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92
외전 142화. 거인의 그림자 (9)
연무장 밖 땅바닥에 누운 황무석의 얼굴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가득했다.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었다.
외상이라고 한다면 나중에 멍 좀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내상은 없다. 애초에 파괴를 염두에 두고 내친 일격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멀리 날려서 단박에 승부를 결정짓기 위한 일타(一打).
이천상은 이미 몸을 돌려 걷고 있었다. 도헌과 함께 집무실로 가려 함이었다.
그때였다.
“거기 서.”
화아악!
어느새 연무장 바닥에 손을 올려 힘을 주고, 천천히 그 위로 올라오는 황무석이 보였다.
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파가 일었다.
완연하게 드러나는 마기가 실로 인상적이었다. 마환공을 기반으로 연성한 청사마공(靑絲魔功)의 기운이었다.
기세를 북돋아 마공까지 개방했다. 단순한 손속 교환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
그렇다.
마도무림의 비무란 누구 한 사람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야 끝이 난다.
이 기조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했다. 마인 간의 비무가 함부로 벌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천상이 황무석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가 다시 올라와 싸움을 걸 것은 예상했다. 변하기 전에도 인간 군상의 행동 원리를 알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은 논리적 사고 이전에 직감으로 알았다.
그런데도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 이유는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천상의 생각은 적중했다.
‘쓰군.’
언제부터일까?
이천상은 상대의 마기를 단순히 기감이 아닌 후각이나 미각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마기에서 받는 느낌을 후각과 미각 정보로 치환할 수 있었다.
황무석의 마기는 썼다.
쓰지만 풍성하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직관적이고 단순했다. 별다른 재료도 넣지 않은, 그저 순수한 쓴맛에 가까운 탕약과 비슷했다.
쓴맛은 곧 부정적인 감정을 뜻했다. 아직 세밀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먹을 풀었다.
행동 하나, 하나에 여유가 묻어난다. 어떠한 감정적인 동요가 없다.
심지어는 마공을 개방하지도 않았다. 황무석 정도는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듯, 이제는 자세를 낮추지도 않는 모습에 대원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사아아악!
황무석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분노로 가득 찬 마기, 거기에 살기까지 인다. 대원들은 물론 조장들도 당황하여 도헌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도헌은 가만히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주시하는데, 굳이 제지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황무석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거다.”
이천상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황무석의 눈이 귀신처럼 길게 찢어졌다.
“이놈!”
파아아악!
이번에는 황무석이 먼저였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래도 그는 광마대주의 부관이자 광마대 이인자였다.
절정고수로서 살아온 시간은 이천상보다 훨씬 길다. 온갖 임무를 겪으며 쌓아 온 경험 역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분노 속에서도 냉철한 이성은 유지했다. 달려들어 내치는 도격(刀擊)이 이천상의 몸을 사선으로 쪼개어 왔다.
현재 자세, 그리고 이전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회피하기 어려운 각도로 내리친다. 어떻게든 피한다 해도 좌측과 우측, 경우의 수가 두 가지뿐이며 막는다면 막는 대로 연환도(連環刀)의 전개가 가능하다.
단 일도(一刀)만으로 황무석의 전투력이 얼마나 빼어난지 알 수 있다.
조장들은 그 일격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천상의 대응은 좌측이었다.
파아악!
사선으로 자세를 낮춰 칼을 피하며 힘찬 진각으로 좌측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북천마혜보였다. 좌측으로 피할 걸 알았지만, 황무석의 생각보다 한 배 반은 더 빠른 속도였다.
파앙!
내리치는 칼날이 탄력적으로 투로를 바꾸었다.
그 한 수만으로 황무석의 초식 연마도를 알 수 있었다. 진짜 벨 기세로 휘두른 칼을 중간에 틀어 이격을 가할 수 있는 고수는 많지 않다.
이전에야 방심해서 당했다지만 두 번은 없다.
냉정하게 쫓아오는 칼날, 당장에라도 이천상의 가슴에 깊숙이 박힐 듯했다.
쩌엉!
황무석의 눈이 흔들렸다.
