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00
외전 150화. 일어나는 불씨 (8)
자리를 뜬 홍산은 홍모후의 신음에 걸음을 멈추었다.
“괜찮냐.”
“……쿨럭! 너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정말 지독한 수법이더군. 설마 네놈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어.”
“내려 줘.”
“미친 새끼. 빨리 안 가면 너 평생 장애 안고 살 수 있다.”
“숨 막혀. 좀 쉬다가 가야겠어.”
“상전이 따로 없군.”
언제나 서로의 뒤를 노렸던 둘이지만, 막상 홍모후가 이 지경이 되니 홍산의 마음도 썩 좋진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 꼴이 된 게 아니어서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둘의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수의 등장에 그간의 분노도 갈 길을 잃은 것에 가깝다고 할까.
홍산이 홍모후를 나무 밑에 내려놓았다.
“크윽!”
어지간한 고통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홍모후가 신음까지 흘린다. 끔찍할 정도로 아픈 모양이었다.
“빨리 쉬어. 혈혼각에 던져 놓고 나도 쉬어야겠다.”
“너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군.”
홍산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나한테 오라더냐? 호면귀가 시켰다 한들 싫으면 싫다고 했을 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이천상에게 당해 죽어 가는 모습을 볼 기회였단 뜻이다.
홍산이 인상을 찡그렸다.
“병신, 그럼 지켜나 보고 있을 것이지 왜 끼어들었어?”
“내 손으로 죽이는 게 아니잖아.”
어쩜 이렇게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쩌면 자신과 홍모후는 너무나도 닮았기에 서로를 싫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홍산이 짜증스레 침을 뱉었다.
“숨이나 빨리 골라. 최대한 허리 펴. 너 갈비뼈도 부러졌다. 잘못하다가 폐를 찌르기라도 하면…….”
“호법원이다.”
“뭐?”
“그놈의 점혈법, 분명 호법원의 무공이야.”
“뭔 소리야? 저놈이 호법원 출신이라고?”
“그건 몰라. 다만 전대 호법원주님의 착점살수(着點殺手)와 똑같았다.”
“호법원 출신이라고 ‘님’ 자를 잘도 붙이는군.”
“그분은 실종되었을 뿐이다. 반역자도 아닌데 무슨…….”
“헛소리 그만하고 쉬어.”
“잘 들어.”
호흡이 그렇게 거친데도 표정은 진지했다.
홍모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천상 그놈한테 붙어라.”
“뭐?”
“넌 끝났어. 차라리 이천상한테 붙어.”
“이게 맛탱이가 가 버렸나? 뭘 붙어, 붙기를.”
“어차피 너도 살긴 힘들어. 그러니까 이천상한테 붙어라.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올라갈 테니까.”
“뭔 개소리냐고 묻잖아!”
버럭 외치는 홍산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다른 걸 떠나서 이 죽일 놈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앓는 소리 좀 한다고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도 화가 났다.
반면 홍모후는 진지했다.
“너, 이천상에게 먼저 가 버린 것만으로도 조직을 이탈한 거나 다름이 없다.”
“뭐?”
“호면귀께서는 널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셨다.”
“그건 나도 알아!”
“살려서 데리고 오라고는 안 했지.”
“……?!”
“널 죽이라고 했어. 괜한 흔적 남기지 말고 시체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홍산의 눈이 흔들렸다.
홍모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고약한 고통에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래서 날 보내신 거지. 너와는 앙숙이니까. 어떻게든 임무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존대가 나오는군.”
“어쨌든 대장이니까.”
“미친 새끼야! 그런 살인귀 새끼가 무슨……!”
“잘못은 네가 먼저 했다. 우리는 원천적으로 대외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어. 지시가 아니면 돌발 행동을 해서는 안 돼.”
홍산이 이를 악물었다.
홍모후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실 잘못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십이지신이라는 조직 자체에 지쳐 있었다.
애초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조직도 아니었다. 남들과 달리 상부의 강권에 의해 들어왔기 때문에 언제나 겉돌았다.
지치고 또 지쳐서, 나중에는 관성적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 ‘기능’하는지도 모른 채, 명령대로 살다가 산화해 버리기에는 한 번뿐인 인생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상부에서 나쁘게 볼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마음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이 한 번의 행동으로 제거 명령이 떨어질 줄이야.
“명확히 이해해야 해. 잘못은 네가 했어. 원해서 들어왔든 아니든, 조직에 들어왔으면 규칙을 따라야 한다.”
“원해서 들어온 게 아닌데 왜 규칙을 따라야 하냐?”
“죽고 싶었다면 차라리 정식으로 탈퇴 명령을 달라고 해야 했다.”
“미친놈아. 그걸 놈들이 허락해 주겠냐?”
“해 본 적 없잖아.”
“뭐?”
“정면 돌파는 시도도 해 보지 않고 겉돌았을 뿐인 너에게 변명거리는 없어.”
“……빌어먹을.”
“몸부림칠 방법은 너무나도 많았다. 죽음을 각오했다면 말이야.”
“…….”
“너도 알고 있었잖아? 돌발 행동 한 번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거. 너는 그 사실을 지쳤다는 변명 아래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비수처럼 파고드는 말이었다.
