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87
외전 137화. 거인의 그림자 (4)
군사, 당대 천마신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권력자 중 하나인 마뇌(魔腦) 허성관의 기습적인 질문에도 백골신마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허성관이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연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대력신마를 살려 주셨다고. 자신에게는 말릴 힘이 없었다고.”
백골신마가 혀를 찼다.
“그 사람은 그래서 안 돼. 항상 어정쩡하거든. 칼을 잡든 책을 쥐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지, 꼭 그렇게 애매하게 줄을 타요. 오히려 그 길이 제일 위험하다는 걸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야.”
“연 장로님이야 항상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어디에 힘을 싣지도 않은 채 가운데서 이득만 취하는 버릇, 아마 앞으로도 절대 고치지 못하실 겁니다.”
“자네도 그이 싫지?”
“그럴 리가요. 오히려 좋은데요. 필요할 때마다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거든요.”
걷는 길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래도 같은 마왕인데, 자소대마를 너무 쉽게 말하는 그였다.
백골신마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머리 쓰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지.”
“제대로 통제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거래라도 되는 지금 상황이 낫지요.”
“군사답구먼.”
“감사합니다.”
허성관의 눈이 반짝였다.
“본래 얘기로 돌아와서, 알고는 계시지요? 이번 명령, 교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라는 것.”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교주지. 교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굳이 내가 그 먼 길을 갔을 리가 없지 않나.”
“명령이었지만, 교주님 개인의 감정이 많이 들어간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개인감정이 많이 들어간 명령.
돌려 말했지만, 결국 완수하지 못하면 교주가 유독 화를 낼 수 있는 명령이었다는 뜻이었다.
백골신마가 피식 웃었다.
“언제는 사감 안 섞였던가.”
“이번 경우는 유독 심했지요. 애초에 대력신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르신까지 보내려 했겠습니까.”
“그럼 자네가 교주에게 말해 주면 되겠구만. 백골 어르신까지 갔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대력신마가 자력으로 탈출해버렸다, 이렇게.”
허성관이 크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거짓말은 못 합니다. 그리고 교주님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 어찌 눈 가리고 아웅 하겠습니까.”
“뭐, 그게 또 달리 생각하면 거짓말은 아니지. 대력신마는 나를 설득했어. 나는 막을 수 없었다네. 그렇게 치면 대력신마가 자력으로 탈출한 게 맞지.”
“어르신.”
허성관의 얼굴이 제법 진지해졌다.
“교주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마왕 때도 그랬네. 그 사람, 은근히 화가 많아.”
“교주님께서 몇몇 마왕에게 호칭을 편하게 하라 말씀하신 것은 굉장한 배려입니다. 본교 역사상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백골 어르신을 많이 위하고 계십니다.”
“그게 문제지.”
“……?”
백골신마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교주가 호칭을 편하게 하라고 했다고?
맞는 말이다. 실제로 교주는 자신과 몇몇 마왕에게 그런 특권을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자한 정치요, 과거 함께 전선을 누볐던 전우들에 대한 예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백골신마의 생각은 달랐다.
‘자네가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짓을 하니 본교 이곳저곳에서 곡소리가 나는 거 아닌가.’
교주, 아니 자전신마에게는 규칙이 없다.
배포 크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도 다 자기 마음대로다.
교주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확히는, 교주에게 그러한 권한은 있지만 신교를 위하는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된다.
조직에는 규범과 법도라는 것이 있다.
내가 수장이라고, 내가 조직의 법을 만든다고 밑도 끝도 없이 편한 대로 내지르다가는 조직원들이 결집하지 못하고 분란만 쌓이게 된다.
의도가 좋아도 결과 자체가 나쁘게 나온다면, 결국 그러한 행위는 해선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자전신마는 크게 잘못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
“대력신마는 배교도들이 만든 반천교(反天敎)에서도 최중요 인물입니다. 교주님의 사감을 떠나, 이번 임무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허성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 백골 어르신께서도 그들과 뜻을 함께하시기로 마음먹은 겁니까?”
“이보게, 군사.”
백골신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자네가 본교로 들어왔을 때, 별다른 두각도 드러내지 못했을 때.”
“…….”
“나는 그때부터 자네를 주시했네. 저놈은 물건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황 군사는 왜 저만한 동량을 키우려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네.”
허성관의 눈매가 살짝 굳어졌다.
백골신마가 말한 황 군사는 전대 군사였다.
그는 신교 역사를 놓고 보면 그다지 대단한 것 없는 군사였다. 무능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유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전대 교주가 그를 애지중지한 것은 맡은 일은 반드시 완수하는 그의 끈기와 뛰어난 안목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교주에게도 쓴소리를 가할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이기도 했다. 물론 그 기반은 신교를 향한 압도적인 충성심이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취합하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을 잡아내는 능력이나 일을 빠르게 매듭짓는 능력에 있어서 그를 상회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는 능력 이전에 신교의 군사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이제 알겠네. 황 군사가 왜 자네를 자신의 후임으로 삼지 않았는지.”
“…….”
“군사란 가벼워선 안 돼.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언행이 가벼우면 탈락이야.”
백골신마가 웃으며 허성관을 바라보았다.
허성관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자네에게는 무거움이 없어.”
