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89)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89화(89/143)
89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16)
“그니까요, 그게 쓸데는 없는데, 그 카페가 예전에는 되게 괜찮았나 보더라고요. 음식도 완전 맛있었대요. 버터밀크 팬케이크랑 베이컨 오믈렛이랑…….
플레상스 경 할아버지는 카페 주인이랑 아는 사이여서 단골이었는데, 구석 자리에 날마다 앉아 있으니까 사람들이 뭐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 카페로 찾으러 갔었나 봐요. 그렇게 온 사람들이 상담하면서 이거저거 시켜 먹으니까 카페 주인이 평소에는 찻값도 안 받았다는 거예요. 와, 좋았겠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겠어요. 그러다가 카페 문 닫아서 좋은 시절 다 끝났다는 거죠.”
“왜 문 닫았는데?”
“글쎄요? 장사가 안 됐나?”
“그게 언제야?”
“한 오 년 넘었을걸요. 맞나?”
데보라가 나직이 덧붙였다.
“대충 그 정도 됐을 거예요. 저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어요. 이 일대에서는 제법 유명했거든요. 뭐 물어보면 공짜로 조언도 잘해줘서 시시한 것들도 곧잘 물으러 간다고들 했죠. 연애 상담이라든가, 가정불화라든가, 취직 고민이라든가.”
플레상스 경은 꽤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나하고는 전혀 다르네. 내 사전에 공짜란 없는데. 근데 아까부터 듣자니 좀 이상한 게 플레상스 경 할아버지랬다가 플레상스 경 손자분이랬다가 이러면 둘 다 플레상스 경이 아닌 게 되잖아. 둘 중 하나만 하라고.”
“그게 헷갈려서 그렇죠. 어쨌든 둘 다 플레상스 경이니까.”
데보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플레상스 경은 따로 있는 거지.”
“그게 누군데?”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있어야 되는 사람.”
청어절임은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가 아니고, 잠깐 있어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제일 간단하게 부르고 아는 사람 둘을 복잡하게 부르는 게 말이 되나?”
이쯤 되면 막시민이 그만 됐으니까 이름으로 부르라고 교통정리를 할 법했지만 막시민도 나름 신분을 숨겨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럴 순 없었다. 그때 이스핀이 불쑥 말했다.
“슈발리에라고 부르면 되지 않아?”
순간 셋 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이 됐지만 설정상 오를란느인인 막시민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래. 그게 맞겠군. 이제부터 슈발리에라고 불러.”
그러는 사이 셋은 어느새 아르크노베르 거리 앞에 도착했다. 전날과 다름없이 20번지를 향해 걸어가던 도중 이스핀의 걸음이 멈칫했다. 이스핀이 멈춰 서자 뒤따라오던 세 사람도 멈췄다.
“왜 그래?”
“…….”
이스핀의 손이 허공에 잠깐 멈춰 있더니 한 순간에 허리 쪽으로 미끄러져 검자루를 잡았다. 도사린 자세가 된 몸에 긴장감이 빠르게 감돌았다.
“주위 경계해.”
명령에 가깝게 떨어진 말에 나머지 셋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것도 각자 다른 곳을 보지도 못하고 같은 데를 쳐다보다가 청어절임이 둘의 어깨를 두드려 각자가 볼 곳을 가리키고서야 분담이 되었다.
“기다려.”
그 한마디만 남기고 이스핀은 혼자 20번지를 향해 걸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걷는 듯해도 실은 사각이 될 곳들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나아가는 경계 상태의 전진이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달라지는 사각에서 적이 튀어나오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대처가 잔상처럼 그려졌다가 차례로 스러졌다.
가까워지자 점차 흔적이 뚜렷해졌다. 서너 명이 거칠게 지나가며 사소한 것들을 흐트러뜨렸다. 길 구석에 짓이겨진 꽃, 늘어진 빨랫줄, 벽 모퉁이에 깨진 흔적, 정체 모를 목재 잔해. 바로 어제 걸었던 거리였으므로 달라진 것들이 하나하나 또렷했다.
비록 막시민과 잡담을 나누며 걸었지만 몸에 밴 관찰이 멈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폭력의 흔적만은 놓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한 번 더, 20번지의 벽에도 남아 있었다. 이스핀이 맨 처음에 보았던 것과 같은 두께로, 벽에 그어진 칼자국이었다.
이스핀은 손가락을 뻗어 만져보았다. 슥……. 이어 벽 한쪽을 붙들더니 훌쩍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목을 빼고 보던 청어절임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야…… 보통 사람 아니다.”
“그걸 이제 알았냐고.”
데보라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더니 자신도 20번지를 향해 다가갔다. 입구 앞에 서서 마법을 준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데보라는 깜짝 놀랐지만 나온 사람은 이스핀이었다.
“아무도 없어. 들어와.”
이스핀이 긴장을 푼 듯해 그제야 한숨 돌린 데보라가 나머지 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막시민은 자연스럽게 맨 뒤에서 따라가다가 문 앞에 이르러 주위를 슥 봤다.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셋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도둑이 든 수준이 아니었다. 모든 집기를 정성스럽게 박살낸, 아주 꼼꼼한 파괴였다. 모든 서랍이 박살나고 가구 문짝은 뜯겼고, 의자 쿠션은 갈기갈기 헤쳐졌으며 시트나 베개까지 모조리 찢어놓았다. 칼로 난자당한 집 곳곳에 나무 가루와 거위 깃털이 느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 거실로 돌아온 넷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데보라가 말했다.
“뭘 찾으려 했네요. 그분의 사람들의 솜씨겠죠. 그래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뒤진 건 처음 보네요. 벽지까지 다 찢어내다니.”
“청어 네가 숨겼다는 그거 때문이겠지. 어디냐?”