홍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욕이라도 퍼부었을 텐데, 중상을 입은 홍모후의 모습이 분노보다 자괴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알았으면 이제 꺼져.”
“…….”
“우리 위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천상이 줄을 댄 쪽과는 반대되는 게 분명해. 어디 숨을 곳도 없는 본교에서 네가 살 길은 진영을 바꾸는 것뿐이다.”
“왜 그런 말을 해 주는 거냐?”
“내가 졌잖아.”
“뭐?”
홍모후가 피식 웃었다.
“먼저 뒈지는 쪽이 지는 거야. 싸웠든, 싸우지 않았든.”
홍산이 이를 악물었다.
“너도 같이 가자.”
“시끄러워. 지금이야 골골대니 이러는 거지, 다 나으면 또 너 죽이려고 발악할 거다. 너도 그럴걸, 아마?”
“닥치고 너도 가자고. 일단 혈혼각으로 가면…….”
“치료받다가 호면귀께서 보낸 암살자 손에 뒈지겠지.”
“아무리 그 새끼가 미친놈이라도 충성을 그렇게 바쳤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어떤 임무라도 실패하면 끝이야. 넌 정말 꽃밭에서 살았군. 우리가 사는 곳은 비바람 몰아치는 절벽 위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놈과 함께한다고 자유를 얻을 거란 보장은 없어.”
“또 해 보지도 않고 변명이나 늘어놓을 생각이냐?”
“…….”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사람은 절대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없어. 정말 죽음마저도 네 손으로 선택할 자유를 얻고 싶다면, 일단 살아서 본교를 탈출해. 그게 최선이니까.”
“…….”
“빨리 가라고, 미친놈아!”
“너, 정말로 호면귀 손에 죽고 싶은 거냐?”
“죽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니까!”
“난 내 인생을 선택했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내 주관대로 살 거야. 내 주관에 따라 나는 죽겠다.”
“죽고 싶지 않다면서 뭔 주관이……!”
“너와 함께 이천상에게 가면, 십이지신 조직에서 네가 맛보던 무력감을 나도 똑같이 맛보게 되겠지.”
“……!”
“가라.”
충혈된 눈으로 홍모후를 보던 홍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거기 가서도 심심하다고 칼춤 출 생각 하지 마라. 하긴, 받아 줄지나 의문이다.”
“그래도 해 봐야 한다는 건가.”
“몸부림치는 게 원래 인생이랬다. 나는 충분히 꿈틀댔어.”
“…….”
“사내놈들끼리 작별 인사가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냐?”
홍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저 멀리 한참 떨어진 수풀이 흔들렸다.
바람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바람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는 것이다.
홍산이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잘 가라.”
“너나 잘 가라.”
그 말을 끝으로 홍산이 몸을 날렸다.
멀어지는 홍산의 등을 보며, 홍모후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애석한 인생이라니까. 아리따운 미녀도 아니고, 저런 개망나니가 인생 마지막에 보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지났을까.
“홍모후.”
나타난 사람은 셋이었다.
중앙에는 사면귀가, 그의 좌우로는 황각우(黃角牛)와 흑안마(黑眼馬)가 있었다.
홍모후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호면귀께서는 오시지 않았군요.”
사면귀의 눈이 깊어졌다.
직접 처리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비웃어 주겠지만, 홍모후는 달랐다.
홍모후는 십이지신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조직원이었다. 적어도 그 충성을 안다면, 죽이더라도 직접 와서 죽이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사면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냉정했다.
“실패한 조직원을 처리하는데 어떤 수장이 직접 온다더냐.”
“맞는 말입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조금 더 살 수 있겠군. 뭡니까?”
“네 충성심, 네 인내심은 십이지신 중 최고였다. 한데 어찌하여 호면귀께서 계신 장소를 불었느냐?”
“지금 내 꼬락서니가 어떤지 직접 보고 계시잖습니까.”
“고작 뼈가 부러지는 고문 따위에 불었다고?”
“직접 당해 보면 알 겁니다. 뼈, 근육, 신경 등등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요소 하나하나에 전부 벼락이 꽂히는 기분입디다.”
“차라리 죽었어야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죽잖습니까? 어차피 실패하면 죽이러 올 거 빤히 알았습니다.”
“…….”
“몇 번 더 호흡했으니 미련은 없습니다. 죽이십시오.”
“도대체…….”
사면귀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타인의 이해 따위 바라고 산 적 없습니다. 충성이야 바쳤지만, 나도 우리 조직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도 사는 게 인생 아닙니까.”
“유언은 없느냐?”
“……유언은 없지만, 답 안 나오는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사면귀가 말없이 홍모후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허가였다. 홍모후가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
“지금 우리의 이런 삶이, 차후 본교의 비상을 위한 초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잘 가라.”
“역시.”
스르릉.
사면귀가 검을 뽑아 들었다.
홍모후가 쓰게 웃었다.
냉정하게 몇 걸음 걸어가던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의 삶이 본교의 비상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겠냐고?’
그 말은 곧 지금의 신교는 땅 위를 기어다닌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야말로 불충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신교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는 제 죽음이 이 조직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면귀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부럽구나. 너는 네 뜻대로 충성하고, 네 뜻대로 살다가 너의 의지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나 또한 너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