“반천교와 뜻을 함께하려 했냐는 질문 한 번으로 매서운 회초리를 맞는군요.”
“내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쉬이 해서는 안 된다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게 군사 일 아닌가? 하물며 아는 척을 해도 말은 아껴야 하는 직종이 군사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떤가?”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몰라도 아는 척, 알면 더 많이 아는 척을 해야 하지요. 상대를 강하게 몰아붙이고, 때로는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틈을 쑤셔야 하는 족속이 바로 군사입니다.”
“그래서 황 군사는 자네를 좋게 보지 않은 거라네.”
일순 허성관의 표정이 풀렸다.
“얘기가 샛길로 빠졌군요. 그래요, 백골 어르신이 반천교와 손을 잡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니니까요.”
“덕분에 점수 좀 까먹었다네, 자네. 이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백골 어르신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점수 딸 생각은 없습니다. 교주님만 저를 알아주시면 되지요.”
“말은 좋군.”
“지금 제게 그 이유를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일간 교주님께서 호출하실 겁니다. 그때가 되면 늦어요. 제아무리 백골 어르신이라도 교주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이상, 마왕직에서 박탈될지도 모릅니다.”
마왕 박탈.
지위를 박탈당하는 거야 임무를 실패한 자들이 자주 겪는 말로지만, 마왕 정도가 되면 얘기가 또 다르다.
마왕직에서 벗어나는 순간 백골신마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 어떤 조직에 속하지도 못한 채 신교를 떠돌다가 어느새 유령이 될 것이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다. 교주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위인이었다.
백골신마가 다시 차를 홀짝였다.
“그런 걱정이라면 접어 둬도 괜찮네.”
“교주님은 실패에 관대하신 분이 아닙니다만.”
“그거야 자네보다 내가 더 잘 알지.”
“방도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방도? 그런 것까지 자네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내 신변의 안전을 확신했으니 교주에게 찾아가겠다고 했겠지?”
“……?!”
허성관의 눈이 흔들렸다.
백골신마가 피식 웃었다.
“교주전으로 찾아가겠다는 정보는 접하지 못했나?”
“…….”
“하긴, 교주가 자네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 줄 필요는 없지.”
“…….”
“그래도 이번엔 좀 심했군. 내가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겠다고 했는데도 자네를 풀어놨다는 것은, 가서 망신이나 당해 보라는 뜻이 아니겠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허성관의 표정이 다시 여유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더 이상 웃음 짓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권좌에 계시는 분께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어떤 일을 해도,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용인되는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자네는 최고가 될 수 없네.”
“교주님의 권세와 권력을 부인하시는 겁니까?”
“또 그러는군.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 괜한 적이나 만드는 그런 언변, 어느 순간 자네의 위치를 절벽 끝으로 내몰게 될 것이네.”
“걱정은…….”
“그런 순간이 오면, 아마도 교주가 직접 자네를 내치겠지.”
가만히 백골신마를 바라보던 허성관이 백돌을 짚어 한 곳에 놓았다.
백골신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
“어르신 기력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제 상대는 아닌 듯합니다.”
“이거 한 방 먹었군. 국지전에서 이기려 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하려 했다……. 역시 젊은 사람 머리는 못 따라가겠어.”
“진즉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수입니다.”
“성격 나쁘구먼. 득의양양한 내 모습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꼬?”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이 군사 아닙니까.”
백골신마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여덟 집인가?”
“정확하십니다. 빠르시군요, 역시.”
“빨라도 넓지는 못했군. 내가 졌네.”
허성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대국에서 이겼으니 찻값은 따로 내지 않겠습니다.”
“찻값은 무슨. 그런 걸로 생색낼 만큼 없이 사는 사람 아니라네.”
“그러셔야지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어서 차는커녕 구정물도 못 받아드시게 되면 얼마나 원통하시겠습니까?”
백골신마가 씨익 웃었다.
“다음에 또 두세나.”
“당분간은 바쁠 것 같습니다. 더 노력하셔서 도전하십시오. 제 방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몹쓸 사람 같으니라고.”
“그럼 이만.”
예를 취한 허성관이 총총걸음으로 거처를 나갔다.
흑백의 돌을 정리하며 백골신마가 투덜거렸다.
“영 재수 없는 사람이로고. 저 성질머리 안 고치면 당장 내일이라도 파면될 텐데.”
촤르륵, 촤르륵 하는 소리가 정자의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를 뽐냈다.
“그래서.”
돌을 다 정리한 백골신마가 저 멀리 별채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잘 구경했나?”
잠시 후.
별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리며 이천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골신마가 피식 웃으며 턱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와서 앉게.”
이천상이 말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백골신마가 바둑돌이 들어 있는 통을 두들기며 물었다.
“바둑 둘 줄 아나?”
“배운 적이 없습니다.”
“가르쳐 줄꼬?”
“심오한 영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심오하고 신비롭지. 바둑판 안에 인생이 있다는 소리를 괜히 하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언제고 배우겠습니다.”
“허허! 역시 자네도 보통 배포는 아니라니까.”
백골신마가 오른 무릎을 세웠다. 편안한 자세였다.
“군사가 바로 와서 부득불 자네를 기다리게 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해서, 한창 바쁜 사람이 이 늙은이는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고?”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칼 받으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