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92)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93화(93/143)
93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20)
“그런 건 나라도 무리야. 여기서 내려갈 거야.”
그때였다. 조금 전에 건너온 집과 집 사이에서 머리 하나가 쑥 올라왔다. 이스핀이 흠칫하는데 막시민의 등뒤에서도 또 다른 머리가 나타났다. 집주인이 지붕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왔을까? 한꺼번에 두 명이나 그럴 리 없다. 이스핀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넌 저쪽으로 건너가!”
그러면서 몸을 돌려 한 걸음 내디디며 검을 홱 뽑았다.
첫 번째 적은 동작이 빨랐다. 금세 몸을 솟구쳐 올라오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자는 처마 끝이었고, 이스핀의 위치는 위였다.
경사를 내달려 올라오는 그자를 향해 기와 한 장을 걷어차 날리면서 시선이 흐트러진 상대의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돌려 벤 검이 상박에서 가슴까지 긋자 그자의 몸이 고꾸라졌다. 허벅지를 돌려 차 아래로 떨어뜨렸다.
“으윽!”
바로 돌아섰다. 이번에는 이스핀의 위치가 아래였지만 그까짓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자갈밭, 강물 속, 40도 넘는 경사에서도 훈련을 해보았다.
반면 상대는 이스핀이 검을 들긴 했지만 체격이 작았으므로 상대를 얕보았다. 이스핀은 덩치 큰 상대가 달려들 때를 노렸다가 몸을 한껏 낮추면서 회전해 낮은 사각에서 다리를 베었다. 경사진 지붕에서 몸을 더 젖히다니 보통 사람은 중심도 잡기 힘들 각도였다.
“이, 이게…….”
다리를 베인 상대가 휘청거리는데 막시민이 오른발을 들어 밀어차기로 간단히 지상 세계로 보내주었다. 돌아본 이스핀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넌 건너가랬잖아!”
“저길 어떻게 건너가냐? 너도 못 한다며!”
“급하면 다 하게 돼 있는 거야!”
이스핀은 검을 도로 꽂자마자 몇 걸음 물러서더니 도움닫기 세 걸음만에 맞은편으로 훌쩍 건너뛰었다. 아까 자기도 무리라던 말은 너그러운 겸양이었던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아래를 힐끔 보고는 불안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폈다가 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내가 왜……. 지붕에 올라가자고 할 때부터 이럴 줄 알았는데…….”
그때 이스핀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야! 네 뒤에!”
“뭐?”
그 바람에 놀란 막시민도 허겁지겁 뒤따라 건너뛰었고, 생각보다는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스핀이 한숨을 내쉬는 막시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말했다.
“아무도 없다고.”
“야! 너…….”
“근데 이젠 있어! 달려!”
사실이었다. 두 명이 연달아 올라왔고, 그들도 건너뛰어 따라왔다. 이스핀과 막시민은 그대로 지붕 위를 내달렸다. 강하게 디딘 발밑에서 기왓장이 부서지며 조각이 튀었다.
세 번째 지붕으로 건너뛰었을 때, 맞은편에서 두건을 쓴 자가 훌쩍 몸을 솟구치더니 마주 달려왔다. 하지만 그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체구가 작은 쪽을 노려 뻗은 검의 진행 방향을 그대로 읽어내고 정반대로 움직인 이스핀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던 기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적은 순식간에 몸 안쪽을 돌파당하고, 미처 멈추기도 전에 이스핀의 검이 쇄도했다.
“컥!”
허리 위쪽이 깊이 베였다. 피가 부챗살처럼 흩뿌려지고 쿵 넘어진 상대는 처마 쪽으로 미끄러져 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스핀을 도우려고 몸을 돌리던 막시민은 멈칫하며 눈이 커졌다.
저 정도는 상대를 죽이려 했다고 봐도 된다. 그도 나이에 비해 온갖 일을 겪어왔지만 아직껏 상대를 진짜로 죽일 작정으로 무기를 휘둘러본 적은 없었다.
