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03
외전 153화. 피에 젖다 (3)
쩌저정!
사면귀의 검을 내리칠 때마다 이천상은 생각했다.
‘확실히.’
도헌의 안목은 옳았다.
칼을 쥐기 전에 권법부터 연마하라.
권법에 능해지면 그 이후부터는 어떤 병장기를 써도 발전이 빠를 거라는 뜻이었다.
그간 무수히 많은 적을 상대하며, 마침내 이천상은 깨달았다.
도헌의 그 발언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권법, 백타술은 무공을 익히기에 알맞도록 신체 전반을 연마하는 데 유리하다. 문파마다 기본공으로 권법을 채용하는 것은 다 그런 이유다.
실제로 권법을 십 년 수련하고 칼을 쥐는 것보다, 권법으로 일이 년 몸을 만들고 곧장 칼을 쥐는 것이 도객(刀客)에게는 훨씬 더 빠르고 유익한 방향일 것이다.
도헌은 경험 많은 무림인이요, 밑바닥부터 기어올라 와 젊은 나이에 광마대주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어떻게든 발전하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더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찾아냈다. 남들보다 더 빠르고, 우월해질 수 있는 길을.
그것이 권법에 대한 깊은 연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도헌의 재능은 비범하다. 그렇기에 병장기를 쥐기 전 권법부터 깊이 연마해야 한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들이 그 방법을 따라 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이유인즉, 권법의 요결을 병장기술의 요결과 일치시킬 만한 안목과 재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헌도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그런 수련법을 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천상에게는 했다. 그의 재능을, 그 알 수 없는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천상은 도헌의 기대를 십 할 이상 충족시켰다.
‘정권(正拳)을 내지르듯 정직하고 힘 있게.’
쉬이익! 쩌엉!
사면귀의 몸이 후방으로 쭉 밀려 나갔다.
외날의 도는 철저하게 베는 것에 특화된 병기다. 찌르기라고 못 할 것은 없지만, 흔하게 쓰이는 공격 방법이 아니다.
이천상의 도첨(刀尖)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면귀의 몸통을 노렸다. 마치 검법의 자격(刺擊)을 보는 듯했다.
힘 있는 자격, 정권 일격이 도법으로 전환된다.
‘뭐지?!’
검배로 막았지만, 그 충격은 온몸에 남는다.
마치 타점에서 발경의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했다. 상대를 꿰뚫는 것보다 타격 그 자체를 살리는 일격, 이런 칼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면귀가 당황하는 사이.이천상의 비범한 재능이 또 한 번,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파아악!
사면귀의 측면 반 장 거리까지 들어가는 이천상.
빠르고 저돌적인 돌진이었다.
삼척장검을 든 검객도, 중원에 흔한 대륙식 박도(朴刀)를 든 도객도 이 정도 거리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권장지각(拳掌指脚), 백타술에 능한 고수의 거리 조절이었다.
‘권법!’
칼을 휘두를 수는 없다. 휘두르다가 손목에 걸린다. 이 정도 거리에선 동작 자체가 큰 도법보다는 맨손 백타술이 훨씬 더 위력적이다.
사면귀는 찰나지간 그것을 깨달았고 방어와 회피, 반격을 차례대로 떠올리며 준비했다.
그때였다.
‘……?!’
이천상의 상체가 뒤로 쑥 밀려 나갔다.
사면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러나?’
물러난 게 아니다.
치고 들어가서 거리를 잡자마자 전진(前進) 궁보(弓步)에서 중단(中段) 좌보(坐步)로 내려앉아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미세하게 상체를 빼서 도검의 반경을 만들었다.
한순간에 이뤄진 변화였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권법의 자세로 도법 투로를 열어 놓았다. 음양허실(陰陽虛實), 좌족과 우족에 실린 힘을 따로 분배하는 것만으로도 권법 백타의 거리에서 도법 참격의 거리가 나왔다.
치링! 서걱!
잘못된 반격 태세의 결과는 뼈아팠다.
