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87)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87화(87/143)
87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14)
“이 짜증나는 놈은 아주 거짓말이 입에 붙었어. 의뢰니 선금이니 금화니 심부름꾼이니 다 거짓말이지. 이런 놈의 정체를 알아내려니 머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단서가 전혀 없진 않은데 첫째로 넌 할아버지의 의뢰인 중에 파울이라는 자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둘째로 11구에 있다는, 데보라도 아는 카페 이름에 반응했다는 거야. 파울은 11구의 루이제 거리에 살고 있었지. 그리고 데보라가 말한 카페의 단골이었겠지.
다시 말해 넌 파울을 정말로 만났거나, 아니면 적어도 파울이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고 몸을 숨기게 된 사연을 빤히 알고 있었어. 하지만 파울을 돕거나 할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할아버지한테 접근하려고 들었단 말이야. 뭘 얻으려 했을까?
할아버지한테 가짜 편지로 낚시질을 해서 파울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던 거라면 넌 쇠의 왕의 끄나풀이겠지. 하지만 아까 아니라고 팔짝 뛰는 걸 믿어주기로 한다면 할아버지가 사라진 후 그 집에 죽치고 앉아 구석구석 뒤지고 있을 이유, 그리고 금전을 주고받는 단순 의뢰인 관계인 파울과 할아버지의 속사정을 파악하고 있을 이유는 하나뿐이야.”
청어절임은 아무 생각 없는 행인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으나 막시민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넌 쇠의 왕의 적인 거지.”
청어절임을 보는 데보라의 눈빛에 의혹이 서렸다. 어쩌면 ‘저렇게 별것 없어 보이는 자가 감히 쇠의 왕을 적대시한다고?’ 하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청어절임은 얼른 다시 스쳐가는 행인 같은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막시민을 보는 시선에는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아, 물론 할아버지의 원수여서 그러고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긴 한데 내가 그런 입장이라면 원수가 쇠의 왕에게 잡혀간 시점에서 깔끔하게 손 털고 박수 치며 물러났을 것 같거든.
하지만 넌 계속해서 그 집에서 버티면서 뭔가를 손에 넣으려고 애를 썼지. 그러니까 이제 슬슬 그게 뭔지부터 말해보자. 또 거짓말 하면 진짜 창밖으로 던져버리든가 해야지.”
“그런 건 나한테 맡겨둬. 할 수 있는 거 되게 많아.”
청어절임은 이스핀을 힐끔 보더니 막시민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여가며 말했다.
“아가씨는 무서우니까 이쪽으로 붙어야지. 그나저나 플레상스 경 손자, 당신한테는 좀 놀랐어. 당신 같은 사람하고 일찌감치 알고 지냈으면 나도 제법 살기 편했을 텐데. 아쉽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뭐 달리 듣진 말고.”
“아는 사이라고 내가 널 도와준다는 법 있냐? 지금도 없거든?”
“물론 없겠지. 내가 보기에는 좀 귀여워야 도와주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귀엽게 보이려나.”
그러면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쳐다보는 바람에 막시민과 이스핀은 그만 할말을 잃어버렸다. 청어절임은 싱긋 웃었지만 말을 잇자 웃음기가 사라졌다.
“적이라, 그래 적이지. 쇠의 왕의 목을 노릴 만큼 대단한 능력이 나한테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증오하는 건 내 마음대로지.
그자는 내 원수야. 하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 밝힐 순 없어. 꽤 많은 인간의 목숨이 얽혀 있거든. 나를 포함해서. 물론 난 그자가 두려워. 하지만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내 손끝에 그자의 목숨을 짓이길 힘이 담긴다면.”
청어절임의 눈에 일순 생기 넘치는 빛이 스쳐갔다. 삭, 소리를 내며 집게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으깨버릴 거라고.”
“…….”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진심인 걸까? 그런 판단을 자신이 꼭 내려야 할까? 막시민은 말 속의 논리적 빈틈을 찾거나 흩어진 단서 속에서 진실을 추리해내는 데는 능숙했지만 인간의 진심을 판별해야 할 때는 망설여졌다.
그런 걸 눈치챌 직감은 충분했지만, 그런 판단에 책임을 지기가 싫었다. 그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그리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을 때가 편했다. 믿으면, 그만큼 책임이 발생한다.
자신은 여러 사람을 책임질 그릇이 못 되었다. 서너 명만 범위에 들어와도 과부하가 걸렸다. 그의 과부하는 주로 짜증을 내는 걸로 표현되었다.
막시민이 막 짜증을 내려 했을 때 이스핀이 말했다.
“알았어. 방금 그 말, 내가 믿어줄 테니까 다음 얘기 해봐.”
그런 말을 하는 이스핀의 옆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막시민은 조금 궁금해졌다. 저 애는 어떻게 저렇듯 자신 있게 ‘믿어주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간 봐온 바로는 순진해서는 절대로 아닌데, 제 판단의 결과를 깔끔히 책임지겠다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청어절임이 싱긋 웃었다.
“고마워. 내가 뭘 숨겼느냐고 했지? 그걸 건네주면 당신들의 우산 밑에 숨겨주는 건가? 어쨌든 뭔지 말을 해줘야 거래가 되겠지? 그건 말이야, 당신 할아버지의 사건 일지야.”
“사건…… 일지?”
막시민의 반응은 놀라움이 아니었다. 일지라고? 그런 물건이 진짜 손자도 아닌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람?
