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75
외전 125화. 작전 속의 작전 (5)
느린 듯, 가벼운 듯.
혹은 장중한 듯.
독사처럼 휘어져 쏘아지는 혈향검의 검을 막기에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듯한.
그러나 어느새 혈향검의 애검 끝을 검신으로 쳐 내는 위찬의 검은 눈으로 보고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묘한 검로(劍路)를 그리고 있었다.
티이이잉!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몹시도 맑고 청아했다.
힘의 세기가 달라서 그럴까. 혈향검의 일격을 막아 낸 위찬의 검날이 상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검날에 이는 빠졌을지라도 검에 담긴 마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위찬의 검이 원을 그렸다.
혈향검은 재차 검을 빼서 찌르려 했다.
하지만.
‘……?!’
찰나지간 혈향검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떨어지지 않는다?’
검이 위찬의 검 인근에서 쉬이 빠져나오지 않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흡인력이 검을 붙잡아 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작정하고 빼낸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 한 번의 과격한 동작으로 생길 틈을 백골신마의 제자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파아악!
혈향검의 선택은 놀라웠다.
내상을 입고, 가슴까지 베였음에도 물러나지 않고 위찬 가까이 접근했다.
혈향검에게 일장을 날리려던 유상천은 욕설을 뱉으며 손을 회수했다. 내치는 건 문제가 없지만, 그러다가 위찬까지 휩쓸리면 심각한 피해를 볼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
유상천은 흑고루마공을 응축시킨 후, 발산되는 마기를 끌어와 순간적으로 신법 속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퍼엉!
한 줄기 시원한 폭음과 함께 혈향검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전에는 빨아들이는가 싶더니, 지금은 또 강한 탄력으로 밀어 낸 것이다.
‘검법이 아니야!’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이건 검법이 아니라 마공, 즉 기공술이다.
쉬익!
유상천의 주먹이 혈향검이 있던 자리를 통과했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
위찬과 유상천의 시야가 교차되며 번갯불 같은 안광이 튀었다.
쾅! 화아악!
진각으로 몸을 멈춘 유상천이 사방팔방으로 장력을 쏟아 댔다. 굳이 혈향검을 향해서가 아니라, 아예 전방위로 쏘아 접근을 막아 내려는 것이다.
평소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의 혈향검은 그 장력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뚫고 들어갈 힘은 충분했지만, 그러다가 내상이 더 심해지면 싸움이 두 배로 힘들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때.
화아아악!
유상천의 옆을 스치며 돌진한 위찬이 혈향검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정!
물러나는 와중이라 검초가 어지러워졌다. 위찬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쩌정! 서걱!
화려한 불똥을 피워 내던 위찬의 검이 기어이 혈향검의 어깨까지 베었다.
이번 검격은 꽤 깊숙이 들어갔다. 피부를 넘어 그 안의 근육까지 가른 검격, 섬세하기 그지없는 위찬의 감각은 그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상대의 반격이 날아올 것까지도.
‘온다!’
더는 물러날 수 없다.
위찬이 포천금마공 배(排)자 결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손아귀가 저려 왔다.
포천금마공의 진결을 이용, 검압으로 상대를 압박하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혈향검을 물러나게 하지 못했다.
위찬이 혈향검의 눈을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 창백해진 안색. 이번 검격의 교환으로 내상이 짙어졌지만, 더는 물러나지 않는다.
‘승부!’
위찬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 마공과 녹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우우우웅.
웅혼한 기세를 담은 그의 검이 혈향검의 검과 마주했다.
쩌어어어어엉!
한 번 부딪친 것만으로도 위찬은 골이 다 울리는 걸 느꼈다.
일순간 눈앞이 번쩍거리고 충격으로 속이 메슥거렸다. 상대 역시 작정하고 절기를 펼쳤고 자신 역시 최고의 무공을 꺼냈다.
혈향검의 검격을 막아 낼 위력은 지녔지만, 그 반발력까지 받아낼 만큼 신체와 내부가 단련되지는 않은 것이 문제였다.
혈향검은 곧장 위찬을 몰아쳤다.
쩌저저저정!
두 검사의 검이 신들린 듯 부딪치며 화려한 검명을 토했다.
유상천은 혈향검의 등을 노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당연히 비겁하다든가, 상대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든가 하는 감성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미친!’
파바바바박!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무형의 검경이 튕겨 나와 땅바닥을 헤집었다.
검속은 빨랐고 두 자루 검이 부딪칠수록 경력은 부서진 파편이 되어 비산한다. 제아무리 유상천이라도 이 정도로 과격한 판에 끼어들기는 힘들었다.
유상천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혈향검의 뒤를 따라붙으며 속으로 외쳤다.
‘빌어먹을! 제발 빠져나와라!’
유상천이 놀랐다면, 혈향검이라고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내상, 외상.
그따위 것을 실전에서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죽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혈향검은 자신의 검법을, 오랜 세월 갈고닦아 만든 신검칠식의 절초들을 어떻게든 막아 가는 상대의 검법에 경악했다.
‘애송이가 어떻게?!’
위찬의 얼굴은 혈향검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고작 이십여 합의 교환만으로 혈향검 정도의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는다.
적어도 검을 든 상대라면 절대 물러날 수 없다.
투지도 투지지만, 이 한 번의 싸움 자체가 그에게는 천하의 어떤 무공 비급보다도 귀한 경험이었다.
‘아아!’
위찬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대단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구석까지도 이렇게!’
