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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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35화. 거인의 그림자 (2)
이천상은 곧장 이번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온 야차들을 치하했다.
말수가 많지 않기에 고생했다는 한마디만으로도 야차들의 피로는 눈 녹듯 녹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천상의 몰골을 보며 확신을 가졌다. 자신들의 상관은 언제나 최일선에서 가장 힘든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어지간한 일로는 불만은커녕 힘든 내색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믿을 만한 수장 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야차들을 안심케 했다.
이천상은 바쁘게 움직였다.
깨끗이 씻고 혈혼각에 들러 위찬의 상태를 점검한 그는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가부좌를 틀었다.
딱히 운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홀로 생각할 거리가 생기면 자연스레 가부좌부터 틀게 된다. 그도 어느덧 어엿한 내가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천상은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작게는 자신의 무공부터 크게는 앞날에 대한 것까지.
놀랍게도, 그는 큰 혼란을 느꼈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혼란. 하나를 떠올리면 그 뒤가 떠오르고, 그 뒤가 떠오르면 답이 없을지언정 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던 평소와 달랐다.
많은 미래가 그려졌다.
이러한 선택을 내리면 그다음 자신에게 어떤 길이 펼쳐질지가 보였다.
다만 그 길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반드시 생겼다.
포기. 언제나 해 왔던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 챙길 수는 없다. 이천상은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언제나 냉정한 판단을 내렸고,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것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히 스스로 포기했다는 사실을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를 이유로 우울감을 느낀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많다. 너무나도.’
단순했기에 빠르고, 직관적이었기에 창의적일 수 있었던 자신의 길이 어느새 수십 개로 나뉘어 있었다.
그의 길은 더 이상 똑바르지 않았다.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동시에 구불구불 휘어졌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빠르지 않고 오히려 험난할 것만 같았다.
시작부터가 그렇다. 그 뒤를 상상해 보니 수백, 수천 가지의 선택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천상은 생애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다.
본인의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 물러나거나 돌아갔다.
당연했다.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길에서 부질없는 의지를 북돋우며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은 이천상답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그는 십 조장 유상천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상대하기 힘든 적인지는 붙어 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다.
– 하지만 군주님보다 강한 고수가 있다면서요? 게다가 숫자도…….
– 무공은 강하지. 그래서 그 늙은 마인도 우리보다 약해서 잡을 수 있었던 건가?
– ……!
– 실패는 최선을 다해 보지 못한 자들이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단어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보지 못한 자들은 실패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다.
옳은 말이다.
이천상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오감으로 잡아낼 수 없는 ‘운’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그에게는 매 순간 치열하게 사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공부, 내리는 판단에 국한된 것일 뿐이었다.
무공이나 학문 따위는 매일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연마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그것이 옳으니까.
그러나 예전이었다면, 유상천 말마따나 감당키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른 작전을 짜거나 물러나는 등 최대한 안전하고 효율적인 판단을 내리려 했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지금의 이천상은 그 위험천만한 임무를 눈앞에 두고도 당연한 듯 의지를 불태우며 성공을 위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대체 왜?’
문득 양백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 자네도 참 많이 바뀐 거 아나?
– 그전에도 그런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 나도 아네. 그래도 자꾸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자네가 하루하루 변화해 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나.
변화.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아니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자신의 변화를, 이미 주변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깊고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변한 게 없어. 이전과 그대로다.’
이천상은 문득 손을 들어 가슴을 더듬었다.
아무 목적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이것만 제외하면.’
감정.
사람은 마음이 아픈 것을 두고 가슴이 아프다고 표현한다.
이천상에게 가슴은 흉부, 즉 인간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내장 기관 중 가장 중요한 장기인 심장과 그것을 보호하는 갈비뼈, 나아가 무수히 많은 핏줄이 엉켜 있는 급소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사고로 내장 기관 일부분이 다치면 목숨이 위험하지만, 뛰어난 의원에게 치료받으면 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심장은 다르다. 한번 다치면 끝이다. 무림인들이 암경(暗勁)을 유독 조심하고, 심지어 암경을 쓰는 무공을 마공이라고까지 매도하는 것은 심맥 파열의 공포 때문이었다.
그만큼 심장은 중요하다.
