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84
외전 134화. 거인의 그림자 (1)
보름 후.
“…….”
양백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유상천과 위찬의 몰골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위찬은 아직도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는지 안색이 창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선 이천상의 몰골은 그야말로 상거지 꼴이 따로 없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천상의 얼굴에 떠오른 극심한 피로감은, 그와 함께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천상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대략적인 상황은 군사부 정보원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양백호가 입을 열었다.
“이중 임무에 관한 건은 나 역시 통보받았네. 내 비록 자네의 상관이지만, 그것을 진행하느냐 마느냐는 현장에 있었던 자네의 선택이었을 뿐이네.”
“예.”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은 잘 처리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어. 다행히 자네들 셋 모두 잘 돌아왔군.”
양백호가 쓰게 웃었다.
“나는 그거면 되었네. 고생 많았어. 자세한 속사정은 푹 쉬고 난 다음에 얘기토록 하세나.”
이천상이 유상천에게 말했다.
“십일 조장 혈혼각으로 보내고 자네도 점검받은 후 돌아와 쉬게.”
말없이 고개를 숙인 유상천이 위찬을 데리고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양백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게.”
“서 있겠습니다.”
“내 취미 활동이 청소라는 걸 말해 주지 않았군. 꼴이 그래서 그런 거라면 괜찮네.”
물끄러미 양백호를 보던 이천상이 의자에 앉았다.
양백호가 피식 웃었다.
“자네도 참 많이 바뀐 거 아나?”
“그전에도 그런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나도 아네. 그래도 자꾸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자네가 하루하루 변화해 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나.”
이천상은 말없이 물을 마셨다.
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양백호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백골 어르신과 자소가 전(前) 호법원주를 잡으러 갔었다고?”
그 한마디로 양백호가 십대마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백골신마는 어르신으로 부를 만큼 존중, 혹은 존경하고 있으며 자소대마는 존중이 필요치 않은 노괴 정도로 보고 있다. 대력신마 마곡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굳이 전 호법원주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를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상부에서 어떤 명이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의 대화로 유추해 본 결과 포획 혹은 살해하기 위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랬겠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던 양백호는 문득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나? 두 마왕이 이탈한 전 호법원주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건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금해야지.”
“……?”
“좋든 싫든, 자네는 윗선과 연계되어 있어. 형법당주가 자네의 뒤를 봐주고 있고, 동시에 백골 어르신에게 줄을 댔겠지.”
“…….”
“자네가 어떤 목표를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대강은 아네. 하지만 세상 누구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본교는 현재 무림의 어떤 조직보다 악의에 차 있고 비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조직이라네.”
이천상의 눈이 번쩍였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양백호의 말도 백골신마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말을 합치면 이런 내용이 된다.
– 원하는 게 있다면, 더 높이 오르고 싶다면 모든 것을 주시하고 모든 것을 이용하라.
그리고 그 말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 역시 어중간하다는 뜻.’
중도(中道)와 어중간함은 다르다. 그것은 휘하 야차들과 대련하면서 자신이 종종 말해 주던 무리(武理)였다.
하지만 결국 자신 역시 중도에 이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어중간했고 어정쩡했다.
하고 싶은 것, 해야만 하는 것을 제대로 주시하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확실하게 움직여야 한다.
무도(武道)는 인도(人道). 천하 모든 이치는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이래도 두 마왕이 전 호법원주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예.”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궁금하진 않습니다.”
양백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의 그 솔직함이 나는 좋다네. 다만, 궁금하진 않아도 알아 두는 편이 좋을 듯하네.”
“령주님께서는 아십니까?”
“모르지. 나도 자네에게 듣기 전까지 두 마왕이 출교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네. 다만, 자네 얘기를 들으니 며칠 전에 와서 되지도 않는 수다나 잔뜩 떠들고 갔던 공 당주의 말이 떠오르는군.”
공무외가 양백호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이번 흑마대의 지원 임무에 관해서 말해 주더군. 아마 자네가 더 빨리 알았을 것이네. 현장에 있었으니까.”
“예.”
“도주한 전대 노마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본교를 이탈한 대산 출신 마인들이 모여 또 하나의 조직을 만든 모양일세.”
“그렇습니다.”
“그중 대력신마 어르신까지 계신다면, 그 조직의 크기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볼 수 있네.”
전 호법원주에서 대력신마 어르신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신교의 일원으로서 교에서 나간 사람을 존중할 필요는 없지만, 사적으로는 존경받아 마땅할 무사로 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양백호와 대력신마는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절대 굽히지 않는 성격, 강자와 무사의 예의를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기 힘들 만큼 정치력이 좋지 못한 것까지.
“하지만 아무리 큰 조직이라도 본교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들이 힘을 모아 강해졌을지언정 대산과의 크기를 감안하면 일개 분타급, 크다고 해 봤자 독립한 문파 정도밖에 되지 않아.”
“…….”