비록 피도 눈물도 없는 마귀 중의 마귀라지만, 검법에 매진한 인생만큼은 진짜였다.
혈향검의 검법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경지와 내공의 문제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을 뿐, 그에 걸맞은 마공지학만 붙어 줬다면 신교 내성 고수들의 무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언제나, 어떤 순간에라도 검을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위찬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혈향검은 처음부터 검이라는 살인 병기에 매혹되어 지금까지 연마해 온 것이고, 위찬은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다가 이내 검의 마력에 매혹당한 것의 차이랄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신력으로 살아온 인생이 더 가치가 있는지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위찬의 재능이 혈향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이 젊은 검재(劍才)는 신교 최고급 마공에 손색이 없는 무공을 익힌 이후 더더욱 개화하여 혈향검이 보지 못한 것들도 보기 시작한 천재 무사였다.
쩌저저정! 피슉! 퍼엉!
위찬의 가슴에도 기다란 검상이 새겨졌다.
꽤 깊게 들어간 일격이었다. 상처에 남은 검경이 살가죽을 파괴하며 퍽퍽! 터져 이차 상처를 남겼다.
유상천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위찬!”
후우우웅! 서걱!
그 못지않은 살벌한 절삭음과 함께 혈향검이 뒤로 물러났다.
혈향검의 가슴에도 검상이 새겨졌다. 위찬이 입은 검상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이미 한 번 입은 자상 위에 겹치니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있던 내상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유상천은 곧장 혈향검에게 달려들다가 일순 멈칫했다.
유상천을 향해 검을 겨누면서도 위찬을 보는 혈향검. 코와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음에도 혈향검의 눈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애송이 검사. 이름이 무엇인가.”
위찬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위찬이다.”
“혈향검이라고 한다.”
위찬과 유상천 모두 움찔했다.
“검치(劍癡) 혈향검.”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신교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어떤 임무를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다니.
유상천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대체 왜 본교의 마인들이 우리와……?”
“그런 자잘한 것들은 따지지 말기로 하지.”
혈향검이 웃으며 말했다.
“내 검은 신검칠식이라 한다. 네 녀석의 검은?”
“교룡검식(蛟龍劍式).”
“이무기라. 아직 용이 되려거든 멀었군. 하지만 그 재능만큼은 정말 놀랍구나.”
혈향검이 유상천에게 겨누었던 검을 위찬에게로 돌렸다.
“시원하게 한판 겨루어 보자.”
유상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개소리!”
그때, 위찬이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영광이오.”
“야, 위찬!”
신교의 어떤 검사도 검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혈향검보다 강한 검객이 그리 많은데도 검에 미친 바보 소리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위찬에게 있어 혈향검의 인정은 포천금마공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자연히 호승심이 올랐다.
혈향검이 미소를 지었다.
“좋군. 먼저 들어와라.”
“좋소.”
그때였다.
화아아악!
모옥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벼락처럼 튀어나온 이천상이 혈향검을 향해 쏘아졌다.
일순간 승부에 집중했던 혈향검은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퍼억!
주먹으로 검배를 때려 내치고 무릎을 올려 쳐 복부를 강타했다.
혈향검이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런 비겁한……!”
콰득!
이천상의 발이 그대로 혈향검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기습이었다. 천하의 검치 혈향검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찬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군주님!”
이천상이 유상천에게 말했다.
“폭죽이 터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아마 지원군이 오고 있을 것이다.”
“아, 예.”
“십일 조장의 상처가 심하니 남자는 십 조장이 업어라. 여자는 내가 업겠다. 가서 두 남녀를 데리고 와.”
여자가 임신 중이라 최대한 안정적인 신법이 필요했다. 당연히 유상천보다는 이천상이 맡는 게 나았다.
유상천이 고개를 숙이곤 모옥으로 향했다.
이천상이 위찬을 바라보았다.
위찬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평소 언행을 생각하면 꽤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군주님. 저는…….”
짝!
호되게 뺨을 맞은 위찬이 얼떨떨한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 그 엄격함에 불타오르던 호승심이 확 식어 버렸다.
이천상이 입을 열었다.
“진정 검도(劍道)만을 바라보고 살 거라면 탈교 후 홀로 구도자의 삶을 찾아라.”
“…….”
“실전에서 배우려는 자세는 좋다. 그러나 그 자세가, 네가 해야 할 일보다 앞선다면 너는 이쪽과 어울리지 않아.”
“군주님. 저는 그저…….”
“우리가 데려가야 할 사람 중에는 산모가 있었다.”
“……!”
“임무 이전에 산모가 위험해진다. 십일 조장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나?”
떨리는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던 위찬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지은 죄는 임무를 달성한 후 돌아가서 받겠습니다.”
이천상이 품에서 깨끗한 천을 꺼냈다.
“아직 적의 기척이 없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이겠지.”
“……?”
“상처를 동여매라. 최소한의 정비만 끝낸 후 곧장 돌아가도록 한다.”
위찬의 눈이 흔들렸다.
“군주님.”
“네가 떨어트린 핏자국으로 적이 쫓아오면 안 돼.”
“…….”
“냉정해져라. 지금은 감성적이어서 좋을 일이 없어.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시선으로 주변을 살펴라.”
“명을 받듭니다.”
이천상이 몸을 돌렸다.
씁쓸한 눈으로 붕대를 보는 위찬의 귀로, 이천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서 나도 검을 배우겠다. 바쁘지 않을 때 항상 상대해 주마.”
“……!!”
“그러니 임무 때는 제대로 기능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