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798
외전 148화. 일어나는 불씨 (6)
“…….”
칼이 부서짐과 동시에 뒤로 물러난 홍산의 얼굴은 확연히 굳어 있었다.
투두둑.
칼 파편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피슉!
홍산의 이마에서 피가 터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붉어졌다. 홍산은 눈을 감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시선을 돌리면 죽는다. 그 약간의 빈틈을 놓칠 상대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가슴이 뜨끔했다.
좌측 흉근도 베였다. 정확히는, 이마의 상처는 도압을 이기지 못한 피부가 터져 버린 것이고 머리부터 뒤로 빼 도주하는 사이 벼락처럼 내려온 도기가 그의 가슴에 상처를 낸 것이다.
‘죽을 뻔했군.’
조금만,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중도(重刀)의 압력에 두개골까지 부서졌을 것이다. 나아가 좌측 쇄골부터 갈비뼈, 나아가 대퇴부 근육까지 일직선으로 끊어졌을 것이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일격이었다. 오로지 죽이고자 내친 일격이 아니라, 상대의 생사에 관심이 없는 일격이라서 더 무섭다.
죽든 살든 파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상대의 칼에서 느껴지는 무심함은 독한 살기보다도 훨씬 더 원초적인 공포를 이끌어 냈다.
툭.
부러진 두 자루 칼을 내려놓은 홍산이 요대 끝부분을 잡았다.
치리리링!
이천상의 눈이 빛났다.
요대치고는 다소 두툼하다 싶었더니, 요대 안쪽에 연검(軟劍)을 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거였군.’
그는 처음 홍산을 봤을 때부터 발소리에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날이 서지 않은 두 자루 칼을 찼는데도 선명한 예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도법에 능한 자 특유의 기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객의 기세와는 달랐다. 그래서 주시했고, 상대에게 또 다른 무기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암기나 비수 같은 종류인 줄 알았건만, 연검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괜찮아.’
단순한 눈치가 아니라 감각만으로 상대가 또 다른 병기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천상은 제 감각이 불과 며칠 전보다 더 예민해졌음을 느꼈다.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특히 요즘 ‘느낌’이라는 표현이 저도 모르게 많이 떠오르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묘한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재미를 느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런 식이었다. 이천상에게 지금은 과거와 너무 달랐다. 마치 세 살배기 아이가 세상 모든 것을 신기해하듯, 지금의 세상은 이천상에게 하루하루 굉장한 고자극이었다.
“강하군.”
치링!
하늘거리던 연검이 일순 빳빳하게 섰다. 내공이 주입되자 어느새 삼 척 장검이 되었다.
“기질적으로 느껴지는 강함과는 또 달라. 본인 실력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진다. 총체적인 기량이 높다는 뜻이겠지.”
홍산이 씨익 웃었다.
“흥미롭구나.”
파아아악!
이번에는 홍산이 선공을 날렸다.
땅을 박차는 보법 자체가 이전과 달랐다. 단호하고 경쾌한 도법을 구사하던 자가 마치 소검을 쓰는 검객처럼 날렵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파라라락!
빳빳했던 연검이 다시 풀어지며 일순 폭발적인 변초를 만들어 냈다.
눈앞에서 수백 송이의 꽃이 동시에 개화한 것 같았다. 어딜 어떻게 노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쾌검의 달인이 환검(幻劍)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날 필요가 없었다.
번쩍!
좌하단에서 우상단 사선으로 그어지는 참격에 화려했던 연검 검신의 삼 할이 잘려 나갔다.
퍽!
검을 빼기도 전에 짧게 후려친 각법이 홍산의 손을 타격했다.
홍산의 눈이 흔들렸다.
팔방으로 내치는 검막 속으로 각법을 내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한쪽 다리가 난도질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실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빈틈을 노려 쏘아 낸 각법에 손등이 부러지고, 쥐고 있던 연검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천상의 자세가 낮아졌다.
쿵!
홍산이 비틀거리며 밀려 나갔다. 품으로 다가온 이천상의 주먹에 가슴이 가격당한 것이다.
내부가 온통 진탕되는 것 같았다. 흉골에 금이라도 간 것일까. 속이 울렁거리고 호흡이 답답해졌다.
이를 악문 홍산이 자세를 잡고 다시 돌진하려 할 때.
이미 백골도는 그의 어깨에 올려져 있었다.
“…….”
창백해진 얼굴로, 충혈된 눈으로 이천상을 노려보는 홍산.
완벽한 패배였지만, 이천상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 따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홍산을 상대로 여기지도 않는 듯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나.”
이천상은 그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홍산이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극심한 고통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기어이 그런 표정을 만들어 낸다.
“미안하지만 자존심이 세서 아직 누구 밑에 기어들어 가 본 적이 없다.”
헛소리다. 누구 밑으로 들어가지 않고선 배울 무공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홍산은 배후에 누가 있는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도록.”
홍산이 눈을 감았다.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였다.
쉭!
한 줄기 이질적인 소리가 이천상과 홍산의 귓가를 울렸다.
파아아악!
홍산이 우측으로 고개를 뺌과 동시에 이천상의 백골도가 움직였다.
따앙!
엄지손가락만 한 쇳덩이가 백골도에 맞아 튕겨 나갔다.
홍산의 목을 날려 버리면서 동시에 튕겨 내려 했지만, 그 순간을 읽은 홍산이 자세를 빼서 죽이는 데 실패했다.
이천상이 방심한 게 아니라 홍산의 반응이 뛰어났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이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듯했다.
주르륵.
홍산이 인상을 찡그렸다. 목이 날아가는 건 피했지만, 목덜미에 새겨진 자상이 제법 깊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너!”
