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88
외전 138화. 거인의 그림자 (5)
백골신마가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참 재미난 날이로군.”
“…….”
“솔직히, 젊은 혈기에 시간이라도 끌 줄 알았네. 코앞에 직책을 흔들어 보여 주면 더더욱 물러나는 게 혈기 아니던가.”
“…….”
“한데도 생각보다 빨리 와서 놀랐네. 생각해 봤지, 이놈이 어떤 식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까? 괜스레 무안해서 이런저런 말로 시간 좀 적당히 끌다가,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에 칼 받으러 왔다는 말을 에둘러 할 줄 알았어.”
“그렇습니까.”
“자네는 내 예상을 많이 벗어나는군.”
“…….”
“말한 김에 고백하자면 처음 자네를 봤을 때, 이놈은 감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참 의문이었지.”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백골신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무공에 입문한 지 일 년 남짓인데도 야차사령의 일군주가 되었다지?”
“그렇습니다.”
“믿기지 않았네. 누구라도 믿기 힘들지. 그때 본 흑마대 삼 조장 녀석도 비슷했다고 하니, 이것들이 쌍으로 놀리는 건가 싶어서 짜증도 났었다네.”
“…….”
“즉, 자네는 재능과 성격 모두 나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범주에 있다는 말이지.”
잠시 말을 멈추고, 백골신마는 찬찬히 이천상을 뜯어보았다.
상대를 보는데 눈 한 번 깜빡이지를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윗사람과 대화할 때 똑바로 눈을 마주치는 것을 예의 없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대화의 자세가 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부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상대가 눈을 끔뻑이지도 않고 빤히 바라보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자연스럽게 부담을 주는 눈빛.
의도가 없어 더더욱 무서운 그 눈빛이, 흥미를 진하게 자극했다.
“감정이 마모된 것 같지만 진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어. 혈기를 입에 담은 이유가 거기에 있네. 늙은이는 늙은이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고, 젊은이는 젊은이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 법이거든.”
“…….”
“한데 이렇게 다 정리하고 온 걸 보면, 자네는 여느 젊은이들과 확실히 다르구먼.”
이천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달리 할 말은 없다. 말이 끝나기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바로 그런 부분이, 또 한 번 백골신마를 미소 짓게 했다.
“칼을 받으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그 의미가 어떤 건지는 전에 다 말했으니 이해하고 있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호?”
“그리고 그런 것은 저의 선택에 하등 의미가 없었습니다.”
“의미가 없었다?”
“수하들을 거느린 입장에서 뇌물 따위를 받을 수 없지요. 제 주관은 그것이었습니다. 칼을 받은 이후의 일 같은 것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백골신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은?”
“제가 어정쩡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확신도 아니고 깨달았다도 아니다.
‘이해라.’
몰랐던 것을 알았다는 느낌이 아니다. 알고 있었지만, 본인도 모르게 외면했던 부분 역시 나를 구성하는 일면이라는 걸 알았다는 뜻이었다.
백골신마가 손을 들었다.
어디서 주시하고 있었는지, 시비가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술 한 병 내오거라.”
“네.”
잠시 후.
바둑판 위에 잔을 놓은 백골신마가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게.”
“괜찮습니다.”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그럴 수도 있지요.”
백골신마가 짐짓 표정을 굳혔다.
“손짓 한 번으로 날려 버릴 수 있는 약자를 독으로 희롱하는 저열한 취미 따위 없네만.”
“그래도 마시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이천상을 노려보던 백골신마가 다시 미소 지으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기본이 됐군.”
잔을 채운 백골신마가 그대로 비웠다.
“한 잔 따라 보게.”
이천상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손놀림이었다. 윗사람에게 예의를 다해 술을 따라 준 적이 없는 탓이었다.
백골신마는 이천상이 따라 준 술을 연거푸 두 번을 마셨다.
그렇게 석 잔 술을 마신 백골신마가 가볍게 물었다.
“상천은 잘 지내는가.”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손주를 향한 애틋함이나 걱정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의 포문을 여는 용도의 언급이라고 할까.
“잘 지냅니다.”
“녀석의 고루마공은 성취가 낮을 텐데.”
“제 몫은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백골신마의 눈이 깊어졌다.
“손주 놈이 나에 대해 따로 말해 준 건 없던가?”
“있습니다.”
“괜찮으면 들어 보겠네.”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위험하다…….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사족이 많이 붙었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조부는 위험하니 그와 엮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백골신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위험한 사람에게 찾아와 칼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어정쩡했던 자신을 이해하고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기 위함인가?”
“그렇습니다.”
“자네가 보는 높은 곳은 어디인가? 교주위인가?”
너무나도 서슴없이 교주위를 말한다.
이천상은 무공을 배운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신교 생활 역시 고작 일 년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교주위를 언급하다니,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위치도 정해 놓지 않았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선. 그 선까지 오르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로서는 그 선이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교주지.”
누가 들으면 한담이나 나누는 줄 알 정도로 한가로운 투였다.
“마도무림 한정으로, 교주에게 할 수 없는 것 따위는 없네. 그 여파가 어떻게 되든 일단 모두가 인정을 해 준다는 것이지. 이래저래 많은 권력자가 있지만 결국 교주의 입김 한 번으로 무너져 내려 버릴 만큼, 이 천마신교의 권력 구도는 한 곳으로 치중되어 있다네.”