“그러나 대력신마 어르신 정도의 무력을 지닌 문파가 천하에 얼마나 있겠나? 당연히 그 위상도 대단할 수밖에 없어. 그런 사람을 죽이거나 잡아 오게 되면, 해당 조직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 줄까?”
이천상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더 꼭꼭 숨거나 아예 흩어지겠지요.”“반만 맞았네. 흩어지진 않겠지만, 더 꼭꼭 숨을 수는 있지.”
조직이 흩어진다? 마도무림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본교가 그들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최근 일이라고 하네. 그쪽에서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우리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을 거라네. 뭐, 짐작 정도는 해 볼 수 있었겠지만.”
“…….”
“그들은 우리 조직에 대해 잘 알아. 당연하지, 원래 우리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작정하고 이쪽 눈을 피하려고 한다면 알아채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당연한 얘기라고 이천상은 생각했다.
일례로, 유이상과 함께 홍오의 부대를 상대하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추적술은 대단했다.
유이상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이천상도 간과했을 부분이었다. 이쪽 분타와 정보력, 정보원들의 움직임을 워낙 잘 알고 있으니 숨기도, 추적하기도 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와서, 지금 당장 대력신마 어르신을 죽이거나 잡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로서도 골치가 아파지는 것일세. 큰 종기를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몸 전체에 퍼진 염증이 어디서 터질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게지.”
“그렇다면?”
“그래. 백골 어르신과 자소는 그분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네.”
잡아 오지 않은 것까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한 거물을 잡았다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을 테니까.
결국 죽이거나 놓아주었다는 것인데, 양백호는 대력신마가 죽지 않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현장에 있지 않은 바에야 확신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다만, 나는 이렇게 믿고 있으니 자네도 그리 생각하라고 꺼낸 말이 아니라네.”
“…….”
“나는 아직도 자네 능력의 끝을 보지 못했네. 그러나 확신하는 것은, 자네는 아직도 본인의 재능을 완벽히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네.”
“재능…….”
“더 넓게 보려 하고, 더 자세히 주시하려 하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자네 역시 본교를 휩쓸고 있는 악의 소용돌이 중심에 가까이 있다네.”
“…….”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이 보고 생각해야 해.”
양백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걸 못 했네. 그럴 성격도 못 되고, 나아가 그럴 능력도 없지.”
“…….”
“부디 현명하게 살아가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
이천상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와 줬으니 내가 더 고맙네.”
양백호는 빈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니 더욱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굳이 나가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은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뜻일 테지.”
“그렇습니다.”
“내가 말이 많았군.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휴가를 얻고 싶습니다.”
“휴가?”
양백호가 뜻밖이라는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휴가를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설마 이 목석같은 녀석이 먼저 나서서 휴가를 요청할 줄은 몰랐다.
“뭐 때문에 휴가를 요청하는지는 묻지 않겠네.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
“그래, 얼마나 주면 되겠나?”
“석 달입니다.”
“……!”
석 달의 휴가.
휴가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기간이었다.
양백호는 직감했다. 자신이 느낀 변화 이상으로 이천상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어쩌면 지금이 이 녀석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길잖나?”
“죄송합니다.”
양백호가 피식 웃었다.
“한 달 정도를 질렀으면 안 된다고 딱 잘랐을 텐데, 석 달씩이나 질러 버리니 오히려 안 된다고 하기도 뭐하구먼.”
“…….”
“좋네. 석 달 휴가를 주지.”
“감사합니다.”
“대신 첫 달을 제외한 나머지 두 달 월봉은 기본급만 지급하겠네. 그 정도는 이해하겠지?”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걸 안 주면 석 달 휴가가 아니라 석 달 방출이잖나. 야차사령과 연을 끊을 참인가?”
“그건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웃기는 사람도 있구만. 하면 언제부터 휴가를 주면 되겠나?”
“부하들에게 석 달간의 일을 지시할 것이 있으니, 사나흘 후로 정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양백호는 시원시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이천상을 가만히 보던 양백호가 툭 입을 열었다.
“휴가이니만큼 자네가 뭘 하든 내가 관여할 자격은 없겠지.”
“…….”
“다만, 뭔가 위험한 일에 휘말리거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일이 생기면 곧장 연락하게.”
“그럴 일이…….”
“있을 걸세. 자네가 무엇을 하든.”
“…….”
“그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이번 임무에서 자네는 여러 사람에게 특출한 능력을 보여 주었어. 당장 흑마대원들이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능력도 좋은데 심지어 따로 특수 임무까지 받는 대단한 인재라고 생각하겠지.”
“…….”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간이야. 하물며 백골 어르신에 자소대마까지 만났으니, 어느새 외전에서 겉돌던 자네의 인상은 내전까지 들어갔을 것이네.”
“제가 또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군요.”
“쉽게 생각한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지.”
“…….”
“내 말, 명심하게. 내 식구 뒤 봐주는 거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나?”
이천상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양백호가 물을 홀짝였다.
“……석 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