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83
외전 133화. 운명으로 (8)
“백골.”
마곡의 말에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예전처럼 유 형이라고는 안 불러 주나?”
“내가 그런 적이 있었소?”
“모른다고 잡아떼면 섭섭한데. 그래도 과거의 정이라는 게 있지 않나.”
“신교를 나갈 때 어지간한 건 다 버리고 나왔소이다.”
“그랬던가.”
백골신마가 턱으로 마곡의 칼을 가리켰다.
“하면 그 칼과 마공은 왜 버리지 않고 떠났는가?”
“내 몸에 쌓인 것들을 버리고 가면 살아서 나갈 수나 있었겠소이까.”
“잘 아는군. 그래, 우리 마인들에게 탈교는 그런 의미지. 한번 입교하면 평생 교도로 사는 거야. 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네.”
“…….”
“그래서 우리가 예까지 온 거 아니겠나?”
“신교가 정말 내가 아는 신교가 맞는다면 그렇겠지.”
“대뜸 위험한 소리를 하는구먼, 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골신마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여유로웠고, 동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곡이 자소대마 연등을 바라보았다.
“백골에 이어 자소까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날 잡아 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군.”
연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 하나 잡자고 보낼 전력이라면 백골 선배 한 명으로 충분하지 않소이까.”
“그럼 자네는 왜 왔나?”
“나야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오.”
“십수 년 전부터 관절이 안 좋다고 그리 투덜대던 사람이 용케 왔구먼.”
“어쩌겠소? 조직에 매인 몸인데. 관절이 부서지든 혈관이 튀겨지든 내린 명령을 무시해선 안 되지.”
마곡이 피식 웃었다.
“자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외다. 내가 기억하는 대력신마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송곳처럼 예리한 사람인데, 어째 기도가 많이 물렁해졌소.”
“세월이란 그런 것이지. 서글픔과 분노를 웃음이라는 제방으로 막아 두던 자네의 진면목이 온전한 탐욕으로 변질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
그 말을 듣고도 연등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몇 배나 싸늘해졌을 뿐.
마곡이 백골신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왕 하나라면 몰라도 둘이나 왔으니, 아무래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맞는 것 같소.”
스륵.
거도를 어깨에 걸친 채 자세를 낮추고 상반신을 틀어 공격적인 자세를 갖추는 마곡.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 있어 사전에 역동적인 자세를 잡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만큼 전력을 다해 승부에 임하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피할 수 없다면 싸울 수밖에. 다만 목숨을 걸었으니 그대들도 조심하는 좋을 것이오.”
연등의 눈가에 은근한 긴장이 피어올랐다.
화아아아악!
마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산처럼 장중하고 강철처럼 단단한 이 마기.
한번 공격을 쏟아 내면 산사태와 같은 위력을 자아내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완력만으로 초절정고수의 머리통을 잡아 뽑았던 공포의 마왕이다.
그 특유의 올곧은 충성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대력신마라는 별호가 십대마왕을 대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부드러워도 승부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독해지는 사람이 그였다.
연등이 서서히 폭혈마공을 끌어 올리는 순간.
“여전하군.”
백골신마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싸늘해진 분위기를 다독였다.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주위를 안 봐. 하기야, 그것이 자네가 호법원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겠지. 그 특유의 고집이 충성심과 맞물려 좋은 결과를 냈고. 하지만 정작 자유의 몸일 때 그 유연하지 못한 사고방식은 독이라네. 자네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말일세.”
마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오?”
“칼 내려놓고 얘기나 좀 하자는 것이지.”
장포 자락을 펄럭인 백골신마가 어이쿠 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다.
백골신마는 십대마왕의 수위를 다투는 고수였다. 하지만 대력신마의 무공 역시 그에 비해 큰 모자람이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공격받으면 백골신마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어찌 대응한다 한들, 승기를 놓치고 승부에 임했으니 결과는 패배로 귀결될 확률이 높다.
패배란 곧 죽음. 지금 백골신마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판을 제 손으로 깔아 버린 것이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돌려 이천상과 유이상을 바라보았다.
두 마왕의 등장에 유이상은 주춤하여 비수를 내렸고, 이천상은 여전히 마곡을 향해 혈풍도를 겨누고 있었다.
“오호라?”
백골신마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 인재로고. 골격이 몹시 뛰어나. 저렇게 뛰어난 골격을 지닌 인재는 또 처음 보는구먼.”
유이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백골신마가 물었다.
“이름이 뭔가, 자네?”
유이상이 떠듬떠듬 말했다.
“흑마대 삼 조장 유이상입니다.”
당황했지만,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같은 조직의 높은 사람이라도 과하게 긴장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은 없는 것이다.
백골신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렇군. 자네가 ‘그’였군.”
아무래도 그는 유이상의 정체를 아는 모양이었다.
백골신마의 눈이 이천상에게로 향했다.
“자네는?”
이천상이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야차사령부 일각주 이천상입니다.”
“…….”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소대마 연등 역시 이천상을 돌아보았다.
눈앞에 방심 못 할 강자가 존재하는데도 시선을 돌린다. 만약 마곡이 그 틈을 노려 기습했다면 둘 중 하나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실제로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연등은 곧장 마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감각은 마곡이 아닌 이천상에게 향해 있었다.
가만히 이천상을 살펴보던 백골신마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야차사령 일각주라고?”
“그렇습니다.”
“내 손주 놈이 그쪽에 있는데.”
“제 수하입니다.”
“……오호라.”
백골신마가 다시금 빙그레 웃었다.
