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01
외전 151화. 피에 젖다 (1)
새벽이 밝았다.
인적 없는 야산에서 가부좌를 틀고 연공하던 이천상은 문득 저 멀리 우뚝 선 주루를 보았다.
‘선명하군.’
안력(眼力)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금강야차마공만 연성했을 때보다 무공 자체는 크게 발전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신체의 기능은 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화마공과 포천금마공, 적봉마공을 차례대로 운용하며 마기의 흐름이 훨씬 더 원활해졌고 혈도가 더 넓어졌다.
깨달음으로 인한 경지의 상승은 아니지만, 기(氣)와 신(身)의 기능이 높아져서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수법이나 초식들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발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꼭 깨달음을 얻어야만 무공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이천상은 이제 무림인들이 구분하는 경지나 무공의 상식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해졌다.
‘남들에게 이러한 마공 운용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마공마다 호흡법, 진기 운용법, 진기 발출법이 전부 다르다.
해서 비슷한 종류의 마공을 복수로 구사하기 위해선 축기한 마기의 성질이 비슷해야 하고, 운용법 역시 흡사해야 한다. 그러고도 두 개 이상의 마공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마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극마지경에 이르러, 온몸의 혈도가 개방되고 세맥까지 타통, 제어가 가능한 지경에 이르면 이론상으로 한계 없이 마공을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지에 든 마인은 굳이 여러 마공을 구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다.
만류귀종이라는 표현은 진부하지만, 정공이 아닌 마공에도 해당되는 깨달음이다. 극마에 이른 이들은 자신이 평생 연마한 마공을 가일층 뛰어난 절학으로 만들거나 응용하는 것에 정신을 쏟지, 굳이 잡다한 마공들을 익히지 않는다.
즉, 이천상은 마기가 선천의 영역을 향해 가는 극마의 고수들처럼 다방면의 마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딱히 논리적으로 가능, 불가능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세 가지 마공을 창조해 내며 그것들을 어떻게 운용할까, 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치 아기가 숨 쉬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마공이란 구결과 법문만 알아도 구현 가능한 공기 같은 것이었다.
‘왜지?’
한 번도 이걸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천상은 제 마기를 더듬어 보았다.
‘금강야차마기.’
기본은 금강야차마공의 축기법을 따른 마기다.
‘하지만.’
이천상이 손을 들었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솟구친 마기가 첫 혈도를 지나는 순간 어두운 금빛이 스러지며 투명하게 변하더니,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었다.
혈화마공의 마기였다. 그 순간부터 단전에 도사린 마기 역시 혈화마기로 돌변했다.
혈화마공의 운기법으로 마기를 쌓아 본 적이 있다. 마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효용이 어떤지 직접 실험해 봐야 한다. 그의 진기 운용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위였다.
당연히 포천금마공, 적봉진명마공의 운기법으로 축기를 시도해 봤다. 그 모든 행위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세 마공으로 쌓은 마기가 금강야차마공의 마기와 충돌을 했던가?
그렇지 않다.
세 마공으로 쌓은 마기 역시 순수한 이천상의 내공이었다. 각각 다른 내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공으로 모였다는 소리다.
즉, 이천상이 보유한 진기의 근본은 금강야차마기가 아니다. 이천상이라는 사람이 연마한 순수한 내공 그 자체, 속성으로 따지자면 무속성(無屬性)의 내공이다. 분명한 특징이 없는, 가변성을 지닌 투명한 진기를 보유한 것이다.
‘남들은 다르다.’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던 문제.
아니, 이천상 자신도 한계를 지어 생각했던 문제였다. 혈화마공을 제대로 판 적이 없으니 혈화마공을 운용해 봤자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반은 맞다.
혈화마공의 일부를 떼어 와서 운용해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연마한 적은 없기에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기에 제 위력을 살리기 어렵다.
바꿔 말하자면, 익숙해지기만 하면 금강야차마공의 무학들이 내는 위력과 똑같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얄궂다는 게 이런 건가.’
평범하지 않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다. 감정도, 사상도, 행동도 보편적이지 않았다.
한데 이제는 내가 공부까지도 남들과 달랐다.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이천상을 가라앉게 했다.
하지만.
‘괜찮아.’
휴가를 얻고 거처로 들어가, 거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다름이란 틀림이 아니라는 것을.
다름은 곧 다른 형태의 축복이다.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줄 이유는 없지만, 다른 나를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불행한 것도 나다.
이천상의 독특한 내공은 그 자체로 신비다. 누군가는 이러한 상황을 보며 훗날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할 수 있으나, 어차피 내가 공부 자체가 위험 요소를 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맞이한 상황을 인정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결과적으로 지금의 내게는 이득이다.’
여러 가지 마공을 익힐 수 있다면, 활용해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크나큰 공부요, 깨달음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많이 접해 봐야겠군.’
우웅.
핏빛 마기가 조금씩 깨끗한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손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마기는 보기만 해도 영롱했다. 우웅, 우웅 하며 기묘한 진동을 일으키는 이 힘은 바로 적봉진명마공이었다.
한참 동안 손을 응시하던 이천상이 다시 저 멀리 우뚝 선 주루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천상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새벽 일찍 문을 연 자미루는 그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한산했다.
이천상은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주루지만, 내전에 속한 주루들 모두가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했다.
