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94
외전 144화. 일어나는 불씨 (2)
“후우.”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도헌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네.”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 경험이었소.”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말투다. 실제로 이번 승부에서 패배했다 한들 분해하거나 자존심 상해할 성격이 아니었다.
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과함세. 내, 이것저것 많은 걸 챙기려다 보니 부하들 관리에 소홀했던 것 같네.”
이천상은 도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황무석의 분노 가득한 감정은 제법 맹목적이었다. 본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이유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얼핏 질투 따위의 감정 때문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가 자신을 질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인간에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인간은 아니다. 이천상은 황무석과 도헌을 머리로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으로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소. 다만 걱정이라면 본인이겠지.”
본인이란 황무석이 아니라 도헌을 뜻함이었다.
황무석은 광마대의 이인자요, 대주 부재 시 광마대를 이끄는 부관이다.
무사라는 족속들은 이상하게 제 상관이 누군가에게 패배하면 상관에게 품었던 충성심이 흐트러질 때가 있었다.
신교육대 정도라면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실력이나 재능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
황무석을 향한 대원들의 신뢰가 낮아지면 결과적으로 광마대의 힘이 약해질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도헌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
도헌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서 수습해야 할 문제일세.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는 누구에게라도 패배할 수 있어.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나나 대원들이 아니라 황 부관 본인일세.”
“그렇군.”
“무너지지 않도록, 잘 회복될 수 있도록 다독여 줘야지. 그게 지금 내 일이라네.”
“일을 크게 키웠군.”
“그런 말 하지 말게. 오히려 그 싸움으로 얻을 것을 고민하는 게 정상이야. 자네가 일부러 져 주었다면 그것도 큰 문제가 됐을 거라네.”
이천상의 마지막 일 타는 황무석의 머리 옆, 연무장 땅을 파고들었다.
머리통을 터트리거나 기절시키거나 둘 중 하나인데, 죽일 수는 없었고, 기절시킨다고 해도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해 뼈가 으스러지거나 어느 부위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얼굴은 예민한 부위다. 인체의 급소들이 한데 모인 곳이라 범부의 주먹질로도 사람이 죽는다.
결국 그 승부는 도헌이 개입하여 끝이 났다.
황무석은 패배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그의 패배였다. 이천상 역시 도헌이 개입한 시점부터 싸움이 이어지지 않을 걸 알았으니 입 밖으로 승패를 논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도헌은 황무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처럼 타오르는 두 눈. 간간이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있긴 했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했던 수하였다.
‘내 잘못이지.’
뭐가 어떻게 되었든 황무석을 바로잡지 못하면 광마대도 휘청일 것이다.
무공 따위에 열을 낼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음에도, 도헌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말했지. 고집 센 사람들이 있다고.”
“그렇소.”
“황 부관과 조장들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소.”
“흐음.”
도헌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네가 말한 고집이라는 것이, 기존 무공에 지극히 익숙하기에 변화 자체를 어색하게 여기는 무인 특유의 고집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게 아니오.”
“하면?”
“말 그대로 고집이오. 그들에게는 당신이 가르쳐 준 무공을 즉각 수용하고 바꿀 만한 재능과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였소.”
이천상이 도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정도 재능도 없이 광마대에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잖소.”
맞는 말이다.
더하여, 그 정도 재능도 없이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의 고집이 가장 큰 원인이다. 비유도 뭣도 아닌, 담백한 사실이었다.
도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집이라……. 새로운 형식의 무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단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치지 않았다면 그게 더 큰 문제 아니겠소?”
상관이 직접 부대의 훈련 방식을 바꾸었다.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명령 불복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그렇군. 일부러 그럴 놈들은 아니야.”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하면, 자네가 보기에 그 녀석들이 왜 무의식적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 같은가?”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오래 본 사이도 아니고, 그들 하나하나를 분석한 것도 아니오. 이유는 나도 알지 못하오.”
“……하긴, 그도 그렇겠지.”
“다만 유추 정도는 해 볼 수 있겠지.”
“말해 주게.”
“우리 사령부의 마인들은 대부분이 새로운 마공을 익혔소. 그리고 그 마공을 목숨 걸고 익히고 있소. 덕분에 조직 자체의 전력은 지금 이 시각에도 성장하고 있소.”
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마공 수준의 차이라고 덮어 두고 얘기하기에는, 광마대원들의 몰입이 보통이 아니었소. 조장들도, 나아가 황 부관도 수련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소.”
“그랬지.”
“무사들 대다수는 더 강한 무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마련이오. 그것이 단 한 수, 아니 반 수 위의 무공이라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보통인데 부관과 조장들은 변화에 어색해했소.”
“그래서?”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던 이천상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반 각이 지난 후였다.
“많은 사람을 보고 많은 경우를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으니 그냥 듣고 넘기시오.”
“그렇게 끌지 말고 말해 보게나. 듣고 오해할 일 없네.”
“자부심이 너무 넘쳐서 그런 게 아닌가 싶소.”
“자부심?”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광마대로서의 자부심 말이오. 광마대라면 응당 이러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그들의 무공 변화를 막고 있는 게 아닌가 하오.”
