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97
외전 147화. 일어나는 불씨 (5)
“흐음.”
사박.
멈췄다가 다시 수풀을 밟는 두툼한 발.
고급스러운 장화를 신었다. 펄럭거리는 장포 자락도 고풍스러운 흑단이었다. 체격은 탄탄했고 눈빛에는 은은한 마광(魔光)이 일었다.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당당한 포부, 거칠 것 없는 자신감이 일품이었다.
“듣기는 했어.”
그처럼 오만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애써 기척까지 줄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듣기는 했지만, 믿을 수는 없었지.”
툭. 툭.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들을 가볍게 걷어찬다. 데구루루 굴러간 돌멩이들이 이천상의 발치에 멈췄다.
“말이 안 되잖나. 일 년 만에 육대주급이라니. 세상에 그런 재능이 어디에 있겠나.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해. 숫제 괴물이라 해야 옳겠지.”
나른한 목소리는 마치 진흙처럼 끈적하고 퍽퍽하다.
듣기만 해도 몸에 힘이 빠지는 목소리였다. 섭혼술이 아닌데도 사람의 육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음성이었다.
“고금에 어떤 천재도 그런 게 가능하지 않아. 무공이란 방대한 학문이다. 그것은 정공도, 마공도 똑같아. 기본을 모르면, 타고난 재능 덕에 일류에는 도달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넘보기 힘들지.”
이천상의 눈이 사내의 요대를 훑었다.
두 자루 붉은 칼이 달려 있었다. 칼집도 없이 좌측 요대에 매달려 있는데, 장도(長刀)라기에는 짧고 소도(小刀)라기에는 조금 긴, 애매한 길이의 적도(赤刀)였다.
날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붉은 쌍도.
혈풍쌍도와 비슷하지만, 도면이 더 넓고 짧아서 탄탄해 보였다.
“그 불가능의 벽을 초월해 버렸다면, 이는 진정 인간이라 할 수 없어. 하지만 진정으로 그런 천재가 나타난 것보다, 무언가 속임수를 썼거나 예전부터 무공을 익혔다고 보는 것이 훨씬 그럴듯한 해석이겠지?”
척!
이천상과 삼 장 거리를 격한 곳에서 멈춘 사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어쨌거나, 확실히 대단하구만. 아직 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듯한데 육대주급 무력이라면 그 자체로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해.”
이천상은 말없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면 서른 언저리처럼 보였다.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기세는 이천상에 비해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실력보다 사내의 생김새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닮았군.’
우우웅.
이천상의 동공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어렸다.
‘그자와 놀랍도록 닮았다.’
유이상과 함께 목숨을 걸고 상대했던 혈풍쌍도의 주인. 전(前) 혈마대주였다는 그자와, 눈앞의 이 사내는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아 있었다.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왜? 어디에서 본 것 같나?”
“…….”
“그랬을 리가 없지. 나도 자네를 처음 보거든.”
가만히 사내의 얼굴을 보던 이천상이 이내 백골마도에 칭칭 감긴 천을 풀어냈다.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는 탁한 우윳빛 도신. 도신부터 손잡이까지 전부 같은 색이다.
“호오? 칼잡이였나? 듣기로 쌍수백타(雙手白打)에 능한 고수라고 들었는데.”
이천상이 말없이 손목을 빙빙 돌렸다. 그에 따라 백골마도 역시 몇 차례나 작은 원을 그렸다.
사내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기괴한 칼이군. 보통 외관이 특출나면 실제 성능은 좋지 못한 경우가 태반인데, 그 칼은 그런 것 같지 않아.”
“…….”
“하긴 당연한가? 그 백골신마가 하사한 칼이니. 하물며 도환도 쌍면해골이라? 누가 보면 백골신마의 후계자라도 된 줄 알겠어.”
“…….”