이스핀은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달리다 멈췄으니 뒤따라오던 자들이 가까워졌을 것이고, 대결해야 할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자들은 지붕 하나 건너까지 따라왔다가 이스핀이 두건 쓴 자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그중 하나가 소리쳤다.
“너는 그분의 사람을 건드린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스핀이 그자를 쏘아보더니 왼손을 내밀어 까딱였다.
“치르게 하고 싶으면 건너와. 멀찍이서 뭘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이스핀은 평소와 눈빛도, 목소리도 달랐다. 종종 감정이 변할 때 눈 속의 휘광이 반들거린다고 느낀 적은 있었지만 지금 그 빛은 살기로 변해 팽팽하게 뿜어져 나왔다.
평소 작고 귀엽던 얼굴에 흡사 피를 본 맹수 같은 기운이 감돈다. 딱 한 번, 데보라가 공격해왔을 때도 저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는 분노였다. 지금은 전투태세였다. 공격해오면 죽이겠다는 각오였다.
그자들도 알아차렸는지 선뜻 건너오지 않고 머뭇거렸다. 대신 등뒤에서 기와 딛는 소리가 자그락, 들려왔다. 또 다른 두건을 쓴 자가 어느새 지붕 끄트머리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쓰러진 동료를 흘끗 봤지만 아무런 처치도 하지 않았다. 막시민은 그자를 보자마자 아까 커튼 뒤에서 단도를 던진 자라고 확신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그리고 손에 무기가 없다.
양쪽을 한꺼번에 경계하기에는 지붕 위가 너무 좁았다. 이스핀은 지붕 경사 끄트머리로 최대한 물러섰지만 그래도 각도가 너무 컸다. 차라리 혼자라면 쉽사리 자리를 옮겨가며 싸우겠는데 막시민을 내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버티는 수밖에 없다. 비록 짧은 검이지만 양손으로 잡고 가드를 올려 방어와 기습을 겸하는 자세, 에투알 3번을 취하는 걸 본 그자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졌다. 그러나 곧 평범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말했다.
“난 오브리라고 한다. 그리고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야. 저 녀석이 단번에 당한 걸 보니 싸우고 싶지도 않고.”
이어 증명하듯 빈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분께서 너희를 보고 싶어 하신다. 한 시간 정도만 내주면 돼. 몇 가지 물어보고 나면 돌려보내 줄 거야.”
막시민이 대꾸했다.
“그래놓고 등짝에 단도를 꽂으려는 건 아니고? 그런 말을 곧이듣게 하려면 우리 할아버지부터 돌려보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브리가 킥킥 웃었다.
“아하, 자네가 손자로군. 그럼 얘기가 더 쉽겠어. 플레상스 경은 잘 지내고 있다. 원한다면 만나게 해줄 수도 있지.
그렇군, 삼자대면 어떤가? 대화로 오해를 풀고, 잘된다면 플레상스 경도 자네와 같이 돌아갈 수 있겠지.”
“아아, 그거 구미가 당기는 얘기네.”
막시민이 그렇게 대꾸하자 이스핀은 제정신인가 하는 눈빛으로 막시민을 힐끗 봤다. 막시민은 이스핀 쪽을 보지 않고 두건 쓴 자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몰라. 시골 살다가 켈티카 구경 와서 할아버지 댁에 안부 인사나 드릴 겸 들렀을 뿐인데 이웃한테 할아버지가 납치를 당하셨다는 황당한 소릴 듣고, 다음날은 집이 걸레짝이 되도록 털렸을 뿐이지.
이야, 정말 무서워 죽을 지경 아니겠냐고. 그래서 오해를 풀기 위한 삼자대면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이런 꼴을 보고 나니 사람한테 조심성이란 게 생기지 않겠어?”
“안전은 보장한다고 하지 않았나?”
“어휴, 감동적인 말씀이네. 그럼 이렇게 해보자고. 그분이 누구든 간에 당신들 같은 자들이 섬기고 있을 정도니까 틀림없이 지체도 높고 품격도 높은 분이겠지?