이천상이 맨손으로 칼을 쳐 낸 것이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의 칼은 청사마기로 강력하게 보호되어 있었다. 작정하고 도기를 뿜어내고 있어, 도면을 쳐도 손바닥이 날아갈 만큼 날카로운 기운을 담고 있었다.
한데도 칼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이천상의 손은 멀쩡했다.
훅!
다시 근접으로 파고든 이천상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장을 올려 쳤다.
칼날을 쳐 내느라 양손에 모인 공력이 흐트러졌다. 직선 공격으로 복부를 노려도 충분한 힘이 나오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턱을 쳐서 대응 능력 자체를 봉쇄하겠다는 것이 이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황무석도 만만치는 않았다.
피슉!
섬뜩한 일격이었다.
공력은 제대로 담기지 않았지만, 짧게 호선을 그리며 올려 친 장타(掌打)에 무시 못 할 기세가 담겨 있었다.
손끝에 닿은 턱에 미세한 상처가 났다. 한 치만 더 들어갔다면 턱뼈에 금이 갔을 것이다.
콰쾅!
황무석의 무릎과 이천상의 무릎이 마구 부딪쳤다.
이천상은 황무석의 복부를 노리기 위해, 황무석은 이천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릎을 세웠다.
강력한 발경의 여파로 두 사람이 각기 세 걸음을 물러났다.
권각보다 칼이 더 유리한 거리였다. 도기의 반경도 딱 좋았다.
황무석의 칼이 참영도법, 일참월영(一斬月影)의 투로를 따라 휘둘러졌다.
피슉!
이천상의 대응이 눈부셨다.
물러나지 않고 재차 접근하며 몸을 비트는데, 도기의 경력이 어깨 부근을 베고 지나갔다.
꽤 깊은 자상이었다. 움직이는 데에 문제는 없다.
황무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자식, 겁도 없나?!’
일참월영은 일도에 달그림자도 벤다는 초식명과 달리 빠르고 강력한 일도 뒤에 숨은 도기 한 줄기로 적을 베는 이중도기(二重刀氣)였다.
황무석은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도기가 발출된 순간 이천상도 그걸 알아챘다는 것을.
당황하여 물러나야 정상이었다. 정면으로 깨부술 힘과 속도가 없는 한, 경우의 수는 그 하나뿐이다.
그런데도 더 빨리 다가와 이중도기의 힘이 개화하기도 전에 몸으로 받아 냈다.
공포라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할지언정 그 한 번의 수로 전투 능력이 대폭 깎일 수 있음을 알고 있다면, 언감생심 선택할 수 없는 한 수였다.
‘이런 미친놈!’
황무석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재차 칼을 휘두르려 할 때.
번쩍!
내려치는 일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휘둘러져 땅을 쳤다.
황무석의 자세가 어정쩡해졌다. 허리가 길게 빠졌다. 칼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는데, 일순간 강한 인력(引力)이 생기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른 시점에 휘둘러졌다.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한 힘이 개입하여 도속(刀速)을 억지로 높인 것이다.
황무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느새 가까이 붙은 이천상이 땅에 박힌 칼등을 밟았다.
퍼억!
턱을 맞은 황무석이 일 장 뒤로 날아가 쓰러졌다.
쓰러졌지만 곧장 자세를 바로 세웠다. 칼도 놓치지 않았다. 머리통이 날아가도 칼은 쥐고 죽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애써 자세를 잡았지만 눈이 핑 돌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귀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울렸다.
‘위험!’
벼락처럼 청사마기를 운용, 두뇌로 진기를 보내 상태를 완화함과 동시에 측방에서 날아오는 위험을 감지했다.
이건 받아칠 수 없다. 위험만 감지했을 뿐, 어떤 공격인지 인지가 되지 않았다. 턱에 허용한 일격의 충격은 그렇게나 컸다.
황무석이 재빨리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진기로 충격을 없애서 균형 감각이 흐트러지진 않았다.
그때였다.
이천상의 손에 붉은 광채가 어렸다.
쾅!
“큭!”
