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86
외전 136화. 거인의 그림자 (3)
두근!
조금씩 힘을 잃어 갔던 심장이 일순 강하게 뛰었다.
츠츠츠.
비어 있을 뿐, 형태는 누구 못지않게 탄탄했던 중단전이 꿈틀거리며 미세하게 형상을 바꾸었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한번 장착된 단전은 더 커지거나 줄어들 수는 있어도 형태를 바꾸는 예는 없었다.
이천상의 중단전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조금씩, 조금씩 각을 만들었다.
원형에서 타원(橢圓)으로, 타원에서 점점 둥그스름한 사각(四角)으로.
그렇게 조금씩 형태를 바꿔 가다, 어느새 날카로운 각이 살아 있는 여섯 면의 사각 형태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우우웅!
신비로운 일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치이이익!
불안정하게 일렁이던 하단전의 마기가 한 마리 뱀이 되어 중단전을 향해 스멀스멀 올라갔다.
우우웅!
하단전의 진기가 중단전과 이어졌다.
본래 그의 삼단전은 잘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어졌을 뿐, 어떠한 기도 존재하지 않던 중단전 때문에 활발한 상호 작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환한 금빛으로 가득하던 하단기가 중단전과 이어지자, 푸른빛으로 가득했던 중단기도 줄을 타고 내려가 하단전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빛이 섞이진 않았지만, 마치 섞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색조를 보여 준다. 하단전과 중단전의 완전한 공명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츠츠츠츠.
완성된 중단전의 상부가 투명한 문을 활짝 열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상단전의 혈강기가 움찔했다. 아까 뛰쳐나갔던 미세한 구멍이 막혔는데, 아래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줄 넉넉한 그릇이 생겨난 것이다.
번쩍!
중단과 하단의 어우러짐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웠다면, 중단전을 향해 치고 내려가는 상단기는 빠르고 격렬했다.
그야말로 한 줄기 벼락이 따로 없었다. 시뻘건 색으로 물든 상단기는 단숨에 중단전을 강타, 육면 사각의 중단전을 완전히 잡아먹으려 들었다.
“……!!”
이천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억!”
뭉클뭉클.
부릅뜬 이천상의 눈에서 불그스름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으윽!”
이천상은 괴로운 신음을 내며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뜨겁다.’
심장에 태양을 심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그 태양은 환하게 빛나지 않았다. 태양인데도 지독하게 비틀려 어둡기 그지없는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천상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두 눈은 마귀처럼 길쭉하게 찢어지고 환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눈꼬리에 맞닿을 정도로 올라갔다. 왠지 모르게 송곳니도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사아아아악!
이천상의 몸에서 흘러나온 지독한 살기가 연기가 되어 방을 어지럽혔다.
‘목이 말라.’
갈증이 일었다.
뭔가를 마시고 싶었다. 사고의 힘이 쉽게 침범하지 못하는 욕망의 영역이었다.
‘뜨거운 게 마시고 싶어.’
순간 이천상의 머리는 그 뜨겁고 질척한 액체를 떠올렸다.
‘피.’
피가 마시고 싶다.
피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목마름은 배가 되었고, 무지막지한 살육 욕구가 삽시간에 손끝까지 번져 나갔다.
이천상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도 붉은 안광을 토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지독하게 섬뜩했다.
그의 손이 바닥을 짚었다.
콰드득!
엄청난 악력에 나무판자가 부서졌다.
‘가자. 나가자. 나가서 찢고 부수고 마시자.’
그때였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느새 문 앞에 서 있던 이천상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춤했다.
환청인가? 아니다. 들렸지만 환청은 아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무슨 상관인가.’
이천상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시체가 아니야. 시체들의 봉분 위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지
이게 무슨 말이지?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환청이 아닌데도 환청처럼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그때였다.
“저…… 각주님?”
붉게 물들어 있던 이천상의 눈이 흔들렸다.
익숙한 목소리다. 누군지는 모르겠다.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서 사지를 찢고 그 피를 들이켜고 싶은 욕망이 솟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는 한마디.
‘누구지.’
알 게 뭐야? 당장 문을 열어. 나가서 찢어 죽여라!
“살기가 과하신 것 같아서, 혹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가 싶어 왔습니다.”
이천상의 눈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괜찮다.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야.”
“아,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각주님께서도 많이 다치셨으니 내기가 불안정해지신 모양입니다. 별문제 없으시군요.”
문제? 무슨 문제?
사람을 죽이겠다는 게, 살기를 풀풀 풍기는 게 왜 문제야?
“각주님.”
움찔!
“……사실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많이 피로하신 듯하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이천상의 입이 다시금 저절로 열렸다.
“무슨 일인가?”
“…….”
“별일 아니라면…….”
“그저 들은 얘기입니다만……. 혹시라도 조부님께 가실 생각이라면…….”
조부? 조부가 뭔데? 누군데?
“조부님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
“가신다면 그 뜻을 제가 어찌 꺾겠습니까마는……. 정말 가신다면, 부디 조심하십시오.”
부르르.
이천상의 손이 떨려 왔다.
누군지 모를 남자가 뱉어 내는 목소리에 실린 어떠한 감정이 그의 살육 욕구를 바람으로 날려 보냈다.
움찔!
중단을 물들였던 시뻘건 상단기가 마구 난리를 쳤다.
중단전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게 단순한 현상인지, 자신의 의지인지 이천상은 판단하기 힘들었다.
이천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십 조장.”
십 조장? 십 조장이었나? 근데 십 조장이 누구지?
