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05
외전 155화. 피에 젖다 (5)
“허억! 허억!”
홍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에 자상을 꽤 많이 입었다. 하지만 깊은 상처는 하나도 없었고, 피는 제법 흘렸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상이었다.
정확히는 폐장 능력이 저하되었다. 회운견의 일장에 좌측 폐장이 통째로 흔들렸기 때문이다.
폐란 곧 숨이 들어와야 하는 통로였다. 들어온 숨은 폐를 거쳐 대자연의 기를 온몸으로 퍼트리는 역할을 했다.
그중 한쪽에 문제가 생겼으니 호흡이 원활하지 않고 소모된 진기도 잘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폐장은 곧 금기(金氣)의 영역이라, 폐에 문제가 지속되면 골육이 상하기 마련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영구적인 근골 장애가 일어날 것이다. 무림인에게는 치명적이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고르는 홍산을 보던 이천상이 허필을 돌아보았다.
“괜찮으냐.”
“저야 뭐 팔팔합니다.”
말과는 달리 허필도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자체적으로 회복이 가능한 정도로, 며칠 푹 쉬면 전장에 나서도 될 정도였다.
‘그게 문제지.’
당장 싸우면 안 된다는 것.
싸울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더 깊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애초에 제 기량을 보일 수도 없거니와 이천상을 노리는 이들의 실력이 하나같이 뛰어나서, 지금의 허필로는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저야 쉬면 낫는다지만, 저치는 힘들 것 같은데요.”
홍산을 보는 허필의 눈은 상당히 진지했다.
“좌측 폐장이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낯짝을 보니 미세 손상일 테지만, 잔존하는 마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골로 가겠는데요, 저거.”
“그렇겠지.”
“의원에게 보내야 합니다. 살릴 거라면요.”
이천상이 홍산에게 물었다.
“그렇다는데, 어쩔 거냐?”
“캬악! 퉤!”
핏물을 뱉은 홍산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혈혼각으로 가면 죽어. 그놈들, 꽤 지독하거든.”
“안 가도 죽는다.”
“어떻게든 될 거야. 발목 안 잡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너를 신경 쓰게 한 순간부터 이미 발목은 잡힌 거다.”
“할 말 없게 하는군.”
사면귀가 죽고, 허필을 도와 은도해까지 물리친 이후 홍산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홍산 역시 두 사람이 승리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신을 돕지 않는 것을 보며, 이천상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동귀어진에 가까운 수법으로 회운견을 죽였지만, 하필이면 폐장을 다쳐서 이 모양이 되었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물끄러미 홍산을 보던 이천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의원에게 가지 않고 폐장의 손상을 바로잡을 방법은 있다.”
“……?!”
홍산이 놀란 눈으로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물론 허필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목숨 걸고 싸웠으니, 네가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빌어먹을, 그걸 꼭 목숨 걸고 싸워 봐야 아는 건가.”
“너는 한 번 날 죽이러 왔다. 그 상황에서 그 정도 확인 절차는 거쳐야지.”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되, 이천상의 방식은 아니다. 사람의 행동보다 자신의 분석을 통해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방법이 뭔데?”
“하나만 약속해라.”
“그 약속이라는 걸 꼭 해야 살려 주는 건가?”
“되물을 정신은 있나 보군.”
홍산이 쓰게 웃었다. 웃는 와중에도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뭔데?”
“병장기를 버려라.”
“뭐?”
“너는 병기술보다 맨손 백타에 더 재능이 있어.”
“뭔 개소리여?”
평생 처음 들어 보는 소리였다. 홍산이 얼떨떨한 눈으로 이천상을 쳐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바뀔 수 있을 거다. 함께한다고 했으니, 백타술과 새로운 마공도 가르쳐 주지.”
“……?!”
“칼에 미련을 버려라. 그걸 약속하면, 여기서 너를 고치겠다.”
그게 꼭 약속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일까?