검날을 타고 내려간 백골도가 사면귀의 무릎 안쪽을 베었다. 근육까지 잘라 내진 못했지만, 베인 상처로 침투한 마기가 일순간 사면귀의 다리를 마비시켰다.
순간적으로 이동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사면귀의 대처는 훌륭했다.
사아악!
그 자리에서 방어초인 난검백사(亂劍百蛇)로 이천상의 접근을 봉쇄하고 곧장 일점사교(一點蛇咬)로 천돌혈을 노려 왔다.
눈부신 대응 능력이었다. 한 방 먹었다고 당황해서 물러나지 않는다. 침착하게 후속타를 끊고 공격까지 감행하는데, 그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터어엉!
사면귀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강철 검이 허공에서 터진 발경으로 길을 잃었다.
대처는 훌륭했지만, 두 개의 초식을 연달아 내치는 동안 이천상 역시 상대에 대한 대비가 되었다.
후속타를 칠 생각도 없었다는 듯 자세를 더 높여 일점사교를 튕겨 낸 후 우상단에서 좌하단의 대각으로 칼을 휘둘렀다.
피슉!
또 한 번 손목에 일격을 먹었다.
무릎의 자상보다 훨씬 더 얕다. 말 그대로 스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무릎에 먹었던 공격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더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백골도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바로 검을 쥔 오른손 손목이었기 때문이다.
다리를 다치면 이동이 힘들거나 힘을 받을 수 없어 위험하지만, 손목이 잘려 나가면 그 즉시 전투 불가다. 사면귀는 일평생 검만 휘둘러 온 순수 검객이었다. 백타술이라고 나쁜 건 아니지만, 이천상은 권법만으로 무수히 많은 고수를 쓰러트려 온 백전노장의 고수였다.
사면귀의 몸이 자연스럽게 후방으로 물러났다.
본능적인 대처였다. 의식이 아니라 몸이 알아서 물러난다. 무조건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행동을 강제했다.
이천상의 눈이 번뜩였다.
쩌저정!
한번 물러나기 시작하면 힘을 받기가 어렵다.
한번 몰아치기 시작하면 불처럼 기세가 타오른다.
사면귀는 물러났고 이천상은 몰아쳤다. 탄력 좋은 하체에 한껏 힘을 담아 병장기술의 거리를 잡고, 짧고 강한 탄도(彈刀)를 연달아 내쳤다.
사면귀로서는 피할 수가 없었다. 받아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쩌저저저저정!
도검이 부딪치며 화려한 공명음을 터트렸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귀가 울리다 못해 멍하다. 베인 무릎의 감각은 다시 돌아왔지만, 도저히 수세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전장에서 이탈해야 해.’
이천상이 했듯, 그 역시 수하들과 붙는 적에게 달려들 수 있다.
사면귀의 눈이 빠르게 홍산과 허필을 훑었다. 둘 중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양 갑갑하고 무거운 압력이 머리를 짓눌렀다.
서걱!
가슴에 사선으로 자상이 났다.
정확히 명치 위를 노린 참격이었다. 본능적으로 상체를 빼서 살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적의 칼이 살과 뼈를 가르고 심맥까지 찢어 버렸을 것이다.
사면귀의 눈이 충혈되었다.
우웅. 우우웅.
도검이 부딪치는데도 특유의 쇳소리가 나지 않았다.
몸뚱이가 심해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팔다리는 제대로 놀릴 수 있는데, 촉감을 제외한 오감이 죄다 둔해졌다.
‘이건……!’
파바바박!
집중력의 저하로 순식간에 네 번의 칼질을 당했다.
몸 이곳저곳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베인 감각은 있는데 통증은 없었다.
사면귀가 검을 내질렀다. 회전하는 백골도 밑, 이천상의 우측 빗장뼈를 향한 검격이었다.
꾸웅!
백골도의 도병 끝으로 검날을 쳐 내는 이천상의 반응 속도가 실로 대단했다.
상대가 자신의 검을 방어했다는 사실보다, 충만한 내공으로 가득한 도검이 부딪쳤는데도 낮고 둔탁한 소리만 전해진다는 사실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
그제야 사면귀는 깨달았다.