아! 유상천!
“걱정해 줘서 고맙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상상도 못 할 만큼 진한 감정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히 각주님을…….”
“너에게, 아니 야차들 모두에게 진즉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든, 적어도 너희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죽진 않을 것이다.”
“……!”
“내가 죽을 자리에 가야만 한다면, 그땐 당당히 죽으러 가겠다고 말해 주겠다.”
“각주님.”
“그러니 너희도 내 허락 없이 죽으면 안 된다.”
그 말을 뱉으며, 이천상은 죽은 야차들을 떠올렸다.
일군의 첫 임무.
복건의 상단 임무에서 소림과 연관된 이들과 화려하게 부딪쳤더랬다.
그때 죽은 야차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들의 이름은 물론 표정, 눈빛, 평소의 말투, 무공 습관, 누가 누굴 좋아하는 것까지도 전부 머리에 있었다.
‘나는…….’
이천상은 눈을 감았다.
‘나는.’
문밖에서 유상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쉬십시오.”
“쉬어라.”
잠시 후, 서성이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문에 기댄 채 풀썩 주저앉은 이천상이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우웅! 우우웅!
어느새 중단전은 본래의 푸른 색깔로 돌아왔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편안하여 두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환한 태양이었다.
붉은 상단기는 어느새 중단전과 이어진 통로를 별빛처럼 수놓고 있었다. 이전처럼 통제 불능으로 날뛰지 않았다. 그러한 형태, 그러한 색조가 본래의 모습이라는 듯 너무나도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머물렀다.
“…….”
이천상은 힘없이 팔을 내려놓았다.
희대의 숙적과 사흘 밤낮을 싸우기라도 한 양 온몸에 힘이 없었다. 지쳤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지쳤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머리는 맑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천상은 작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시체는 아니구나.”
너는 감정을 모르는 것일 뿐, 감정이 없는 괴물이 아니라는 도헌의 말이 떠올랐다.
괴물.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그렇게 보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어느새 나 자신을 진짜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남들과 달라.’
사람이 아니다. 아직은.
‘그래도 느낄 줄은 안다.’
감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했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이천상은 깨달았다.
감정 없는 사람은 괴물이니 자신은 괴물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감정이 없는 자가 존재할 수 없다면, 자신 역시 감정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만 했다.
시체는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은 움직이고 있으니 시체가 아니다. 고로, 자신에게도 감정은 있다.
다만 도헌의 말마따나 그것을 모를 뿐이다. 가슴으로,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젠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람과 괴물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미아.
‘상관없다.’
괜찮다. 이대로도.
언젠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지금으로도 괜찮다.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환경이 주어졌다면.
그렇다면 나의 의지대로, 나답게 냉정하게 나아가면 된다.
삶이 별것인가. 다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지만, 자신처럼 감정인지 이성인지 모를 모호한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이천상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잠은 아니었다.
꿈을 꾸었다.
감정과 달리 겪음과 동시에 ‘이게 꿈이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인생 최초로 꾼 꿈속에서 이천상은 과거를 다시 살았다.
사냥꾼이었을 때의 나, 상단의 양자가 된 나, 천마신교의 야차가 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어 버린 야차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꿈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이천상은 열 시진 후 깨어났다.
* * *
사흘 후.
딱.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 놓이는 소리가 경쾌했다.
“허어.”
감탄사와 함께 일각이 넘도록 검은 돌을 보던 초로의 문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투덜댔다.
“이거, 수가 보이지 않는군요.”
“본교 최고의 바둑 귀신이 어찌 벌써 포기를 하시는가?”
말과는 달리 백골신마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지간히 통쾌한 모양이었다.
문사가 웃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본교는 물론 강남 무림 전체를 뒤져도 정선(定先)으로 두는 사람을 찾기 힘든데, 백골 어르신께서는 그러고도 모자라 저를 밀어붙이고 계십니다.”
“자신감이 지나치다 못해 하늘을 찌르는구먼.”
“바둑을 배운 지 삼 년 이후로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용인한 적이 없거든요. 벌써 사십 년이 다 되었습니다.”
“질리는구먼. 대체 누군가? 고약한 귀신에게 바둑까지 가르쳐 준 못되어 먹은 작자는?”
“당연히 제 사부님이시지요.”
“빨리 두게.”
“하하.”
문사가 부채질하며 슬쩍 제안했다.
“수가 나기 전까지 수다나 떨까요?”
“그래도 본교의 군사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대국 한 판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어야 쓰겠는가? 그냥 빨리 두지?”
“승부욕이 어마어마하십니다.”
“자네를 배려한 거라네.”
“배려가 아니라 이 기회가 아니면 못 이길 것 같아서 밀어붙이는 걸로 보입니다만.”
“오해일세.”
“수다 좀 떠시지요. 한 시진 동안 앉아서 바둑판만 노려봤더니 눈알이 다 빠질 지경입니다.”
백골신마가 투덜대며 허리를 폈다.
“젊은 사람이 허약하기는.”
“하하! 어르신께서야 절 젊게 보지만 밖에 나가면 슬슬 관짝 짜 놓을 나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내 욕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백골신마가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승리의 과실을 따 먹을 시간이 조금 늘어났구먼. 그래, 무슨 수다를 할까? 이다음 수를 어디에다 놓으면 좋을 것인지에 대한 담론 같은 거?”
“대력신마를 살려 주셨지요?”
기습과도 같은 질문에 백골신마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바둑이나 두러 온 게 아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