큼직한 나무 위, 수풀로 가려진 곳에 한 명의 괴인이 있었다.
체구는 작았다. 나뭇가지에 쪼그려 앉아서 더더욱 작아 보였다.
몸에 딱 달라붙는 흑의를 입었는데 요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장 독특한 것은 바로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가면이다. 맨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가면을 썼는데, 다소 우스꽝스러운 원숭이 형상이었다.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눈과 입매. 가면 위로 붉은 털이 붙어 있는데 실제 원숭이 털과 똑같은 질감이었다.
홍산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이 개 같은 원숭이 새끼가 어딜 나서!”
“웃기는군.”
날 선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는 묘하게 우울하게 들렸다.
“목숨을 살려 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부터 박아야지.”
“미친 새끼! 누가 너더러 살려 달라 했느냐!”
“널 살려 준 게 아니다.”
원숭이 가면 사내가 턱으로 이천상을 가리켰다.
“방심할 때를 노린 거지.”
홍산이 차갑게 웃었다.
“방심 따위 안 하던데? 하긴, 네 눈깔이 그렇지. 안 그러냐, 반쪽짜리?”
“언사를 신중하게 하는 게 좋아. 지금 너는 내 십초지적도 안 된다.”
“자신감이 너무 과한 거 아니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 지금 이 정도가 되니까 너와 싸움이라도 되는 거다. 평소에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새끼가 어딜!”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였다.
이천상은 원숭이 가면 속의 눈빛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은은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물러나라.”
“네가 뭔 상관이야?”
“호면귀(虎面鬼)께 명령받았다. 널 데리고 오라고.”
“……!”
홍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입은 쉬지 않았다.
“날 살려 주려는 게 아니었다면서 결국 그게 목적이었군.”
“살려 주고 싶은 면상이 아니다, 너는.”
“빌어먹을.”
홍산이 이천상을 돌아보았다.
이천상은 계속 원숭이 가면을 보고 있었다. 홍산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홍산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가늠하는 것이다.
그때, 원숭이 가면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이겨 봤자 네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은 아닐 텐데.”
“……어떻게든 이기면 뛰어난 거지.”
“마음대로 해라. 난 할 만큼 했다.”
원숭이 가면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퍽!
느닷없이 휘두른 이천상의 주먹에 홍산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 쓰러졌다.
놀란 원숭이 가면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미 그 자리에 이천상은 없었다.
오싹!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원숭이 가면이 요대에서 녹색 주머니를 꺼내 터트렸다.
펑!
순간 녹색 운무가 사방으로 퍼졌다. 누가 봐도 위험천만해 보이는 운무였다.
상대의 반응 속도가 너무 빨라서 도주가 의미가 없을 때 선보이는 한 수였다. 상대의 심리를 자극하고, 그사이에 도주 시간을 버는 것이다.
원숭이 가면이 나뭇가지를 박차려 할 때.
스르륵.
나뭇가지가 잘려 나갔다.
내공으로 무게를 분산하여 버텼다고는 하나,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박차고 나아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절묘한 순간에 박찰 곳이 사라졌으니, 원숭이 가면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파라락!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반응이 무척 좋았다. 원숭이 가면이 품에서 꺼낸 작고 날카로운 쇳덩이들을 사방으로 날렸다.
따다당!
반응은 좋았지만, 선택은 좋지 못했다.
쏟아진 암기들을 모두 쳐 낸 이천상이 원숭이 가면을 향해 백골도를 휘둘렀다.
촤아악!
가슴에 사선으로 절상이 생겼다.
꽤 깊게 들어간 일격이었다. 원숭이 가면은 신음도 흘리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요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정말이지 제대로 훈련받은 암살자를 방불케 했다.
훅!
원숭이 가면이 요대에서 검은 주머니를 꺼내는 동시에, 북천마혜보로 접근한 이천상이 금강마권으로 그의 손을 후려쳤다.
콰득! 펑!
손등이 부러지며 주머니 안에 있던 독무가 터졌다.
‘바보로구만.’
원숭이 가면은 이천상의 죽음을 확신했다.
이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신중함이 부족하다. 자신의 기량을 너무 믿는 듯했다.
이런 자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대부분 불혹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결국 너도 다른 놈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거지.’
그때였다.
화아아악!
시커먼 독무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부드러우면서도 압력이 강한 장력이었다. 한 톨의 독분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제거해 버리는 장법 공부가 놀라웠다.
그리고 드러나는 이천상의 얼굴.
‘……!!’
원숭이 가면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상대의 표정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심했고 또 무심했다.
‘이럴 수가.’
퍼억!
칼자루로 복부를 맞았다.
눈앞이 노래졌다. 그 한 방에 오장육부가 다 터진 것 같은 고통이 일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원숭이 가면은 생각했다.
‘어떻게 흑갈독을 흡입했는데도 멀쩡할 수 있지?!’
빠각!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무릎으로 턱을 강타당하자 오감이 죄다 흐트러졌다. 정신이 날아가진 않았지만, 사지에 힘이 빠지고 어지러움에 사고도 끊겼다.
퍼어억!
마지막 발길질에 날아간 원숭이 가면이 홍산 옆에 쓰러졌다.
“쿨럭!”
피를 토한 홍산이 부들거리며 일어났다. 원숭이 가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공에다가 손을 휘적거렸다.
보란 듯이 어깨에 백골도를 걸치며, 이천상이 말했다.
“마음대로 온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마음대로 가게 할 수는 없지.”
홍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정해야 했다. 이천상의 기량을.
재능을 떠나서, 이놈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을 지닌 마인이었다. 설마하니 홍모후(紅毛猴)의 맹독도 안 통하는 놈일 줄이야!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
“너희는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