“한데 이상한걸? 분명 독특한 외양인데도 묘하게 존재감이 없단 말이지. 칼 특유의 예기도 없고, 그렇다고 마병(魔兵)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쉬이익!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했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휘어져 날아간 무형의 도풍(刀風)이 사내의 발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대단한 칼 놀림이다.’
손목만 비틀어 내친 일격인데도 공기를 가르는 도압(刀壓)이 대단했다.
단순히 내공이 높거나 연마한 마공이 뛰어나다고 이런 한 수를 보여 주진 못한다. 칼 자체에 대한 이해력이 몹시 뛰어나야 한다.
‘백타에 능한 권법가라고 들었는데?’
순간 사내의 눈이 이천상의 손목을 향했다.
살짝씩 돌아가는 손목. 원을 그리는 칼.
사내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발경!’
그렇다.
이천상의 손목 움직임은 짧은 회전으로 공력 경파를 극대화시키는 권법 요결과 지극히 비슷했다.
즉, 권법의 발경술을 칼날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다. 도검에 익숙한 것도 맞지만, 그 도검술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결을 도법이 아닌 권법에서 찾았다는 게 대단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도병을 쥔 이천상의 손가락은 끊임없이, 그리고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시각각 최적의 파지법을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섬세함이 실로 대단했다. 평생을 도법 연마에 힘써 온 사내의 눈에는, 이천상의 변화하는 쥠새가 순식간에 수년을 따라잡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꾸욱.
마침내 이천상의 손이 도병을 단단하게 쥐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장난처럼 보이지만, 아는 사람 눈에는 그야말로 두려운 광경이었다. 칼에 대한 이해도는 뛰어나지만, 정작 도법의 요결을 따르진 않는다. 딱 봐도 칼을 오래 쥐어 본 적은 없는데, 그 잠깐 새에 명인의 파지법이 나오는 것이다.
“…….”
사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짜일지도 모르겠군.”
칼의 달인은 쥐는 것부터가 남다르다.
처음 칼을 쥐었을 때와 지금의 이천상은 가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일지도 모르겠어. 일 년 만에 그와 같은 경지를 구축했다는 소문 말이야.”
“이름.”
처음으로 이천상의 입이 열렸다.
사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자신을 향한 눈빛이 실로 묘했다. 감정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긴장하거나 흥분한 기색도 없다.
얕잡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의도된 눈빛인가?
“이름이라……. 하긴, 알려 주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알 수밖에 없을 것이고.”
스륵.
어느새 사내의 양손에 두 자루 적도가 잡혔다.
“죽는다면 알아도 의미가 없을 테니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
“내 이름은 홍산이다.”
홍씨.
‘형제인가.’
전 혈마대주 역시 홍씨라 하였다. 같은 성씨에 얼굴이 빼다 박은 듯 닮았으니 혈육이 분명하리라.
“칠십이마장 중 삼십일위(三十一位)다.”
삼십일위.
정확히 어떤 서열 방식을 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만한 무력에 서른한 번째 서열이라면 칠십이마장에 속한 고수들의 무력이 대강 짐작이 갔다.
‘대단하군.’
홍산의 무공은 낮게 잡아도 육대주급이다. 저만한 강자가 고작 삼십일위라면, 적어도 그 위는 육대주급 이상의 강자들이 우글거린다는 뜻이리라.
‘칠십이마장이라……. 과연, 그런 건가.’
이천상이 땅을 내려다보았다.
홍산의 눈으로 볼 때, 이천상은 우측으로 몸을 틀고 있었으며 시선은 땅에 꽂혔다. 오른손에 쥔 칼이 허벅지와 무복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홍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선을 돌리다니? 자신감이 넘치는군.”
“…….”
“그나저나,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도…….”
그때, 이천상의 왼손이 움직였다.
퍼어엉!
폭음과 함께 홍산의 후방에 있던 나무의 단면이 움푹 들어갔다.