즉, 사람들은 본인들의 마음을 심장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장이 없으면 죽는다. 같은 말로, 마음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
이천상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타인을 배척한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에 가까운 것이리라.
이천상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자신 역시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살아야 한다는 생물로서의 본능 때문에 지금껏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과 마음을 알고 이해했을 뿐,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다.
이제야 이천상은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처럼 기능하는 목각 인형이었을 뿐이었나.’
순간 그는 심장이 엄청나게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피가 그렇게 빨리 도는데도 손발이 차가워졌다. 대신 얼굴에는 열이 올랐고 귀는 숫제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이천상은 자신의 상태에 당황했다. 자신의 이 상태가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지 몰랐기에 당황했고, 나아가 자신이 당황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
이것이 무엇일까?
이 변화는 무엇일까? 난적을 마주했을 때도, 무공을 몰랐던 시절 맹수와 마주했을 때도 이만큼 피가 빨리 돌지는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솟구쳤다.
그것은 ‘혐오’였다.
이천상은 지금, 인생 최초로 자기혐오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상태를 해석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대체 왜 남들과 다르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언제나, 항상.하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다.
‘심각…….’
생각해 보니 심각하다는 단어조차도 생소했다.
그에게는 심각함이라는 것이 없었다. 언제나 해야 할 일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심각함의 의미는 알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몰랐다. 말 그대로 느낌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무심하고 진지했던 이천상의 눈이 공허함으로 물들었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상정했던 뛰어난 두뇌가 순식간에 하나의 생각으로 몰려들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 이유였다.
마음은 심장이다. 심장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고로 자신은 죽은 사람이었으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인가?
두근두근! 두근! 두근두근!
빠르게 뛰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이천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한데 이게 심장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이쪽이 아파 본 적 없었다.
경험이 없으니 해석도 안 된다. 붉게 달아올랐던 이천상의 얼굴이 일순 하얗게 질려 갔다.
강렬한 고통 와중에도, 이천상은 제 삶을 돌아보았다.
인생 첫 기억이 있었던 시절부터 사냥꾼으로 살았을 때를 지나, 천마신교에 들어와 무수히 많은 경험을 쌓아 야차사령의 일각주가 되었을 때까지.
순간 이천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기억 중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의아해서 살피자마자 머릿속에 천둥 번개를 안겨다 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버지.’
이가상단의 단주.
아버지.
죽어 가던 자신에게 주먹밥을 주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온 자신을 웃으며 양자로 삼았던.
종내에는 자신에게 죽음을 안겨 달라 부탁했던 아버지.
이천상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너밖에 없구나. 나를 해방해 줄 사람은.
자신을 죽여 줄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양자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아버지.
순간 이천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자신을 죽여 달라 부탁하는 아비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죽이는 아들이 정상으로 보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다 한들, 아비를 죽인 아들의 마음은 또 어떨 것인가.
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다. 지혜롭다고도, 희대의 성인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평범하면서도 성품 좋은,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들에게 칼을 쥐여 주고 자신을 죽여 달라 한다?
아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을 생각하지 않을 분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부탁을 했다는 건, 자신이 평생 그 기억으로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양자로 삼았지만,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다.
자신에게 정을 주었지만, 평범함과는 수만 리 동떨어진 정을 주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매정하다고 말할 근거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천상은 아버지에게 부채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사람조차도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우우우우웅!!
단전이 울음을 토했다.
흰자위만 남았던 이천상의 눈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했다가 다시 희게 변하길 반복했다.
강한 정신적 충격에 마기가 날뛰기 시작했다. 강철처럼 단단했던 하단전의 마기도, 광활하기 그지없는 상단전에 숨어 있던 혈강기도 미친 듯이 꿈틀거리며 발악했다.
이천상은 죽음을 느꼈다.
모든 정신이, 온 마음을 다한 집중이 자신의 혐오를 과녁으로 삼아 날아간다. 의념의 지배를 받는 진기가 난동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번쩍!
한 줄기 핏빛 광채가 이천상의 미간을 관통하고 빠져나왔다.
스르륵.
이천상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머리를 박으면서도 그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자 뜻밖에도 이천상은 안도감을 느꼈다.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건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 죽은 채로 기능하는 사람.
‘나는 존재해선 안 될 생물이었다.’
이천상이 눈을 감았다.
‘죽는다……’
그때였다.
지금껏 공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