그런 분을 만나 뵈려면 거기 어디냐, 그래, 그 정도는 돼야지. 그랑도프 호텔이라고 요새 켈티카에서 뜨는 곳이라며?
거기 1층에서 만나서 같이 홍차와 체리 맛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보자고. 그러면 이야기도 한결 매끄러워지겠지.”
상대는 이게 뭔 소린가 싶었겠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감추고 대꾸했다.
“장소는 그분이 정하신다. 충분히 좋은 곳일 것이다.”
“아, 저런. 거절이야? 시골뜨기가 호텔 구경 한번 해보나 했더니 실망이네. 그럼 이건 어때? 할아버지한테 뭐 맡겨둔 사람이 되게 많은 모양이던데 그 사람들도 같이 불러서 한꺼번에 만나면 단번에 해결되고 좋잖아.”
“지금 상황을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은데…….”
막시민이 손을 내저으며 오브리를 쏘아봤다.
“이해는 아주 잘하고 있어. 나같이 이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고 든든한 부모도 없는 벌레 같은 놈을 슬쩍 집어다가 고정판에 핀으로 꽂아놔도 누구 하나 모르고 치안대조차 신경 안 쓸 거라는 점 말이야.
그러니까 사람 많은 데서, 미리 약속을 잡고, 참관인들과 함께 보잔 말이야. 그분께서 공명정대한 이 거리의 수호자이고 우리 할아버지가 진짜로 혼 좀 날 만한 일을 저질렀다면 누군들 그분 편이 아니겠어?
나조차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은데 말이야. 나조차도, 그분께서 자기 욕심을 위해 할아버지를 납치해 갔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거나 손자란 놈을 데려가서 고문이라도 해가며 위협하려는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쯤 되면 오브리도 막시민을 말로 구슬려서 데려갈 수 없음을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행동을 취하는 대신 그자는 웃었다.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 조건을 조정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다니, 패기가 넘치는 어린놈이군.
네 할아버지도 너처럼 굴다가 핀으로 꽂히게 됐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고정판에 나란히 꽂혀서 너희 가문은 왜 그렇게 건방진지 사이좋게 대화를…….”
오브리는 말을 맺다 말고 갑자기 뭔가를 집어던졌다. 자그마하고 길쭉한 병이 막시민의 발밑에 떨어지면서 팍 깨어지더니 녹색 불꽃과 연기가 일어났다.
“읍!”
삽시간에 연기가 자욱해지며 앞이 잠시 보이지 않았다. 막시민은 순간적으로 숨을 참으며 앞으로 내달리려 했지만 세 걸음째에서 무릎이 꺾어지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가까운 곳에서 뭔가가 부딪치고 넘어졌지만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스핀이 외치는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려왔다.
“막시민!”
이스핀은 오브리가 뭔가를 던지려던 순간 이미 그자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도사리고 있었기에 가장 빠른 속도로 다섯 걸음 만에 도약해 꺾어 쥔 검을 돌려 쳤다.
자신의 위치가 낮았고 상대는 용마루에 서 있었기에 다리를 노렸는데 오브리가 껑충 뛰더니 이스핀을 타넘다시피 맞은편으로 옮겨갔다.
방향이 바뀐 상황에서 이스핀도 녹색 연기와 불꽃을 보았지만 허둥지둥 그리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이자를 해치우지 않으면 막시민을 구할 수도 없다……. 냉정히 판단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꽉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오, 빠른데?”
오브리가 여전히 아무 무기도 없이 싱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얕본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겠지만 뭘 숨기고 있는지도 경계해야만 한다.
조금 전, 막시민은 대화 도중에 저자가 단도를 던진 자라는 힌트를 주었다. 투척 무기를 가진 자와는 어설픈 거리 벌리기가 가장 불리하다.
충분히 거리를 넓히지 못할 바에는 가진 무기가 닿을 범위로 다가가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속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