빠르고 강력한 장력이었다. 기수식도 없이 펼쳐진 야차혈장의 위력이었다.
파아악!
서로의 기세를 읽은 순간, 더는 대화가 필요치 않은 법.
고개를 돌려 야차혈장을 피한 홍산은 그 즉시 이천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판단력이 수준급이었다. 뼈에 새겨진 무공 실력은 움직임과 동시에 최선의 투로를 따라 쌍적도를 휘두르게 했다.
두 자루 적도와 한 자루 백도(白刀)가 눈부시게 얽혀 들어갔다.
쩌저저정!
이천상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홍산의 칼질은 빨랐다.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고작 몇 합만 부딪쳐 봤는데도 상대의 도법이 어떤 무도(武道)를 추구하는지 알 수 있었다.
‘뒤가 없군.’
번쩍!
회전하며 휘두른 좌수 적도가 이천상의 목을 노렸다.
하반신을 내려 칼을 피했지만, 그 즉시 우수 적도가 이천상의 명치 한가운데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쩌어엉!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골도를 올려 쳐 튕겨 냈다.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무게감은 없었다.
이천상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심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다음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쩌저저정!
회전이 빨라지고 도격도 더 날카로워졌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 두 자루 적도를 미친 듯이 휘두르는데 그 속도가 발군이었다. 지금의 이천상으로도 육안만으로는 제대로 잡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눈부신 쾌도(快刀)다. 빨라도 무게가 실려 있지 않으면 일류 무공이라 불리기 힘들다지만, 그 속도가 이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물며 휘두르는 족족 경동맥, 심장, 대퇴부 안쪽, 쇄골을 노리는데 하나같이 엄청난 출혈을 발생시키는 부위였다.
오로지 급소만을 노리는 치명적인 도법이었다. 무게감이 실려 있지 않기에 오히려 연환격에 능하며, 정신없이 받아 내다가 어느새 조금이라도 베이면 급격하게 대응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쩌저저저저정! 슉!
그 빠른 연환격을 백골도로 모조리 막아 냈지만, 기어이 상박에 일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무게감 없는 칼질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깊게 베였다. 중간에 몸을 틀지 않았다면 뼈까지 끊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황하여 물러났을 것이 분명한 상황.
이천상은 도리어 전진을 택했다.
파바바박!
홍산의 두 적도가 이천상의 몸 여기저기를 베고 지나갔다.
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볼 수도 없는 도상이었다. 어깨, 상박, 허벅지를 고루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치명상은 없었다.
홍산의 눈이 흔들렸다.
이천상의 반응 속도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는 공격들이었다. 한데도 한 발 앞으로 나올 뿐 막질 않았다.
정확히는 막지 않은 게 아니라,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 높이 치켜든 백골도.
양수로 도병을 쥔 이천상은, 너무나도 단순하기에 빠르고 강할 수밖에 없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수를 펼쳤다.
쾅!
홍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교차한 두 자루 적도 한가운데를 찍은 백골도에 흉악한 금빛 마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이놈, 벌써?!’
연환도법은 신체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동반한다. 그걸 한순간에 끊어 내고 물러나려면 엄청난 탄력과 내공력이 필요하다.
이천상은 한눈에 그것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한 후, 힘으로 홍산을 찍어 눌렀다.
말하자면 무공의 파훼였다. 정신없는 연환쾌도를 깔끔하고 압도적인 중도(重刀) 일격으로 끊어 버린 것이다.
우우우우웅!
홍산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빠져나오려 했지만, 강력한 인력 때문에 교차한 칼을 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탁한 우윳빛 칼날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강력한 금빛 마력은 그 수준이 너무나도 빼어났다. 신교 최고급 마공이라 칭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압도적인 마력이 홍산의 마기를 점점 더 흔들어 대고 있었다.
이천상의 눈이 금안(金眼)으로 변했다.
쩌엉!
백골도가 두 자루 적도를 깨부수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