신선과도 같은 외양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미소였다.
“형법당주가 이래저래 신경을 써 주고 있다고 들었네.”
“…….”
“자네가 이번 임무에 투입되었을 줄은 몰랐는데.”
이천상은 대답 없이 백골신마를 바라보았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시선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공 당주 그이가 자네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본인 휘하에 꼭 두고 싶은 누군가를 위해 움직였나?”
“…….”
“뭐가 됐든 인연이라는 게 참 재미있어. 손주 놈이 들어간 조직의 수장이라, 어지간하면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거늘 이렇게 보는군.”
백골신마의 눈이 혈풍도를 훑었다.
“혈풍쌍도인가, 그거?”
“모릅니다.”
“혈풍쌍도는 예전 어느 전투 부대 대장 손에 들어갔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싸워서 빼앗았습니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칼이지. 명도(名刀)라 불릴 만하지만 거기서 끝이야. 주인과 제대로 된 호응이 가능한 칼은 아니란 말이지.”
“…….”
“이번 임무 끝나면 내 거처로 오게. 괜찮은 물건 하나 선물해 주지. 신병이기를 만들 실력이 안 되어서 내놓은 그런 칼 말고, 신병이기를 만들 실력이 되는 자가 힘 빼서 만든 물건이니 기대해도 좋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뇌물은 받지 않습니다.”
“……!!”
뜬금없으면서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그러나 당연하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그 발언은 백골과 자소, 유이상은 물론 마곡조차도 깜짝 놀라게 했다.
백골신마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십대마왕의 일원으로 신교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니, 욕은 물론 당장 목을 날려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주관인가? 고집인가?”
그런데도 화는커녕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도량을 떠나 그의 심계가 깊다는 뜻이리라.
“그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옳은 게 무엇인데?”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설명조차 하지 못하는 가치를 품고 세상을 살아가다니, 자네도 아직 멀었군.”
왜일까?
이천상은 백골신마의 그 말에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설명하라고 하면, 명확하게 이것이다! 라고 설명하진 못했다.
백골신마는 단번에 그것을 꼬집은 것이다.
“뇌물에 대한 것도 틀렸어. 부탁하고 눈치를 주면 뇌물이지만, 부탁도 없고 눈치도 주지 않으면 그냥 선물이지.”
“사람들은 그리 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 시선 신경 쓰다가 얻을 것도 얻지 못하고 땅바닥을 전전하며 살 텐가? 아니면 얻을 것 다 얻고 지혜로이 비상할 텐가?”
“개인에 국한된 일이라면 상관없지만, 사람을 부리는 이라면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자리에 따른 명확한 방침이 있다?”
“자리에 따른 명확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일까?
두 사람의 대화는 차분하면서도 숨 막히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마곡은 어색한 얼굴로 자세를 풀었다. 당장 싸울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젊은 마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의 성격상 칼을 날릴 수도, 대화를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백골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좋은 상관이 될 거야. 그러나 거기까지군. 그 이상 크지는 못할 걸세.”
“그렇습니까.”
“상관없다는 투로군.”
“…….”
“참 흥미로운 젊은이로세. 간만에 흥이 오르는구만.”
“일단 저희는 임무…….”
“흥이 오른 김에 하나 말해 줄까?”
“…….”
“나였다면 그 물건이 무엇이든 일단 받고 봤을 것이네.”
“…….”
“그리고 이용했겠지. 뇌물이 아닌 선물이니 부담 없이 받으라고 건네준 사람의 위치와 능력, 평가를 보고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을 것이야.”
이천상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 법이다.
비록 웃으면서 가볍게 하는 말이었지만, 백골신마의 그 말에는 평생 어지러운 정치판을 살아온 노회한 마왕의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백골신마 같은 유형의 사람은 이천상의 기억에 없었다. 세상에 여러 사람이 있고 저마다 개성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모호하고 정의되지 않는 사람은 이천상 인생에 처음이었다.
“자네는 원하는 게 있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고는 묻지 않겠네. 다만 내 제안은 유효하니,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나조차 이용할 만한 배포가 있다면 일간 한 번 들르게나.”
“왜 저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도헌에게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도, 이천상의 상태도 달랐다.
“누가 기회라던가?”
백골신마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부담 없이 줬지만, 내 정적들은 자네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나를 살피기 위해 자네를 살필 것이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다네.”
“…….”
“그걸 기회로 만드는 것은 자네야. 그만한 작심도 없이 날름 받아먹으면? 그건 그대로 끝나는 것이네. 다만, 우리는 그냥 끝낼지언정 남들은 그러지 않겠지.”
이천상의 눈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백골신마가 손을 저었다.
“간만에 흥이 올라 몇 마디 지껄이게 됐군. 이만 되었으니 가 보게. 맡은 임무부터 끝내도록 해. 이쪽은 우리가 맡아 주지.”
이천상이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이것도 우리 임무야. 감사할 필요 없네.”
“그럼.”
이천상이 유이상을 바라보았다. 유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악!
두 사람이 수풀 너머로 달려 나갔다.
백골신마가 웃으며 마곡을 바라보았다.
“요새 젊은이들, 참 독특하지 않나?”
“백골, 당신이 젊은이와 그렇게 오래 대화하는 건 처음 보오.”
“들었다면 알겠지만 그만한 흥미를 유발하는 친구더군.”
“무사의 도를 아는 마인이었소.”
“무사의 도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무사의 도보다 중요한 마인의 도(道)에 대해 논해 보세.”
백골신마의 표정이 일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대화 후, 자네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을 내릴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