“그 역시 제가 체감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가?”
백골신마의 얼굴에 미약한 실망이 깃들었다.
“다만.”
뭉클, 피어오르는 이천상의 기도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싯누런 벼락을 연상케 했다.
“도달한 곳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교주위까지 노려 볼 수도 있겠지요.”
“……!”
백골신마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교주위라는 것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사위를 긴장시킬 만한 단어다. 당장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는 것이 교주전에 들어가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참형을 당할 수 있다.
이 젊은 놈이라고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데도 당당하게 교주위를 노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말이라도 십대마왕의 일인이자 교주와 전선을 누볐던 장로가 뱉는 것과 외성 전투 부대의 일원이 뱉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교주위까지 노려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자네에게 그 정도 능력과 재능이 있다고 보나?”
“흐르는 물에게 바다에 도달할 수 있느냐고 묻는 새는 없는 법입니다.”
물은 자신, 날짐승인 새는 백골신마다.
그것은 절묘한 비유였다.
물이 흘러넘칠 때는 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법, 지금의 신교가 그러하다. 하지만 정작 물을 품는 것은 바다이니 교주는 곧 바다라고 할 수 있을 터.
바다 위를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장로들이되, 그들은 결코 바닷속에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면 죽으니까.
누구보다 자유롭지만,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이들. 그들이 지금의 십대마왕이다.
반대로 한없이 작은 방울들이 모여 흐르는 강물이 된 것이 마인들이다.
가뭄이 심해 강물이 말라 버리면 허무하게 증발하는 이들도 마인들이다. 그러나 기어이 바다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 역시 마인이다.
누구나 교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십대마왕은 아니다.
운명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갈지는 지켜만 보라는 것이다. 어차피 당신은 그런 존재이니까.
한동안 이천상을 직시하던 백골신마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아(自我)도 찾지 못한 어리숙한 천재라, 가능성은 있어도 삼 년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정신 좀 차리라고 장난을 쳐 봤더랬지.”
“…….”
“인제 보니 재능 넘치는 목각 인형이 아니라 재능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야망가였구만.”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보여 준 적 없는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교주위라는 단어는 함부로 입에 올릴 것이 못 되네. 이곳에서야 상관없지만, 다른 곳에서는 언사를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라고 안전한 건 아니야. 본교에 대해 잘 모르는 자네 같은 젊은이들 앞에서 자존심 한번 내세울 때나 목숨 걸고 뱉는 단어일 뿐이지.”
백골신마가 정자 너머 본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이천상의 눈이 번쩍였다.
‘허공섭물.’
백골신마의 늙수그레한 손에서 보이지 않는 마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풍성하거나 단단하지도 않다. 마치 수십 개의 투명한 실이 꿈틀거리며 창가를 향해 나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실 한 가닥, 한 가닥은 바위를 베고 강물을 찢어발길 것처럼 사나운 기세로 가득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 없지만, 한번 느끼는 순간 백골신마의 마기가 얼마나 고차원적인 영역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천상은 백골신마의 그 마기에 놀라움 이상의 경이는 품지 못했다.
‘대단하다.’
엄청난 경지에 이른 진기였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몸부림을 쳐도 닿을 수 없는 초고밀도의 마기였다.
하지만 저 밀도가, 저 깊이가 어쩐지 익숙했다.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저 정도 기운을 안고 살아온 것처럼.
대력신마보다도 한 수 위의 마기를 지닌 백골신마의 힘이, 이천상에게는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느껴졌다.
후우우웅.
창가를 통해 날아온 한 자루 칼이 백골신마의 손에 잡혔다.
새하얀 천으로 둘둘 싸인 칼이었다. 검이 아니라 칼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단단히 휘감긴 천 아래 도(刀) 특유의 완만한 곡선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혈풍도보다 도신이 널찍하다. 길이는 비슷했기에 더 짤막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백골신마가 이천상에게 칼을 건넸다.
“풀어 보겠나?”
이천상은 양손으로 그 칼을 받았다.
그때였다.
우우웅!!
천에 손이 닿자마자 손안으로 알 수 없는 기운이 마구 침투하는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 침투한 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이 들었다. 범상치 않은 칼이라는 걸 절로 알 수 있었다.
이천상이 하얀 천을 풀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자태.
이천상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에 말했지? 신병이기를 만들 기술이 없는 자가 역량껏 만든 칼과 신병이기를 만들 기술이 있는 자가 여유롭게 만든 칼은 겉보기에는 비슷할지언정 전혀 다른 병기라고.”
“…….”
“그 칼은 과거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명장이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삼 년을 쉬다가 최초로 만든 마도(魔刀)라네.”
마도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살벌하고 기괴한 칼이었다.
좌우로 해골 문양이 새겨진 둥그스름한 도환이 특히 그랬다. 마치 위에서 자른 두개골의 앞면을 붙여 도환으로 만든 것 같았다.
쌍면해골(雙面骸骨)의 도환(刀環)도, 도병(刀柄)도, 칼날도 전부 탁한 우윳빛이다.
마치 진짜 유골로 만든 것처럼 불길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뿜어내는 귀신 붙은 칼.
“욕계자문백골귀마도(欲界子紋白骨歸魔刀). 통칭 백골마도(白骨魔刀)라 불리는 칼이 그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