내친 장력을 어깨로 받았다. 금강야차마공, 야차혈장 일격에 황무석의 자세가 다시금 불안정해졌다.
파아아악!
한번 무너진 상대를 가만히 두고 볼 이천상이 아니다.
두 걸음 만에 황무석의 코앞에 도달한 그가 쌍권을 내질렀다. 황무석 역시 흐트러진 자세로 어떻게든 칼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승부를 보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헌조차도 놀란 눈으로 이천상을 보았다.
칼과 주먹이 부딪치며 쇳소리가 터졌다.
다른 사람의 칼도 아니고 황무석의 칼이었다. 황무석의 칼은 상당한 명품으로 강철을 내려쳐도 날이 상하지 않는 보도(寶刀)였다.
그런 보도에 청사마기까지 실렸거늘, 그 호쾌한 칼질을 벼락같은 권법으로 쳐서 막는다.
저런 것은 도헌도 불가능했다. 권법 자체를 도법만큼 깊게 익히지도 않았다지만, 기본적으로 이룬 경지를 생각하면 이천상의 대응은 정말이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제일 놀란 것은 역시 황무석일 것이다.
이천상의 두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본래라면 잘려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옅은 자상만 남은 두 주먹에는 아직도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이럴 수가.’
몇 번이고 놀랐지만 마음이 흐트러지진 않았었다.
지금은 달랐다.
당황이 칼끝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체화된 칼질은 여전히 단호했지만, 흔들린 마음이 본래 의도한 위치에 있어야 할 칼날을 반 박자 늦게 움직이도록 만든 것이다.
훅! 훅!
코앞에서 휘둘러진 도법 이격을 상반신의 움직임만으로 피해 낸 이천상이 허리를 틀었다.
빠각!
황무석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최초로 제대로 얻어맞은 각법이었다. 허벅지 중단에 꽂혔는데, 정말 부러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다.
고통은 신체 반응에 문제를 일으킨다. 그의 허리가 속수무책으로 접혔다.
이천상의 두 주먹에서 금강마권이 터져 나왔다.
금강마권 절초, 연환금강십팔격(連環金剛十八擊)이었다.
퍼버버버버벅!
황무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열여덟 번의 벼락같은 주먹이 칼을 쥔 손, 어깨, 상박, 가슴, 얼굴을 연달아 후려쳤다.
어찌나 빠른지 그 열여덟 번의 권격을 한순간에 다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치링!
칼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황무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모두가 보고 있는 판국에 질 수는 없었다.
화아아악!
청사마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청사대마장(靑絲大魔掌)을 펼쳤다.
힘을 모아 터트리는 극대(極大)의 발경이라, 근접전에서 쓸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제대로 모으지 못한 힘으로 청사대마장을 폭발시켰다.
콰아앙!
무서운 폭음이 터졌다.
오롯이 청사대마장의 힘이 아니었다. 이천상의 쌍장이 야차혈장의 힘으로 공격을 분쇄해 버린 것이다.
주르륵.
이천상의 두 발이 다섯 치 정도 밀려났다.
반대로 황무석은 일 장이나 비틀거리다가 벌러덩 쓰러졌다. 내공만이 아니라 하체 단련도에서도 그는 이천상보다 아래였던 것이다.
치링!
발끝으로 도병을 찍어 올린 이천상이 단숨에 칼을 쥐곤 황무석에게 달려갔다.
황무석이 상반신을 세웠다.
퍼억!
세움과 동시에 각법에 맞은 그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파박!왼
발로 그의 오른팔을 찍은 이천상이 손에 든 칼로 황무석의 목에 가져다 댔다.
“……!!”
한순간에 난 승부.
피범벅이 된 황무석을 내려다보며, 이천상이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겠소?”
황무석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패배했다는 건 알지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면, 진짜 패배한 게 되는 것이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로군.”
그가 왼 주먹에 힘을 실었다.
황무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칼로 위협하는 게 아니라, 저 주먹으로 안면부를 내려칠 기세였기 때문이다.
도헌이 깜짝 놀라 외쳤다.
“잠깐……!”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