도헌이 탄성을 질렀다.
조장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무석은 그럴 수 있었다.
황무석은 광마대를 위해서 목숨도 거는 이였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도헌을 포함해서 누구도 그와 같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건 사고도 잦았지만, 어쨌거나 그 자부심은 그가 부관으로서 대원들을 다스리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큰 위력을 발휘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도헌을 보는 이천상의 눈이 구름 가득한 밤하늘처럼 어두워졌다.
“조장들도 그렇지만, 황 부관은 신념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였소. 정녕 그렇다면, 광마대의 존속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이오.”
도헌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새 무공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유가 자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근래 황무석을 보면 뭔가 큰 사고를 칠 것 같긴 했다.
이천상이 물을 홀짝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헌이 이내 굳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 시간에 본각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가? 지금쯤이면 야차사령도 훈련에 힘쓸 시간이 아니었나?”
“휴가를 얻었소.”
“휴가?”
참으로 이천상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도헌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자네가 직접 요청했나?”
“그렇소.”
“귀신이 다 놀라 자빠질 일이로군. 그래서, 얼마나 쉬는데?”
“석 달이오.”
“……!”
도헌은 깜짝 놀랐다.
“령주가 그것을 용인했는가?”
“그렇소.”
“허어.”
사흘도 아니고, 삼십 일도 아니고 무려 석 달이다.
그 정도면 휴가 복귀 후 조직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 기간이었다.
이천상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긴 휴가를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그걸 알고도 양백호가 허용했다면, 이천상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없소.”
“한데 석 달이나?”
이천상은 말없이 허리춤에서 백골마도를 꺼냈다.
하얀 천으로 꽁꽁 싸매 두었기에 정확히 어떤 외형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짝 완만하게 휘어진 모습이라 두꺼운 검이 아닌 베는 형식의 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무언가?”
“백골신마 장로가 내게 주었소.”
석 달 휴가 따위보다 천 배는 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도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골신마 어르신께서, 이 칼을 자네에게 주었다고?”
“그렇소.”
“……왜?”
이 칼이 어떤 칼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일반 철검이든 희대의 보도든, 혹은 기가 막힌 마병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신교 최고 어른 중 하나인 백골신마가, 내전도 아닌 외전 전투 부대 부관급 인사에게 직접 칼을 줬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이천상은 특수 임무 수행 당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간략히 풀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설명은 건조하고 딱딱했다. 그런 말투는 듣는 이의 몰입을 방해했지만, 그만큼 불필요한 묘사가 없어서 입력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군. 그런 일이 있었구만.”
도헌은 백골신마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좋든 싫든, 자신의 손주가 있는 부대의 대장 중 하나다.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백골신마의 발언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뇌물이 될 수 있다는 이천상의 말에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흥미를 느끼신 건가.’
도헌은 공무외가 백골신마에게 선을 댔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걸 넘어서 직접 보기도 했다. 인사차 함께 갔기 때문이다.
다만 백골신마라는 사람 자체가 원체 성정이 모호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했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 앞에서 뇌물이 될 수 있으니 받지 않겠다고 한 이천상의 발언은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다 서늘했다.
“즉,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백골신마 어르신이 자네에게 그 칼을 선물함으로써…….”
도헌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백골신마 어르신의 정적들이 자네를 노릴 수도 있다는 뜻이로군.”
“그렇소.”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천상은 그 칼을 받은 순간부터, 아니 백골신마의 거처에 들어간 순간부터 위험해졌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이번 선택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왜 그랬나? 내 비록 어르신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분을 견제하는 세력이 꽤 많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것은 비단 백골신마뿐만이 아니었다.
십대마왕 대부분이 서로를 견제했다. 그중 백골신마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 가까웠으나,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주시하는 눈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 사람이, 외전 전투 부대 소속 마인에게 칼을 주었다?
벌써 내전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정보를 접했을 것이다.
“보고 싶어서 그랬소.”
“무엇이?”
“기억하오? 내가 왜 신교에 남았는지, 당신에게 무공을 배운 이유가 무엇인지?”
도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바르지 않은 것을 올바르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지.”
“그렇소.”
“……자네 설마?!”
도헌이 눈을 부릅떴다.
이천상이 천으로 칭칭 감긴 백골마도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백골신마 장로와 대화하며 깨달았소. 야차사령의 각주로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
“원하는 것이 있다면 손을 뻗어 쟁취해야 하고, 이용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이용하여 더 높은 곳으로 향해야 하오. 나는 그 말에 완벽히 동의했소.”
“하면?! 석 달 휴가를 얻은 것이, 내전에서 찾아오는 정적들을 상대해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인가?”
“그런 의미도 있소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그게 전부가 아니……?!”
“나아가, 나는 당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오.”
“뭐?”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이천상이 도헌을 찾아온 게 아니라, 백골신마에게 모종의 선물을 받은 야차사령의 일각주가 광마대주를 찾아온 것이오.”
“……!!”
“당신을 이용해 보겠소.”
그때였다.
집무실 밖에서 어느 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대, 대주님! 내전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