그렇다. 심각한 문제다.
평생 병기술로 단련된 무사가 신외지물을 손에서 놓고 맨손으로 싸운다는 것은 본인 기량의 절반도 안 되는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나 검신일체(劍身一體)의 경지에 진입한 고수에게 칼을 버리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홍산은 진지했다. 충격은 받았지만, 이천상이 말하는 새 마공과 백타술이라는 발언이 그를 숙고하게 했다.
“네 말은, 네가 익힌 마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뜻이냐?”
“그렇다.”
“……!”
이천상의 마공은 그 수준이 신교 최상위급이다.
병장기술도 좋지만, 이천상이 익힌 최고급 마공은 그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마공은 먹이 사슬 관계가 철저했다. 동급의 고수라면, 신(神)에 이른 전투 감각과 운이 따라 주지 않는 이상 상위의 마공을 익힌 자가 구 할 이상의 확률로 이긴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었다. 사마공을 익히는 자들이 겪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운이 닿지 않으면 한 단계 위의 마공도 익히기 어려운 세상에서, 신교 최고급 마공을 건네준다고 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너나 약속 지켜라.”
병장기술이고 뭐고 최고급 마공을 가르쳐 준다는데 오히려 고개 숙여 고맙다고 할 사람은 이쪽이다.
아니, 그런 걸 떠나 당장 약속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죽고 나서는 칼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가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홍모후의 마지막 발언도 그의 선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신교를 나가라. 신교를 나가려면 일단 살아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 일 조장은 이리 와라.”
이천상의 홍산의 맥문을 쥐었다.
“착점살수는 네가 더 잘 구사할 테니, 점혈은 네게 맡기겠다.”
“어떻게 하시게요?”
“일차로 이놈의 단전을 봉쇄하고, 이차로 기경팔맥의 길이 좁아지도록 주변 스물네 개의 혈도를 칠 할 이상 좁혀 놓아라.”
허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홍산이 작게 중얼거렸다.
“죽이려면 그냥 죽여. 섬세하게 죽이려 들지 말고.”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려는 거다.”
“단전 봉쇄야 그렇다 치고 기경팔맥 주변을 왜 좁혀 놔?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저승사자가 침을 꼴딱꼴딱 삼킬 텐데 그걸 다 조이라고? 죽여, 인마.”
“약속은 약속이다. 한 번 건 목숨, 두 번 못 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이차까지는 나도 할 수 있지만 삼차 점혈까지는 못 한다. 섬세한 기술이 필요해.”
“삼차까지는 저도 몇 번 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난 아예 없다.”
“젠장,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기경팔맥 주변 대혈(大穴) 스물네 개를 조인 후 곧장 뇌호혈의 상하단을 잇는 진기를 실처럼 얇게 유지하도록 조정해. 끊어질 듯 말 듯하게.”
“그냥 목을 베는 게 낫겠는데.”
“뇌호혈까지 조정하는 순간, 금강야차마기로 폐장을 강제로 펼 거다. 내 마기의 밀도가 높아서 끌어당긴 숨이 마기와 맞물려 폐장 회복을 극단적으로 가속화할 수 있다.”
“아하?”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대신 폐에 고인 약간의 피를 끌어낼 거야. 그때가 중요하다. 기침으로 토해 내게 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의식이 멀쩡하면 진기가 흔들려.”
“뇌호혈의 진기를 조정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신경 반사를 억제하기 위해서요.”
“어려운 용어는 모른다. 그리고 기침이 나오는 순간, 뇌호혈을 본래대로 확장해라. 동시에 스물네 개의 대혈을 역순으로 풀고, 단전까지 개방해. 이걸 한순간에 이뤄 내야 한다.”
“가사 상태로 만들었다가 일시에 길을 열어 폐장 능력 활성화하고 피를 토해 내게 한 후 자체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 만큼 호흡을 관리하는 겁니까?”
