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the Rune Book 3: Bloodied RAW novel - Chapter (95)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96화(96/143)
96화. 추리극장의 배우들 (23)
“할아버지를 잘 아십니까?”
바일러가 고개를 애매하게 끄덕거렸다.
“그리 잘 아는 건 아니고, 이쪽에 왔다갔다할 일이 있다 보니 치안대원들에게 얘기를 들어 알고 있소. 그분도 오래전에 이폴레트였다더군.
은퇴한 후에 소일거리 삼아 사람들의 문젯거리를 해결해주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수사가 필요한 사건은 이폴레트한테 넘겼다고 들었소.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유를 모르겠군그래.”
막시민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플레상스 경이 이폴레트였다고?
그게 옛날일수록 더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은 치안청 규모가 커졌지만 구왕정 시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고 이폴레트도 숫자가 극히 적었다고 들었다.
당시에 이폴레트가 되었다는 것은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특별히 뽑혔다는 뜻으로 사람들도 기사 작위라도 받은 양 존경심을 담아 바라봤다고 했다.
이폴레트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견장이 금색과 푸른색으로 화려한 이유도 당시에는 국왕이 직접 이폴레트를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스핀이 말했다.
“오해에 휘말린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주려다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치안청에 알리면 오히려 체포될 만한 누명을 썼다거나, 또는 지하 조직에서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을지도 모르죠. 저들의 한패거리인 사람도 입을 열 것 같으니까 단도를 던져서 죽여버리는 자들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일러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정도의 표정으로 눈썹만 올리더니 물었다.
“그렇지. 당신이 섬기는 남작이 의뢰한 문제가 이 일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니오?”
“아뇨. 이쪽은 의뢰를 하려고 찾아가보니 이미 플레상스 경이 사라져버린 상황이었으니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스핀도 파울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하며 막시민 쪽을 봤다. 그런데 막시민은 다른 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바일러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검은 리본이었다.
“그거, 어디서 난 겁니까?”
“조금 전에 콜롱브 군이 준 거요. 플레상스 경의 집에 있었다고 했지.”
순간 막시민의 미간에 확 힘이 들어갔다.
“역시 그거였군요. 그 리본을 할아버지의 의자에 붙여 놨더란 말이죠. 그러면 찾는 걸 포기하라는 뜻이라던데, 정말 웃기지도 않는 노릇 아닙니까? 이까짓 리본이 붙어 있다고 가족을 포기하라고요?”
아침에 방에서 나오려다가 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이스핀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어서였을까, 목소리에 깃든 분노가 자신의 것과 겹쳐지면서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막시민은 아마 단순히 떠오르는 대로 써먹은 것뿐이겠지만, 그리고 연기일 뿐이겠지만 어쨌든 화를 내고 있었고 마치 이스핀의 입장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어 내뱉었다.
“웃기지 말라고 하십쇼. 그분인가 뭔가가 어디의 대단한 작자든, 지하 세계의 거물이든 뭐든, 가족을 납치해 갔는데 겁을 준다고 얌전히 참을 거라고 봤다면 한참 잘못 생각한 겁니다. 전 무슨 수를 써서든 되찾겠습니다.”
막시민은 바일러와 몇 마디 나눠보면서 이자가 일부러 모호한 태도를 취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상대를 빨리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이쪽이 격하게 나오면 듣는 사람도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든 분명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마치 세게 흔들어서 낟알과 돌을 가르듯. 바일러는 큼큼, 하고 잔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뭐 젊은이답게 좋은 말이지만 당신, 뭘 좀 알고 하는 말입니까? 상대방에 대해서?”
“힘없는 어르신을 납치해 가고 남의 집 가재도구를 모조리 박살내는 파렴치한 놈들인 건 잘 알죠.”
“흠……. 내가 충고 하나 하겠는데 일을 너무 크게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거요. 여러 사람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그 말 한마디로 막시민도, 이스핀도 알았다. 바일러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말씀은, 저희 할아버지가 납치된 사건을 수사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니지……. 하지만 수사를 한다고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라오. 그 정도는 알겠지만.”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수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들은 그대로요. 모든 사건은 해결될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다는 거지. 치안청은 항상 인력이 모자라고 이폴레트 한 명에게 할당되는 사건은 수십 가지가 넘소. 그 와중에 하나가 더해진 건데 내가 모든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해야 하겠소?”
예상대로 상대의 태도는 분명해졌다. 바일러의 말은 명백한 책임 회피였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수사관에게 죄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피해자에게 처음부터 희망을 버리라는 소리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해결하지 못하면 그걸로 그만인데 왜 파헤치지 말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인가? 그야 파헤치기 싫어서겠지.
막시민이 침착하게 바일러를 주시했다.
“그렇군요. 오브리라는 자는 무기와 독약으로 저희를 습격했고, 현장을 목격한 치안대원들의 손에 연행되어 이곳 지하에 얌전히 갇혀 있는데, 그리고 그자는 제 입으로 할아버지를 납치했다고 자백하기까지 했지만, 그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날 수가 있겠죠.
그야 오브리라는 자를 붙들고 ‘귀하께서 플레상스 경을 납치하셨습니까? 아니라고요? 저런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죠.”
“아니, 지금…….”
