린 것밖에 안 되는데 무슨 놈의 심부름값이 있냐? 그건 수취인한테 갖다준 다음에, 할아버지를 찾아서 청구하든가 말든가 해라. 멋대로 뜯어버린 편지에 심부름값을 줄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다음 엉거주춤 품에 손을 넣고 편지 귀퉁이를 쥐고 있던 청어절임의 손에서 편지봉투를 낚아챘다. 봉투는 예상대로 봉랍이 사라진 상태였고, 안에는 편지 한 장과 뭔가 단단한 것이 들어 있었다.
무명의 의뢰인 귀하
안전하게 계시다니 다행스럽습니다. 제 주변은 아직까지 평온합니다. 그자가 사람을 한 번 보내왔으나 소식을 모른다고 하자 돌아갔습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선금은 잘 받았습니다만 제 관점에서는 다소 지나친 금액이라 일부 돌려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지금은 직접 찾아갈 수도 없고 심부름꾼에게 맡길 액수도 아니고 하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 할 듯합니다.
주변이 걱정되시겠지만 저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 너무 걱정 마시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십시오. 그럼, 말씀하신 열쇠를 동봉합니다.
제레미 드 플레상스
봉투를 뒤집자 열쇠가 굴러 나와 손에 떨어졌다. 장식도 고리도 없이 단순하게 생긴 놋쇠 열쇠였다. 막시민은 편지를 한 번 더 주의깊게 읽더니 이스핀에게 건네주고는 청어절임을 봤다.
“여기 무명이라고 돼 있지만 넌 이 사람을 만났을 것 아니야? 뭐하는 사람인데?”
“아 그게, 정확히 말하자면 만난 거랑은 좀 다르고, 그 사람의 하인인가?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하인이라고? 그럼 귀족이란 말이야? 그런 사람이 자기집에서 사라졌다고?”
“집이 아니고요. 카페였어요. 귀족인지 그런 것까진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 편지를 준 사람이 답장을 받으면 단골 카페로 찾아오라고 해서 갔는데 거기 없었단 말이에요.”
“카페에다가 맡겨두는 방법도 있었을 거 아냐?”
“그러다가 그 사람이 저 없을 때 편지를 가져가버리면 제 심부름값은요?”
“어휴, 넌 하여간 심부름 한 번에 심부름값을 양쪽에서 다 받으려고…….”
“어차피 둘 다 못 받았는데…….”
막시민은 들고 있던 편지봉투로 청어절임의 어깨를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의견을 묻듯 이스핀을 봤다.
편지를 다 읽은 이스핀은 본래대로 접어 막시민에게 건네주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청어절임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스핀의 미소를 본 청어절임은 어제의 경험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까부터 듣고 있자니 너, 이야기를 미묘하게 왜곡한다.”
이스핀의 말을 듣자 청어절임은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되어 도망갈 길이라도 찾듯 주위를 흘끔거렸다.
“제가요? 제가 뭘요?”
막시민이 몸을 조금 내밀더니 청어절임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부터 잘 들어. 네가 한 얘기를 하나씩 맞춰볼 테니까.
네 말대로라면 넌 편지 받을 사람과 단지 길이 엇갈렸을 뿐인데, 양쪽에서 심부름값을 받고 싶어서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다가 정작 중요한 편지를 전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지.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충분히 기다리지 않았다든가.
왜냐면 플레상스 경이 주기로 한 금화가 눈앞에 아른거렸을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편지는 일단 전달한 걸로 치고 금화부터 받고 싶어서 플레상스 경한테 돌아갔다는 건데…….”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