‘음공(音功)!’
이천상의 백골도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던 금빛 마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곳을 채운 진기는 찬연한 붉은빛이었다. 핏빛도 아니고, 불처럼 환한 적색도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진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이 나는 다홍빛이었다. 넘실거리며 흘러나오는 마기가 마치 새의 날개처럼 보인다. 쌍면해골 너머로 흐르는 붉은 연기, 살점 없는 해골 병사의 등 뒤로 대붕의 날개라도 달린 듯했다.
‘저건?!’
파아악!
귀가 먹먹한데도 회전하는 백골도에서 터진 폭발음이 귀를 울렸다.
손목의 회전, 발경의 극대화다. 권법 요결을 도법에 담아 휘두르니, 반회전하는 참격 끝에서 수십 가닥의 실타래 같은 도기가 회전하며 사면귀의 몸을 노렸다.
퍼버버버벅!
청력이 돌아왔다. 아니,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몸 내부 곳곳에서 터진 소리는 진동이 되어 불쾌하기 그지없는 감정 두 개를 끌어냈다.
바로 두려움과 체념이었다.
‘도대체 내가 누구와 싸웠던 거지.’
권법가와 싸운 것일까, 아니면 도객과 싸운 것일까.
진정, 적과 싸운 것이 맞기나 한 것일까.
사면귀의 눈이 흐릿해졌다. 폭발하는 도기에 당해 장기 몇 부분이 찢겨 나가고 왼팔이 덜렁거렸다.
침투하는 마기가 온몸을 벼락처럼 쑤시고 돌아다니며 내공을 억제하고 있었다. 수준이 다른 마기, 몇 차원 높은 초상승의 마공이었다.
사면귀가 이천상의 눈을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옷을 입은, 새하얀 백골의 칼날을 휘두르는 적의 눈은 그 와중에도 무심했다. 마치 도살자를 보는 듯했다.
사면귀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해 온 벗이자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버린 상관의 얼굴, 아니 가면이었다.
‘이제는 네 얼굴이 기억나질 않아.’
서걱!
사면귀의 머리가 하늘 높이 날아갔다.
“후우.”
마지막 일도로 승리를 거머쥔 이천상이 숨을 몰아쉬었다.
한번 밀어붙일 때 폭발적인 연격을 써야 하는 상대였다. 숨이야 이각이 넘도록 참을 수 있지만, 짧은 시간 내공을 밑바닥까지 끌어 써야 했기 때문에 호흡이 부족하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결과는 좋았다.
‘역시 괜찮군.’
그가 백골도를 내려다보았다.
불그스름한 마기가 흩어지며 수십 마리 작은 새로 변했다.
‘자주 써먹을 무공은 아니야.’
적봉진명마공(赤鳳震鳴魔功).
오의(奧義)를 깨우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핵심 요결인 진명파동결(震鳴波動訣)을 끌어다 썼다.
강력한 진동과 음파로 충격을 전달하는 요결이었다. 그 힘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 상대에게 충격을 준 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부담이 된다.
주르륵.
이천상의 입에서 실낱같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진동 상쇄를 다 하지 못해 내장이 조금 진탕되었다.
‘괜찮아.’
굳이 적봉을 꺼내지 않아도 이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허필과 홍산이었다. 그중 홍산이 위험했다. 제 기량의 반밖에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멀쩡한 고수와 붙으니, 시시각각 밀릴 수밖에 없었다.
‘…….’
홍산을 보던 이천상이 허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필은 잘 싸우고 있었지만,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밀리는 듯도 했다.
파아아악!
이천상은 허필 쪽으로 달려 나갔다.
위태롭기로 따지자면 홍산이 더 심했지만, 굳이 도우러 갈 생각이 없었다.
‘증명해 봐라.’
이천상은 이제, 효율만으로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사람 간의 이해관계를, 무림이라는 세상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는 그는, 분석 여부를 떠나 무사마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죽으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으로 알겠다.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그때는 술 한 잔 받아도 되겠지.’
번쩍!
백골도가 허필과 싸우는 은도해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