일 층 창가에 앉은 그는 곧장 채소와 고기죽을 시켰다.
점소이는 깍듯했다. 내전 마인 중에는 높으신 분들도 많았고, 기본적으로 외전 무사들보다 강했다.
이천상은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딱히 구경하려고 보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의 그는 이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주변을 바라보거나 홀로 생각에 젖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앞에 고기죽과 채소볶음이 올려졌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수저를 들며 말했다.
“명령 불이행은 중죄라는 거 알 텐데?”
“끙차.”
천연덕스럽게 이천상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놀랍게도 허필이었다.
“언제고 이곳으로 올 줄 알았습니다. 광마대주와 형법당주가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죽을 한 수저 떠먹으며, 이천상이 말했다.
“애들은?”
“잘 지냅니다. 훈련도 열심히 하고. 당분간 임무도 없을 거라더군요.”
“자네에게 대리 각주직을 맡겼다. 한데 왜 여기로 왔나?”
“저도 각주님이 걱정되어서 온 게 아닙니다. 명령을 받았지요.”
“명령?”
허필이 입맛을 쩍 다셨다.
“령주님께서 따라가라고 하더군요.”
이천상의 수저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뜨끈한 죽을 휘휘 젓는 수저 놀림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령주님께서?”
“예. 그래서 부득불 주연교 조장에게 임무 이전하고 왔습니다.”
허필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여기서 또 무슨 사고를 치시는 겁니까? 오죽하면 령주님이 따라가라고 하셨겠어요.”
이천상은 말없이 고기죽을 먹었다.
양백호가 자신을 특별히 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떠한 정치적인 이유가 없는, 순수한 인간적인 호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위한다 해도 이천상이 말해 주지 않은 이상 무슨 상황에 놓일지는 몰랐을 것이다.
‘알아보셨던가.’
딱딱한 데다 지나치게 주관이 확실한 사람이라 친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전에는 양백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중에는 광마대주 도헌도 끼어 있었다.
‘당신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양백호가 따로 알아본 건지, 도헌이 말해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제 행동이 주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도헌, 양백호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나저나 그 칼은 뭡니까?”
허필의 눈이 이천상의 옆 의자를 향했다. 그곳에는 흰 천으로 둘둘 묶인 백골도가 놓여 있었다.
“불이다.”
“불이요?”
“나방들을 유혹하는 불.”
허필의 눈이 깊어졌다.
“뭔지는 몰라도, 령주님이 저를 보낸 이유가 있군요.”
“잘 몰라서 자네만 보낸 거지. 누굴 보내도 별 의미는 없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봉인을 푼다면 그렇겠지.”
“…….”
가만히 이천상을 보던 허필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누가 온답니까?”
“모르지.”
“……모르는 놈들과 상대하고 계시는 겁니까?”
“백골신마에게 뭔가를 알아보고 싶은 놈들, 혹은 그의 정적들이 나를 찾아오겠지.”
“……?!”
“이 칼, 백골신마에게 받은 칼이다.”
허필은 그 한마디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각주님 미쳤어요?”
“…….”
“전투 부대도 아니고 삼원급도 아니고 원로원 쪽 싸움에 들어가 버렸다고요?”
“새벽까지 기다리느라 배고프겠군. 너도 시켜라.”
“지금 그 말을 듣고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나는 도우러 온 거지 죽으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라.”
“돌아가도 죽어요! 명령 불복종으로!”
“령주님께 보내는 서신을 적어 주마. 가지고 돌아가라.”
“……젠장.”
허필이 한숨을 푹 쉬더니 의자에 등을 묻었다.
“아침나절부터 술 당기네.”
“시켜 줄까?”
“됐어요! 마시다가 애먼 칼이라도 맞으면……!”
그때,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조용.”
그가 자미루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피폐한 안색의 남자였다. 남루한 복색, 찢어진 옷 속에 붕대를 둘둘 감은 것이 보였다.
허필 역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침을 꿀꺽 삼키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이천상이 채소볶음을 씹으며 툭 물었다.
“승부에 미련이 남았나?”
“…….”
“이번에는 멈추지 않을 거다.”
휘두르는 칼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사내, 홍산은 가만히 이천상을 노려보다가 뚜벅뚜벅 걸어가 남은 의자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괴인의 등장에 허필은 엉거주춤했다. 이놈이 적인지 아닌지 도대체 분간이 가질 않은 탓이다.
충혈된 눈으로 이천상을 보던 홍산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나는…….”
“제거 명령이 떨어졌나.”
“……!!”
홍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싸울 생각이었다면 곧장 손부터 나갔을 것이고, 전령이라고 하기에는 기도가 너무 불안정하군.”
“…….”
“그때 듣자니 돌발 행동을 보인 듯한데, 조직은 그런 걸 싫어하지.”
“자리를 펴지 그래?”
“그래서, 나한테 볼 일은?”
홍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천상은 몇 번 죽을 떠먹다가 수저를 놓았다.
“몸 상태는 어떤가?”
“뭐?”
“칼질할 수 있는가 물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물음이었다. 홍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이천상이 백골도의 천을 풀었다.
“꼬리가 붙었다.”
“……?!”
“날 노리고 온 것도 아니고, 죽고 싶지도 않다면 일 인분 몫은 알아서 하도록.”
사아아악!
자미루에 은은한 살기가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