“내 마기가 중심이 될 거다. 밀도 높은 내 마기가 적절히 남으면 이놈의 마기와 동조하여 치유를 시작할 수 있다.”
“으음, 그 전에 잡스러운 기운이 섞이면 폭발해서 죽겠지요.”
“그래서 뇌호혈을 조정하고, 이후 역순으로 풀어야 한다.”
“어렵지만 해 볼 만하군요. 이거 간만에 열정이 불타오르는데요?”
두 사람의 복잡한 대화를 듣던 홍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땅에 묻지 말고 화장해 줘라.”
* * *
“뭐?”
호면귀의 눈이 흔들렸다.
“사면귀가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호면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럴 수가 있나?’
사면귀의 실력은 십이지신에서도 두 번째로, 자신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고수일수록 한 수 차이가 크다고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면귀는 십이지신 중 유일하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런 사면귀가 당하다니?
심지어 혼자 간 것도 아니고 무려 십이지신 네 명을 끌고 갔다고 했다.
육대주급 이상의 실력자 하나에, 육대 부관급 이상의 강자 넷이다. 급습일 경우 어지간한 중소 문파도 도모해 볼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그 병력이 다 당한 것도 모자라, 생존 능력이 탁월하다는 사면귀도 당했단다.
“사건이 커졌군.”
쥐새끼 한 마리의 돌발 행동으로 십이지신의 절반을 잃었다.
이 피해는 엄청나다. 이 정도가 되면 ‘그분’께서도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호면귀는 침착하게 물었다.
“적들은?”
“적에게 붙은 청아서는 전투 불가 상태이고, 나머지 둘은 어느 정도 피해는 있지만 꽤 멀쩡한 상태라고 합니다.”
“가관이군.”
와중에 하나도 죽이지 못했단다.
이 정도 실력으로 차기 신교의 정점에 서 보겠다고 꿈에 부풀었다니,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허탈한 기분이지만, 와중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이천상, 그놈이 보통 놈은 아니었다.’
무공의 경지만 생각하면 자신보다 아래였다. 어쩌면 사면귀보다도 반 수 아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놈에게서 위험한 기도를 읽었다.
지극히 뛰어난 전투 감각, 그리고 안목.
게다가 놈이 익힌 마공은 분명 자신들의 마공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고차원적인 무학이었다.
그 정도 실력자라면 이쪽이 당한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 중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이천상은 살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게 기습하라 했거늘.’
명령을 언제나 찰떡같이 수행해 온 사면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적의 능력이 너무 뛰어났던 건지 결국 이렇게 죽어 버렸다.
‘일단은 십이지신부터 다시 꾸리는 게 시급하다. 다행히 후보들은 많으니, 구색은 맞출 수 있겠어.’
호면귀가 보고하는 녹성계(綠聲鷄)에게 말했다.
“후보들을 전부 추려서 데리고 와라. 최고의 실력자들로.”
“알겠습니다.”
“제대로 꾸려지면 당분간 대외 활동을 금지토록 하겠다. 위에는 내가 알릴 테니, 조정이 끝나면 안가(安家)로…….”
그때였다.
퍼어엉!
화려하기 그지없는 발경의 폭발.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기파는 덤이었다. 그간 조용하다가 일순간 퍼져 나오기 시작하는 마기가 실로 압권이다.
호면귀의 눈이 흔들렸다.
녹성계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보고 오겠…….”
“아니, 알아보고 말 것도 없다.”
마기가 터지는 순간, 적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숫자도.
“이거 정말 걸물이군.”
호면귀의 눈이 서서히 휘어졌다.
기쁨에 찬 미소였다.
“나중에 잡으러 갈까 싶었더니, 직접 와 버렸다고?”
퍽! 스르륵! 쿵!
제법 굵직한 나무가 사선으로 베이며 떨어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새하얀 백골도가 모습을 드러냈다.