“하지만 그런 일은 역시 벌어질 리가 없겠죠? 왜냐하면 이폴레트는 켈티카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건들을 해결해온 뛰어난 분들이니까요. 그런 분이 제 할아버지를 찾아주신다니 저는 안심하고 집에 가서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든든하군요.”
바일러는 이놈이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싶은 눈빛이었다. 이스핀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국왕 폐하께서 켈티카 시민들을 지키고자 내려주신 수호자들이 아니던가요? 존귀, 지엄하신 국왕 폐하께서는 저의 주인이신 마이그너 남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성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시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막시민과 이스핀이 웃음기도 없이 눈만 반짝이며 바일러를 쳐다보는 가운데 바일러는 불편해졌는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현장 검거와 용의자와 자백이라는 삼박자가 다 갖춰진 사건을 능력이 없어 해결하지 못하다니 말이 되는가? 일개 남작의 비서인 자신이 이런 충성을 바치는데 국왕을 섬기는 이폴레트가 수사를 대충 한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둘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바일러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역시 이런 일을 하루이틀 해온 사람이 아니었다.
“다 맞는 말이야. 알았으니까 이제 사건은 나한테 맡겨두고 그만들 돌아가시오. 새로운 사실이 생긴다면 내 쪽에서 연락하도록 하겠소.”
그 말을 들은 이스핀은 그만하면 만족했다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녀는 치안청이 그들의 문제에 도움을 주리라는 기대를 이미 접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베었느냐는 둥 귀찮게 굴지나 말고 보내주기나 하면 된다.
하지만 막시민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직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브리는 이미 신문하셨습니까? 그자는 뭐라던가요?”
“아직 입을 열지 않더군. 내일쯤에는 열겠지.”
“안 열면요?”
“우리에겐 여러 가지 수단이 있소. 너무 걱정 말고 돌아가시오.”
“아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싶은데요. 그자들이 섬긴다는 ‘그분’이 대체 누굽니까?”
바일러와 막시민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일러의 얼굴에는 억지로 그런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런 채로 그가 말했다.
“그냥, 사업가요.”
사업가라는 말은 최근에 생겨난 단어였다. 예전에는 상인이라고 통칭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점차 다양해지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사업가는 주로 시설을 만들거나 많은 사람을 고용해야 하는 일로 돈을 버는 상인들을 가리켰다. 옷감 공장, 규모 있는 식당, 마차 제조, 목공소, 인쇄업, 호텔…….
막시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시골 출신이라 잘 모르겠는데 켈티카에서는 사업가가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사람 많은 시장 바닥에서 살인도 저지르고 그럽니까? 은퇴한 이폴레트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했다고 납치해서 협박하고…….”
“난들 사업가가 아니니 알겠소? 하지만 플레상스 경이 문제를 일으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오.
이 년 전에 어떤 남작께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은 채로 발견된 일이 있었소. 그때 집사라는 자가 심장마비가 아니라 살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치안청에 수사를 요청했소.
하지만 누가 침입한 증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사할 만한 건 없었고, 우리가 손을 떼니까 플레상스 경을 찾아가 의뢰를 했던 모양이었지. 그래서 플레상스 경이 그 댁에 몇 번 드나들었더니 상속인이 불쾌해하면서 그만 손을 떼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으니까 오히려 치안대를 부르는 상황이 벌어졌소.
그 후 플레상스 경이 따로 치안청에 와서 이 사건은 살인이 맞다면서 다시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지. 그때 플레상스 경이 용의자라고 지목했던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었소.”
“왜였습니까?”
바일러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아무 근거가 없었소. 그러니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게 아니겠소? 그냥 악명이 좀 있으니까 지목한 거 아니냐고 누가 그러던데 설마 이폴레트 출신인 사람이 그랬을 것 같진 않고…….
하여튼 그 시점에서는 이렇다 할 증거를 대지 못했지. 그런 얘기가 그 사람 귀에 들어갔다면 좀 달갑지 않기도 했겠고.”
“그 말씀은 이번 사건의 불씨를 할아버지가 제공했다는 뜻처럼 들리는군요. 아닌가요?”
“그런 뜻은 아니고, 그게 이 년 전이니 그후로도 같은 생각이었다면 계속해서 조사하다가 점차 서로 부딪히게 된 건 아닐까 싶다는 거요. 궁금하면 그 집사를 찾아가 물어보시오.”
“그걸 물어보러 가셔야 할 사람은 저희가 아니라 수사관님이 아닙니까?”
“이보시오.”
바일러가 자세를 고치더니 탁자에 내려놓았던 검은 리본을 도로 집어 매만졌다.
“내가 오늘 당신들한테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조언까지 해준 건 호의라는 걸 아시오. 나도 이 사건이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이제부터 수사도 하겠지만, 아까도 말했듯 ‘이폴레트가 손댄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오.’ 알겠소?”
“…….”
바일러가 뒷부분을 힘주어 말한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더 다그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청어절임이 아이언페이스를 증오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폴레트인 바일러도 아마 많은 것을 보아왔을 것이다. 처음 마주친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었겠지만. 다시 말해 화가 치미는 상황이긴 해도 어쩌면 정말로 호의였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도 그만이 아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