막시민이 쏘아보자 청어절임의 입가에 괴상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눈치를 슬슬 보며 부엌 옆방으로 움직여갔다.
“그게 말이죠……. 참, 그거부터 확인해봐야지.”
그 방은 하인방이었던 듯했다. 하인방이라고 예외는 없었지만 청어절임은 잔해를 주섬주섬 들추며 뭔가를 찾는 체하더니 이윽고 텅 빈 채로 나동그라진 구두약 상자를 찾아냈다. 그걸 거실에 집어다 놓고, 이번에는 부엌으로 가서 시든 꽃이 꽂힌 꽃병을 뒤엎어보더니 다시 거실로 가져왔다.
그런 식으로 잡동사니를 다섯 가지쯤 모아다가 거실 가운데 놓고 선 채로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했다.
“흐음. 역시.”
막시민이 기다리다 못해 청어절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일지는 어딨어. 설마 저것들이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죠. 이건 제가 가짜 일지 조각을 숨겨놨던 물건들이라고요. 이걸 싹 쓸어 가져간 걸 보니 역시 제 작전은 효과적이었고…….”
“뭔 소리야. 가짜를 가져갔다고 진짜도 가져가지 말란 법 있어? 빨리 진짜나 가져와.”
“그게…….”
청어절임이 머뭇거리는 사이 이스핀은 잠깐 밖으로 나갔다. 데보라도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마침내 막시민을 향해 돌아선 청어절임이 빠르게 말했다.
“그게! 누구든 진짜를 찾았으면 가짜를 모조리 가져갈 리가 없죠. 내버리지. 하지만 어디에도 내버린 흔적이 없었으니까! 진짜는 그놈들도 못 찾은 거고! 저도 아직 못 찾았고!”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막시민과 데보라가 동시에 청어절임의 뒤통수와 등짝을 때렸다. 막시민이 소리를 질렀다.
“야! 네가 찾았다며!”
“그야…… 그렇게 말해야 순순히 따라와줄 것 같아서 그랬죠. 그러니까 이제부터 같이 찾읍시다, 네? 비록 닷새나 뒤져도 못 찾았지만 넷이서 같이 찾으면 좀 낫지 않을까요? 다들 저보다 뛰어나시잖아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걸 찾았다면 청어절임이 이 집에 닷새나 버티고 있었을 까닭이 없었다. 그 점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게 기가 차기도 하고, 몇 번이나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이놈에게 진절머리가 나기도 해서 막시민은 청어절임의 무릎과 엉덩이를 한 번씩 걷어차고는 이대로 지하실에 파묻어버릴까 생각하며 노려봤다.
청어절임은 즉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아파서 죽어가는 시늉을 하며 제발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둘이 결론 없는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 밖으로 나갔던 이스핀이 들어왔다.
“남아서 감시중인 자는 없는 듯해.”
데보라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스핀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높은 데서 주변 좀 봤어.”
지붕에 올라갔다 온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청어절임이 늘어놓은 잡동사니들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감시가 없다면 원하는 걸 찾아서 가지고 갔다는 뜻 아닌가? 아참, 청어절임이 일지가 어디 있는지 실은 모른단다. 입만 열면 거짓말인 이놈을 어떻게 할까?”
이스핀은 청어절임을 빤히 보더니 바닥의 식료품 창고를 가리켰다.
“저기를 지하 납골당으로 활용하면 되겠네. 네가 문 열어.”
“아니, 아니, 그 전에 잠깐만요. 진짜로요. 분명히 찾을 수 있어요. 여기 있다고요. 그놈들이 진짜 대신 가짜를 가져갔으니까, 아니, 제발!”
이스핀이 한 발짝 다가오자 청어절임은 비명을 지르며 제 주머니를 허둥지둥 뒤졌다. 막시민이 뇌까렸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왜냐하면…….”
청어절임은 어느 주머니에서 노트 한 권을 겨우 끄집어냈다. 손때 탄 가죽 표지가 과연 일지답게 생긴 물건이었다. 하지만 안을 펼치자 대부분이 빈 페이지였다. 몇 장 더 넘기자 내용이 적힌 곳이 나오긴 했는데 그걸 본 막시민은 눈썹을 좁히며 청어절임을 힐끗 봤다.
대충 만들어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잉크는 오래된 듯했고, 고풍스러운 필치였으며, 내용조차 그럴싸했다.
막시민이 그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야,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제가 글씨 좀 쓰거든요. 대충 열 가지 정도 필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죠.”
청어절임이 다시 우쭐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막시민은 가짜 일지를 이스핀에게 넘겼다. 이스핀도 신기한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제법 볼만한 가짜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쓴 것들을 여러 페이지 찢어서 중요한 것이라 일부러 숨긴 것처럼 여기저기 넣어뒀단 말입니다. 저도 여기서 닷새나 놀고먹진 않았다고요. 물론 저도 진짜 일지를 찾아내고 싶었지만 못 찾았을 때의 대안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말이죠, 수색도 제법 잘하거든요?”
이스핀이 일지를 접더니 손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그래봤자 너도 못 찾았고, 쇠의 왕의 부하들도 못 찾았고, 그 일지란 게 존재하는 건 맞아? 이 집이 무슨 성도 아닌데 닷새나 시간이 있었으면 나라도 못 뒤져본 데가 없겠다.”
데보라도 말했다.
“그러네요. 애초에 없었을 가능성도…….”
“아니거든요? 틀림없이 있거든요? 제가 편지를 전하러 왔을 때 플레상스 경이 들고 있는 걸 정확히 봤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걸 만들어낼 작정으로 처음부터 이 노트를 구해 왔던 거라고요. 저라고 근거도 없이 아무렇게나 만들어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