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94)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95화(95/143)
95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22)
하지만 그런 주장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켈티카 치안청은…… 물론 여긴 치안청이 아니라 치안대 남부 분소인가 뭔가라지만 대체 이렇게 느릿느릿해서 시민의 안전을 지킬 수는 있는 건가?
대기실의 다른 시민들도 삼십 분 정도는 보통이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왜 기록원이 종이에 몇 자 적어들고 안쪽으로 사라지기만 하면 감감무소식이란 말인가?
오를리에는 치안청은 없다만 세큐리테가 비슷한 일을 하는데 혹시 거기도 이따위로 일하는 걸까?
이스핀이 오를리의 세큐리테가 똑바로 일하고 있을지 아닐지,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추론에 푹 빠져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리우스 콜롱브? 안으로 따라오시오.”
생각에 빠져 하마터면 가짜 이름을 못 알아들을 뻔했다. 이스핀은 흠칫 놀랐다가 얼른 일어나 낯선 남자를 따라갔다. 그러면서 이자를 조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이나 내부를 실컷 관찰한 터라 거의 모든 사람의 얼굴을 외운 참이었다.
남자가 걸으면서 물었다.
“마이그너 남작의 비서라고 했던가?”
“네.”
“비서치고는 어려 보이는데.”
“그런가요. 하긴 사실이 그러니까……. 치안청은 처음인데 이것도 경험이네요.”
일부러 적당히 세상 물정 모르는 말투로 말했다. 남자가 걸음을 멈칫하며 이스핀을 돌아봤다.
“여긴 치안청이 아니라 치안대 남부 분소요. 하지만 치안청에 가고 싶다면 구경시켜줄 순 있지.”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 남자가 기대한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냥 걸어갔다.
저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치안청까지 갈 만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숨길 생각은 말라는 경고였을까? 그런 소리를 한 걸 보면 남자는 치안청 소속 수사관, 즉 이폴레트란 말인가? 하지만 견장 달린 재킷도 없고 이폴레트는 웬만큼 중요한 사건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혹시 치안청 분이신가요?”
“켈티카 치안청 2부서 소속, 지크 바일러요.”
그렇게 대답한 남자가 사무실 맨 끝에 난 문 중 하나를 열었다. 조사실처럼 생긴 방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둘, 그리고 벽 쪽에 놓인 긴 의자가 있었다. 긴 의자 위에 익숙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끝까지 기절한 시늉을 하며 들것까지 동원해 운반되어 온 막시민이었다. 슬슬 같이 진술할 때도 됐다고 생각한 이스핀은 슬쩍 다가가 연기를 잘하고 있나 보려 했다. 그런데…….
“…….”
막시민은 연기중이 아니고 진짜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지크 바일러의 재킷을 잘도 덮고서. 이스핀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바일러가 탁자 뒤로 가서 앉자 그쪽을 돌아보았다. 바일러가 말했다.
“그 무슨 녹색 연기를 마셨다고 했는데, 잠이 오는 약이었던 모양이지?”
“그야…….”
당장이라도 걷어차서 깨우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이스핀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상대는 수사관이다. 사실만 말하면서 원하는 결론으로 유도해야 한다.
“약의 정체는 저로선 알지 못합니다. 지독한 냄새였고, 그 순간에는 숨을 못 쉬고 쓰러질 정도였다는 점만이 분명한 사실이죠. 지붕 위라 빨리 확산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것 같은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죽진 않은 것 같아. 다만 그런 것치고 좀…… 잘 자는 것 같은데.”
막시민은 편안하게 의자 팔걸이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코까지 골고 있었다. 이스핀이 기다리는 것이 지루했다면 막시민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어제 잠자리가 불편했을 테니 오후 무렵이 되자 정말 졸렸던 모양이구나 싶어 조금 안됐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물론 그건 상식적 판단이었을 뿐 막시민은 전날 잠자리가 어떻든 기회만 되면 아무데서나 잘 자는 사람이었지만 이스핀이 그것까지 알 순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적어도 확실했다. 유독한 연기에 중독된 환자라는 배역을 망각하고 잠이나 잘 바에야 일어나서 혓바닥이라도 쓰란 말이다…….
이스핀은 손을 뒤로 돌려 막시민의 코를 쥐면서 바일러를 향해 말했다.
“그 점은 의사에게 데려가서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갑작스럽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플레상스 경이 실종된 마당에 그의 손자마저 죽거나 한다면 큰일이겠죠. 빨리 필요한 진술을 하고 의사에게 가보고 싶습니다.”
“당신 칼에 베인 사람은 빈사 상태라서 이미 의사에게 보냈소, 콜롱브 군. 그자가 죽는다면 당신은 살인범이 되는데 간단한 진술만 하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이스핀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남자를 봤다.
“그자들은 수상한 의도를 품고 여럿이서 저희를 추적하고, 포위하고, 납치하려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저희는 죽거나 납치되었을 거고, 제가 섬기는 분의 비밀은 그대로 흘러나갔겠지요.