청어절임은 그간의 눈치로 봐서 막시민의 반응을 충분히 알아차렸을 테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게 있어야 당신들도 살아날 구멍이 생기지. 플레상스 경은 거기에 기존에 자신이 해결한 사건들의 개요는 물론 지금 의뢰중인 사건들에 대해서도 메모를 남겨놨어. 그리고 무엇보다 파울 사건에 대해서도 중요한 정보가 적혀 있었지. 파울이 숨긴 물건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스핀이 물었다.
“파울이 쇠의 왕에게 뭔가 훔쳤다는 그거?”
데보라가 끼어들었다.
“사실이었단 말이야? 정말로 오빠가 쇠의 왕의 물건을 훔쳤다고?”
데보라는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청어절임은 웃었다.
“맞아. 훔쳤더라고. 그게 뭔지 궁금하겠지? 나도 바로 말씀을 올리고 싶지만…… 당신들이 필요한 정보만 싹 챙기고 날 내버릴 가능성에도 대비를 해야지. 그러니까 약속해줘. 일지를 손에 넣고도 날 버리지 않는다고.”
이스핀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런, 제 이름이나 똑바로 밝히고 그런 소리를 해야겠지?”
“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그것만은 곤란하군. 본명은 못 말해줘. 내가 당신들을 믿거나 안 믿기 때문이 아니고 그냥 말 못 해. 당신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나한테 본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야.
여기선 그냥 당신들의 청어절임이 되려고. 그편이 좋아. 솔직히 그 이름이 마음에 들기도 했어. 나한테 어울리잖아.”
“어울려?”
청어절임은 렘므인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냄새가 고약하기로 유명한 음식이었으므로 누구인들 달가울 만한 별명은 아니긴 했다. 달가워하라고 지어준 별명도 아니었고. 청어절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청어란 놈들은 다 똑같이 생겼잖아. 청어 한 마리 한 마리가 무슨 생각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난 그런 무리 속에 있을 때 제일 마음이 편하거든. 그러다가 당신들 손에 잡혀 절임이 된 셈인데, 그것도 꽤 마음에 들어. 어쩐지 치명적이잖아?
다만 뚜껑만 열지 않으면 되는 거야. 굳이 열어서 내용물이 뭔지 확인하려 들지만 않으면 생각보다 쓸모 있는 존재라고.”
이스핀이 막시민을 건너다봤다.
“난 솔직히 청어절임 먹어본 적 없는데, 뚜껑만 안 열면 유용한 식료품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릴까?”
막시민은 작년 말엔가 11월 시험을 앞두고 정신 나간 녀석 중 하나가 저질렀던 사건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그거 식료품이라기보다 뚜껑 열어놓고 도망치면 반경 수십 걸음쯤은 초토화시키는 무기에 가까울걸.”
“혹시 너네 학교 앞에서 팔던 병 절임 그거랑 비슷한 거 아냐?”
막시민은 자기도 싫어했던 주제에 저도 모르게 발끈하며 대꾸했다.
“야, 그건 그래도 먹을 수는 있는 거였다.”
“아니던데?”
이스핀은 네냐플 앞에서 사먹었던 기괴한 음식을 떠올리며 잠깐 어깨를 움츠렸다가 고개를 흔들어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자, 파울이라는 사람은 쇠의 왕의 물건을 훔쳤고, 그를 숨겨주려던 플레상스 경은 붙잡혀 갔어. 쇠의 왕이 앞으로도 계속 파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조만간 너와 나에게도 관심을 갖겠지.
물론 알아서 떨쳐내는 방법도 있긴 한데 쇠의 왕을 염탐하던 청어절임은 그 물건이 뭔지 알고 있고 플레상스 경과 파울이 어떤 거래를 했는지 적힌 일지도 줄 수 있다고 했어.
그걸 알면 우리한테 카드가 하나 생기는 셈은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고 맞싸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 모두가 우연히 휘말린 남의 일이기도 하니까 그냥 어디론가 도망쳐버린다는 답도 있긴 하겠지.”
이스핀이 정리한 상황은 막시민도 깨닫고 있던 내용으로 사실상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어절임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해도 멀거니 있다가 당하느니 조금이라도 알고 대처하는 편이 당연히 낫다. 그리고 도망쳐버린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막시민은 켈티카를 떠날 수 없다. 네냐플을 떠나기 직전에 교수들이 친절히 설명해준 그대로다.
이스핀은 이미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행동을 하기로 한 이상 막시민의 의견을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였든 알아두는 게 낫겠지. 그 쇳덩어린가 하는 놈은 꽤 집요한 모양이고 난 어디서든 발 못 뻗고 자는 상황은 싫거든.”
“좋아.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지를 손에 넣어보자. 지체할 것 없잖아. 당장 가자.”
이스핀이 벌떡 일어나자 막시민도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 가방 좀 가져오고. 그런데 데보라 당신은 어쩔 거야? 계속 우릴 따라올 건가?”
데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안전한 대책 같네요.”
“알았어. 청어절임 너하고 데보라는 먼저 내려가. 1층에서 기다려. 카페에 물이 아직 나오면 먼저 세수라도 하고 있든가.”
3층에도 수도가 있긴 했지만 어제 확인해보니 3층이라 그런가 물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청어절임이 순순히 일어나 나가려 하자 이스핀이 손끝을 까딱거려 그를 부르더니 검지를 쭉 뻗어 가리키며 말했다.
“난 너처럼 가면 쓴 인간의 속을 잘 알아봐. 조심해. 허튼짓 하기 전에 그다음에 어찌 될지 깊이 생각해.”
청어절임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둘이 먼저 내려가자 막시민은 옆방으로 들어가 노끈을 몇 바퀴 감아 묶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이스핀은 테이블보를 걷어 바구니 속에 쑤셔넣고는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갔으니까 묻자. 너도 청어절임 안 믿지? 나 저 인간 아주 느낌이 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