명예를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고귀한 분들께서는 아랫사람들도 당연히 그러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목숨을 걸고 상대를 베었습니다. 그 행동에는 후회도 사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켈티카는 한때 왕정을 뒤집고 공화정이 들어섰다가 다시 신왕정으로 돌아간 특이한 이력의 도시였다. 그런 사건을 겪은 결과 켈티카 사람들이 귀족이나 왕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른 지역과 상당히 달라졌다.
제법 많은 켈티카 시민들이 ‘아, 왕이나 귀족을 쫓아내고 죽여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는 않는구나’라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핀이 한 말은 켈티카에서도 새로 등장한 문물에 해당하는 치안청 소속 수사관에게는 다소 예스러운 관점이었다. 동시에 아직까지도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점이기도 했다.
귀족을 섬기는 비서라니까 그런 생각인 것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젊은 나이에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으므로 바일러는 조금 이채롭다는 것처럼 이스핀을 봤다.
“뭐 좋아. 마이그너 남작께서는 만족하시겠지. 하지만 치안청은 남작님을 섬기지 않잖소? 그러니 당신과 관점이 같을 순 없는 거요. 여기가 전쟁터도 아닌데 시민끼리 칼을 휘두르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 아니오.”
“하지만 국왕 폐하를 섬기시지 않습니까? 국왕 폐하의 뜻을 받들어 시민들을 보호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사관님께서는 국왕 폐하의 명예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어떤 상대든 베어야 하겠죠. 그러니 제가 남작님을 위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진 못할 겁니다.”
그즈음 코가 막힌 막시민은 잠에서 깨어나 원인이 된 손을 발견하고는 그 손의 주인을 흘끔 봤다. 뭔가 열심히 말하는 중이라 막시민이 깬 것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목소리만 들어봐도 경험은 부족하지만 열정 넘치는 비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중인 듯했다.
그나저나 지금껏 그의 잠을 깨우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이보다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택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거야 물론…… 아아, 뭐 됐어. 그 문젠 다친 쪽이 깨어난 다음에 신문해보면 될 일이니까. 하여간 당신의 주장은 저자들이 먼저 접근해서 당신들을 납치하려 했다는 거군. 대체 왜라고 생각했소?”
“말씀드렸다시피 플레상스 경을 납치했음을 제 입으로 자백한 자들입니다. 수사관님 앞에서 감히 추측하자면 데려간 플레상스 경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 손자까지 납치해서 협박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 기록에도 그렇게 적혀 있군. 그런데 그들이 플레상스 경은 또 왜 납치했지?”
“그건 제가 아니라 그자들에게 물어보셔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그자들이 자기 입으로 플레상스 경을 데리고 있다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저희도 몰랐던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집에 이런 것이 남아 있었는데…….”
이스핀이 주머니에서 검은 리본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보는 바일러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이웃이 얘기해주기를 이건 이 동네에서 악명 높은 지하 조직의 표식이라더군요. 전 지금껏 시키는 일만 성실히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지하 조직 같은 것과는 한 번도 관계되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바로 곧이듣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오늘 이런 위험천만한 습격을 당해서 죽을 뻔하고 보니 그 얘기가 사실이었구나 싶고, 너무나 무섭네요. 앞으로도 저들의 보복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바일러가 손을 내밀어 리본을 받아 갔다. 슬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막시민은 ‘죽을 뻔하고……’라는 말을 들으며 ‘지금 네가 죽이고 있거든’이라고 뇌까린 다음 코를 집은 이스핀의 손을 겹쳐 잡아 뒤로 뺐다. 이스핀이 얼른 돌아보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서 눈을 부라린 다음 상냥하게 물었다.
“아, 깨어난 건가요, 슈발리에? 몸은 어때요? 심호흡 좀 해보세요.”
“심호흡…… 이란 게 필요한 것 같긴 하군요.”
코가 막혀 있었다 보니 숨이 차긴 했으므로 이스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막시민은 기침을 몇 번 했다. 이것도 노리고 코를 막았던 거냐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직도 어지러워서……. 두통도 좀 있고 속이 메슥거려…….”
그러면서 이마를 짚었다가, 가슴을 문질렀다가 하며 제법 환자답게 굴었다. 이스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면서 자다가 일어나느라 배역을 아예 잊어버리진 않은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막시민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바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를 빨리 만나보긴 해야 할 모양이군. 진술은 할 수 있소? 난 치안청의 이폴레트인 지크 바일러요. 먼저 당신이 플레상스 경의 손자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름은?”
“막시밀리앵 드 플레상스라고 합니다.”
“말하기 괜찮다면 플레상스 경이 왜 납치됐는지 짐작 가는 일을 말해보시오. 위험한 사건에 연루됐다든가.”
“그게…… 제가 켈티카에 오랜만에 들렀다 보니 요즘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지내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시곤 했다는 얘기만 전부터 들어왔는데, 최근에 도움을 청했던 사람이 어느 지하 조직의 미움을 샀던 듯하다고 이웃이 얘기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대낮에 시장 거리에서 대놓고 습격해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만.”
막시민은 바일러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파울에 대한 이야기나 청어절임, 데보라에 대한 부분은 일단 생략했다. 바일러가 말했다.
“뭔가 위험천만한 일에 휘말린 모양이지. 심각한 사건은 잘 건드리지 않는 것 같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